[Opinion] 열린 공간은 어디로 향하는가? [시각예술]

안톤 비도클의 <모두에게 불멸과 부활을!>에 관한 단상
글 입력 2019.11.28 1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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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안녕 용문객잔>에 등장하는 여자 매표원은 영화관이라는 죽은 공간을 아주 느린 속도로 배회한다. 그와 달리<모두에게 불멸과 부활을!>의 미이라는 모두가 죽지 않는, 혹은 다시 살아나는 불멸과 부활의 공간을 배회하면서 다시금 되살아난다. 응시하고 정지하는 사람들 속에서 그는 유일하게 불멸(outlived)의 존재들에게 걸어가 그들을 만지고 느끼고 말을 거는 것처럼 보인다.


박물관을 모종의 유토피아적 공간으로 보이게 하는 이 미이라와 박물관의 기묘한 만남은 미술관 내 상영관, 혹은 영화관이라는 어두운 공간에 앉아 스크린을 바라보고 있는 관객들과 이 영화에 등장하는 여러 정지된 인물들과의 비교를 가능케해준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박물관은 정지된 인물들, 응시하고 있는 인물들과 미이라라는 배회하는 존재, 만지는 존재가 공존하고 있는 곳이다.

 

이 다양한 관람 경험은 사실은 박물관(museum)에게는 아주 당연한 것이었다. 박물관이 정의 불가능하거나, 혹은 지나치게 넓게 정의되는 까닭은 그것이 완전히 열려있는 공간이기 때문일 것이다. 박물관에서 관람객은 보고 싶은 것을 정지된 상태로 오래 응시할 수도, 혹은 보고 싶지 않은 것은 지나칠 수도 있다. 이 완전히 열린 공간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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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미이라’라는 불멸, 부활의 아이콘과 박물관의 결합은 박물관을 불멸의 상태, 부활의 상태, 혹은 끊임없는 유동의 상태로 만든다. 한편 이 영화 속 박물관의 정지된 인물들은 작품, 전시된 것들을 응시하며 부동의 상태로 관객의 상태를 인지하게끔 한다. 다시 말해 이 정지는 실제 관객을 환기시킨다는 점에서 영화 속에서는 현실의 관람 경험을 드러내는 기제로 작용한다.


우리는 이 영화를 보기 위해 어찌되었든 멈춰서야 하며, 스크린을 응시해야 한다. 스크린이 곧 거울이 되어 무언가를 응시하고 있는 관객, 나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다. 이 미이라의 공간과 인물들의 공간은 영화 속에서 명확히 구분할 수 없이 뒤섞여 있다. 이 뒤섞임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영화의 처음과 중간, 두 번 등장하는 flickering 씬이다.


이 flickering 씬은 검은색 화면과 하얀색 화면을 빠르게 교차시키며 검은 상영관의 공간, 그리고 밝은 박물관의 공간을 환기시킨다. 동시에 관객을 스크린으로부터 거리두게 만듦으로써(눈이 아파 계속 쳐다보기 힘들다) 직전까지 이어졌던 응시를 정지시키기도 한다.


영화는 이러한 방식으로 지속됨-불멸과 순간-부활을 오가며 미이라를 인간의 형태로 부활시키기에 이른다. 그는 태초에 인간이었다가, 초연한 죽음의 순간(홀로 자신의 몸에 붕대를 감는 그 순간) 이후에 미이라로서 불멸의 존재가 된다. 이 불멸의 존재는 박제된 동물들에게 다가가 자신의 살결을 파묻기도 하고, 정지된 사람들 사이를 자유롭게 오가며 박물관을 온 몸으로 느끼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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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부활의 순간, 그 순간에는 프레임이 완벽하게 가시화된다. 혼자서 죽음을 준비했던 것과 달리 정지해있던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다시금 인간으로 태어나기에 이르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부활의 순간, 그리고 그 이후에는 그에게 맡겨졌던 ‘배회’라는 동적 역할이 박물관의 다른 인물들에게 맡겨지고 반전된다. 이제 우리는 미이라와 관객들 사이의 관계전복을 통해 한 가지를 떠올려볼 수 있다. 열린 공간, 그 공간은 어디로 향하는가?

 

 


3.



현대의 모든 관람 경험은 열린 공간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더 이상 영화를 보는 경험은 닫힌 공간에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사람들은 영화를 멈추거나, 인위적인 변화를 가할 수 있다. 혹은 컴퓨터를 닫아버리거나 휴대폰을 끌 수 있다. 미술관 내 상영관의 경험 역시 그러하다. 영상은 계속해서 재생되고 사람들은 각자만의 시작과 끝을 가지고 영상물을 바라본다.


