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말 그대로, 미학 수업 [도서]

문광훈의 『미학수업』
글 입력 2019.11.26 1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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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 구스타프 카루스

<드레스덴 부근 엘베강 위의 곤돌라>, 1827

 

 

나는 아주 오래전부터 ‘이야기’의 힘을 믿어왔다. 이야기엔 사람들을 움직이는 힘이 있다. 이야기는 우리 삶에 다양한 형태로 스며든다. 누군가의 발화를 통해, 그림을 통해, 문학을 통해. 때로는 영화로, 음악으로, 연극으로. 각각 다른 ‘예술’이라는 옷을 입은 이야기는 조금씩 일상을 파고든다. 이렇게 일상 속에 자리 잡은 예술은 우리의 일상을 풍성하게 만든다. 나의 범주를 벗어나 새로운 세계로 나아갈 때, 그 순간에 겪는 갈등과 흔들림, 그 속에서 길을 찾아 다시 단단해지는 과정, 그 인지적이고 심미적인 변화의 경험은 꽤 오래전부터 내가 예술을 좋아하는 이유였다. 그리고 그 변화의 과정이, 나와 다른 세계를 경험하고 공감하고, 그럼으로써 나를 확장하는 경험이 내가 느끼는 ‘아름다움’이었다. 아름다움에 대한 여러 기준이 있겠지만, 가장 우선순위를 두는 기준은 늘 이 ‘생각의 확장성’이었다.

 

대학생일 때는 늘 예술 철학, 미학 수업을 매 학기 시간표에 끼워 넣곤 했다. 때론 전공과목일 때도, 교양과목일 때도 있었다. 미학 수업을 접하고 직접 수강하면서 ‘아름다움의 기준과 범위’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지만, 지난 나를 돌이켜보면 아마 어릴 적부터 어렴풋이 아름다움이 단순히 외적으로 뛰어난 것이나, 직관적으로 예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고, 영화를 보고, 글을 쓰는 습관은 중학생 때부터 있었으니 문화적 상징물을 이용해 가치를 나누는 일 –내가 아름답다고 정의하는 일은 꽤 오래전부터 나라는 사람을 형성하는 기준이었던 셈이다.

 

 

 

예술, 새로움을 향한 사유의 항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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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이 아름다운 이유는 해묵은 감각을 일깨워 다른 삶으로 일깨워주기 때문이다!”

 

이 책을 주의 깊게 보게 된 이유는 책표지 뒷장에 수놓아진 위 문장 때문이었다. 대학 시절 내내 나름대로 발전시켜온 예술에 대한 나의 시각은 결국 저 문장과 동일했다. 예술은 인문학처럼 삶의 방향을 잃게 만드는 일에 일조한다. 사람들은 방향을 잃고 배회하며 서성거릴 때 내면의 자신을 마주하고 자신의 길에 대해 고민한다. 익숙함을 깨는 도끼와 같은 도구, 나에겐 그것이 예술이 가진 첫 번째 의의였다.

 

책을 읽는 내내 말 그대로 ‘미학’ 수업을 듣는 듯했다. 요즘 이렇게 열심히 읽었던 책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필기를 하고 줄을 치고 한 문장 한 문장을 읽으며 형광펜을 그었다. 나와 같은 생각을 만났을 때 공명하는 그 기쁨을 아는가. 이 책 속에 담긴 문장들은 그 공명의 기쁨을 내게 선물해주었다. 작가님이 직접 진행하시는 수업을 듣고 싶을 정도로 대부분의 문장이 마음을 때렸다. 아주 시원하고 깊게. 그 문장들을 고스란히 기억하지 못하는 내 머리가 답답할 정도로.

 

 

안정과 지속은 생활의 중요한 요소지만, 이때의 안정이 기계적인 반복이라면 한번 물어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온갖 순응주의가 주는 안락함을 때로는 떨쳐낼 수 있어야 한다. 예술은 이런 순응주의에 대한 비강제적 예방 조치이고 면역체계다. 자동성에 대한 이 같은 거부는 –그것이 궁극적으로 문화적 헤게모니의 요구에도 미친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철저하다. 예술은 그 어떤 것에도 자기 결정의 권리를 양도하지 않는다. 의타적·자족적 의식이야말로 예술의 죽음이다. (27)

 

예술의 경험은 밀도의 경험이다. 예술 작품에는 과거로부터 전해오는 미래의 에너지가 경험의 잔해로 기억 속에 녹아있기 때문이다. 이 에너지를 얼마나 넓게 느끼고 얼마나 깊게 생각하는가는 각자에게 달려있다. (28)

 

 

예술을 삶을 확장하기에 더없이 좋은 도구다. 단순히 예쁘고, 본능적으로 호감을 느끼는 외적인 아름다움이 있다. 미의 시작점이다. 이 아름다움이 나쁘지는 않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아름다운 것을 추구하려는 욕망을 억누를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이 하나의 규범이 되고 기준이 되어 모든 것들을 평가하는 잣대가 될 수는 없다. 획일화된 기준이 설정되는 순간 세상의 다양성은 위협받는다. 이 시점에서 등장하는 것이 미의 중간지점이다. 아름다움의 중간 기착지는 끊임없는 확장성과 새로움에 있다. 획일화된 기준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느끼고 사유하는 것, 해묵은 일상에서 벗어나 다시 요동치는 생동감을 얻는 것이 아름다움이 지닌, 그것을 다루는 예술이 지닌 능력이다.