이제, 닫힌 곳에서 무언가를 응시하는 것은 응시 그 이상의 경험을 수반할 수밖에 없다. 멀티플렉스에서의 영화 ‘체험’, 영화관에서만 가능한 스펙터클의 체험 등은 모두 응시를 초과하는 것들이다. 안톤 비도클의 작품 <모두에게 불멸과 부활을!>에서 느껴지는 기묘한 경험은 완전히 열린 관람경험으로부터 수반된다.


실제 존재하는 거대한 상영관의 경험과 완전히 열린 박물관이라는 공간 내의 유동과 부동의 상태 경험이 맞물리는 것. 그 사이에서 일어나는 집합 관계의 전복은 흥미롭다. 상영관은 박물관에 속해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관객이 느끼는 상영관은 박물관을 초과한다. 관객은 스크린을 응시하는 부동의 경험과 미술관을 배회하는, 혹은 컴퓨터를 열고 닫는 유동성을 뒤섞어 경험한다.


안톤 비도클의 작품은 그 열린 관람 경험을, 열린 공간을 불멸과 부활의 공간이라고 바라보고 있는 듯 하다. 관객은 정지된 인간이었다가도 한 순간 미이라가 되어 모든 곳을 뒤훑고 다닌다. 그리고 영화는 그것이‘순수한’ 응시임을 강조하는 듯 보인다. 오히려 순수한 응시는 무언가를 ‘지속적’으로 응시하는 것만을 겨냥하지 않는다. ‘순간’의 부활 역시 박물관의 속성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열린 공간은 보이스오버 나레이션을 통해 서술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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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이 영화에서 박물관이라는 공간은 무작위적인 것처럼 보이는 이미지들의 뭉텅이와 목소리의 출처가 보이지 않는 보이스오버 나레이션을 통해 서술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영화에 등장하는 박물관이라는 디제시스적 공간은 매우 단순하게 구성되어 있고, 복잡한 박물관에 관한 철학을 읊는 나레이션이 그 위를 덮고있다는 점이다.


이 영화에서 미이라가 등장하는 장면, 또 이따금씩 등장하는 검은색과 하얀색의 flickering 장면을 제외하고는 모두 박물관의 역할을 반복하는 듯한 이미지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 모든 이미지를 훑으면서 결합시키는 것은 니콜라이 페도로프와 감독인 안톤 비도클의 철학이 드러나는 나레이션이다. 나레이션은 계속해서 박물관을 부활과 불멸의 장소로 바라보면서 아카이빙(archiving)이 가지는 중요성에 대해 역설한다.


“박물관의 목적은 사람들을 수집하는 것이다. 박물관은 삶과 얼굴의 수집이다. 박물관이 해야하는 일은 따라서 전대에 의한 후대의 부활이다. (…) 박물관은 가장 최초의 과학적이면서도 예술적인 시도이다.” 이러한 나레이션이 수행하는 것은 다름 아닌 어떤 통합의 과정이다. 그것은 박물관이라는 아카이빙의 실제적 공간과 아카이빙을 아카이빙 하는 메타아카이빙의 가상적 공간 사이를 결합시킨다.


그럼으로써 오히려 디제시스는 사운드의 차원으로 이행하고, 이미지는 다큐먼트로서만 남아있게 된다. 이 사운드 차원의 디제시스가 잠입해 뚫고 들어오는 것은 오히려(표면적으로) 박물관과는 거리가 멀어보이는 미이라와 flickering 씬 등이다. <모두에게 불멸과 부활을!>은 디제시스와 비디제시스의 공간을 오가며, 혹은 아카이빙과 메타아카이빙의 장소를 오가며 아카이빙의 장소가 어디인지에 대해 끊임없이 환기시킨다.


“박물관은 오래되고, 죽었으며, 사용하기에 부적합한 모든 것을 모은 곳이다. 바로 이것 때문에 그것은 세기의 희망이다.” 모종의 순수한 응시, 그것은 무언가를 처음부터 끝까지 바라보는 닫힌 경험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닐 것이다. 배회의 경험을 통해서 우리는 무언가에 더 가까이 다가설 수 있다.


이미지는 닫힌 공간을 향하고, 나레이션의 디제시스는 열린 공간을 향한다. 본래 디제시스가 닫힌 공간에 머물렀던 것과 달리 이 영화에서 디제시스는 오히려 틈이 남아있는 목소리로서 서술되면서 디제시스 자체를 열린 공간에 풀어놓는다.


매체철학자 프리드리히 키틀러는 매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일명 매체라고 불리는 유령은 절대 죽을 수 없다. 하나가 멈추는 곳 어딘가에서 다른 하나가 시작된다. 문학은 참호들 사이의 무인지대 어딘가에서 죽어간 것이 아니라, 기술적인 재생산의 가능성에 이르러 죽은 것이다.” 어쩌면 이 영화에서 박물관은 키틀러적 의미의 ‘매체’에 해당하지 않을까?

 

 



[김혜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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