 

 

심미적 경험에서는 누구도 지배자가 아니며, 어떤 이도 다른 이를 억압하지 않는다. (29)

 

예술은 이 다른 현실, 다른 세계로 나아가는 문이요 창이며 입구이자 교차로다. 시와 그림과 음악이 발산하는 분위기는 우리를 언제나 다른 영역으로 데려다 준다. 그곳은 우리가 흔히 보아오던 세상과는 다르다. 그것은 더 넓고 깊으며 더 평화로운 곳이다. 혹은 더 끔찍하고 기괴한 곳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심미적 충격을 통해 우리는, 어떻든, 좀 더 나은 세상을 꿈꾼다. (8)

 

 

 

 

아름다움, 나의 세계를 넓히는 힘



 

삶의 변화는 내가 꿈꾸면서 다른 사람의 꿈을 깨울 수 있을 때 비로소 일어난다. (28)

 

 

앞서 나는 ‘이야기의 힘을 믿는다’ 말했다. 이야기엔 말 그대로 한 사람 한 사람의 생각이 녹아있다. 예술은 이야기를 담는 그릇이다. 그것은 활자 넘어 더 다양한 형태로 사람들의 마음을 두드린다. 소설이나 영화를 보면서 울고 웃을 때, 노래 가사에 위로를 받을 때, 잔뜩 신나는 리듬에 기분이 고조될 때, 연극과 그림에 감탄할 때 우리는 이야기 속으로 한 발자국 들어간다. 그리고 이 발걸음은 내가 아닌 다른 이의 이야기에 공감하는 첫 출발점이 된다. 예술 작품 속 감정을 공유하고 그 이야기에 몰입하는 것, 그래서 현재의 나의 세계를 넓히는 것, 그것은 결국 예술을 통한 사유와 연결된다.

 

 

그러므로 감각만의 미는 반쪽의 미다. 감각이 사유와 연결되지 못한다면, 그 미는 거짓이다. 참된 아름다움은 나와 타자, 현실과 이념을 잇는다. 이 이어짐 속에 두 세계의 대립을 넘어선다. 미는 이어짐이고 넘어섬이며, 이 넘어섬 속의 균형이다. 그리고 이 균형 속에 행해지는 반성이다. 반성의 능력이야말로 참된 아름다움이다. 왜냐하면 반성으로 하여 대상의 미는 나의 미가 되기 때문이다. 미켈란젤로가 완성한 메디치 예배당의 궁륭은 이런 느낌을 준다. (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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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누아르, <뱃놀이하는 사람들의 오찬>, 1881

 

 

예술을 통한 사유, 이를 통해 나의 세계를 확장하는 일은 세상을 유지하는데 아주 중요하다. 사람들은 자신이 보고, 겪고, 경험하는 세상 속에 살아간다. 물리적으로 우리가 느끼는 세상은 한정적이다. 더구나 사람들은 자신의 취향에 맞는, 자신과 가치가 비슷한 것들로 자신의 세계를 꾸민다. 이야기를 담은 예술은 이 ‘비슷함’의 장벽을 뛰어넘는다. 예술은 예술이라는 이름 아래 조금 더 많은 자유가 허용되고 그 속에서 우리는 누군가의 꾹꾹 눌러 담은 생각들을 풀어 읽는다. 예술적 상징을 해독하는 과정이다. 그 해독의 과정을 통해 우리는 세상을 사유한다. 나, 나와 비슷한 것들이 아닌 전혀 다른 존재에 대해서.

 

 

예술에서 표현된 모든 것은 삶을 드러낸다. 이때의 드러남은 직접적이라기보다는 간접적이다. 그래서 ‘비유적’이라고 흔히 얘기된다. 그리고 삶이란 게 작품을 쓴 사람(예술가)뿐만 아니라 나(우리/독자)도 살아가는 것이라면, 그것은 결국 우리 모두에 관한 것이다. 예술은 늘 인간의 삶의 일반을 표현한다. (177)

 

삶의 기획은 지금 여기에서, 나로부터, 내 감각과 경험과 심성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리고 이 느낌과 생각이 절실하다면, 그것은 타자성 또는 이타주의로 나아갈 수 있다. 절실한 것의 감정에는 거짓이 없기 때문이다. 예술은 바로 이 점-자기를 속이지 않는 데서 시작한다. (31)

 

 

결국, 아름다움이 그리고 그것을 다루는 예술이 향하는 종착지는 ‘나’에서 출발해 ‘타자’로 향하는 이해이다. 예술은 해묵은 감각을 일깨우고, 이야기를 담아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공감을 통해 결국 내가 아닌 ‘타인’을 이해하는 기반을 마련한다. 그리하여 예술은 세상을 사유하는 실마리를 제공하고, 아름다움은 이 사유적 과정을 통해 얻어지는 심미적 경험이 된다.

 

 

 

활자로 만들어진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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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카소, <비유 마르 병, 유리잔, 기타 그리고 신문>, 1913

 

 

종종 나는 활자에서 태어나, 활자로 만들어진 인간이라는 생각을 한다. 몸은 부모님으로부터 태어났지만, 자아가 형성되던 십 대 시절에 만났던 수많은 글자들이 내 생각과 가치관을 형성했다. 덕분에 어떤 것을 받아들이든, 나를 그 미묘하고 추상적인 감정의 흐름을 언어로 받아 적는다. 나를 구성하는 생각의 논리가 활자이기 때문에 그림을 보든, 영화를 보든, 어떤 소리나 이미지로 구성된 메시지를 받아들일 때에도 내가 우선적으로 쓸 수 있는 답장은 ‘글’밖에 없다. 그래서 항상 생각한다. ‘나는 활자에서 떨어져 나온 사람이기에 활자를 쓰는 게 세상에서 내가 가진 몫이라면 몫이 아닐까’하고.

 

 

대학 2~3학년을 지나면서 날 사로잡은 일의 하나는 표현에의 충동이었다. 나를 제대로 표현하고 싶다는 것, 나의 꿈과 욕망과 좌절과 인간 사회에 대한 못 다함을 언어로, 기억할 만한 시와 아무도 쓰지 못한 문장으로 표현하여 어떤 세계를 구축하고 싶다는 것 ... (중략)... 마치 피곤에 지치면 나무 그늘이나 호숫가 벤치로 찾아들 듯이, 하나둘씩 내 책을 찾아들고 어떤 구절에서 위로와 공감을 얻게 되기를, 그리고 이 세계가 어떤 다른 것이 아닌 바로 예술이기를 나는 오랫동안 꿈꾸었다. (342)

 

 

문광훈 교수가 『미학 수업』에서 밝히는 학자로서 –연구하고 글을 쓰고 가르치는 자로서의 꿈은 내가 글쓰는 사람으로서 꾸는 꿈과 비슷하다. 물론 나는 유명한 예술 비평가도, 미학 교수도 아니다. 그저 삶을 사유하고 예술들을 사랑하며 글과 함께 살아가고 싶은 사람이다. 미학자의 삶을 진지하게 고민하다가도 답답한 현실 앞에 취업 시장을 기웃거리며 일상을 살아가는 평범하고 자그마한 글쟁이일 뿐이다. 아직도 사실은 잘 모르겠다. 인문학이 주는 사유의 힘은 삶의 가치를 한껏 고양시키지만, 높이 오르면 오를수록 주어진 현실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그리고 그 간극을 직접 체감할 때 한껏 고양된 가치는 툭 – 추락하고 만다. 인문학의 가장 큰 모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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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네, <폴리-베르제르의 바>, 1882

 


어떤 모순은 어떤 지점에서 ‘어찌할 바 없는 것’으로 그저 껴안을 수도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 무엇도 신화화하지 않는 것, 그래서 사실 그대로 직시하고 이해하며 표현하는 것이야말로 삶을 사랑하는 첫걸음이다. 이것이 미의 변증법이다. (26)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순을 껴안으며 나아가는 것 또한 인문학의 몫임을 안다. 그 추락한 가치를 다시 끌어올리는 것도 인문학의 역할이자 기능이다. 질기고 질긴 이 모순을 잘라내지 못하는 건 그 이유이다. 학자로서의 삶은, 인문학을 사유하는 일만으로 현실을 버티는 삶은 아직도 잘 상상이 가지 않는다. 그래서 여전히 망설이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알량한 글쟁이는 글을 계속 써나갈 것이다. 예술을 사유하고 나를 반추하고 끊임없이 자신의 세계를 확장할 것이다.

 

 

나의 학문적 꿈은, 줄이자면, 어떻게 인간이 자유로운 가운데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가란 문제를 예술을 통해, 예술의 경험 속에서 추적하고 탐색하고 기록하는 것이다. 이것은 반쯤은 학문의 인식활동이고 반쯤은 예술의 표현활동이면서 무엇보다도 매일 매순간 내 삶을 사는, 살면서 이 생활을 반추하는 즐거운 일이기 때문이다. (341)

 

 

이 책은 말 그대로 ‘미학 수업’이다. 단순히 예술 작품에 대한 해석과 설명을 넘어 예술과 아름다움의 존재 가치와 그것을 추구하는 사람의 역할에 대해 묻는다. 책이 아닌 인생 수업을 받은 기분이다. 내 인생의 미학에 대해 고민하게 만드는, 예술을 쫓고 기록하는 미학자의 깊은 사유록(思惟錄)이다.

 

 
[한나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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