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거대한 세상 속 작은 벌새 [영화]

가장 보편적이기에 가장 찬란한 은희로부터
글 입력 2019.11.20 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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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방을 청소하다가 학창시절 혼자 몰래 쓰던 일기장을 발견했다.일기장은 수없이 많은 질문들로 가득했다. 그때의 내 세상은 물음표로 가득 차 있었다. 나로서는 대답할 수 없었던 수많은 질문들 사이에서 외로웠다.

 

<벌새>의 은희에게서 그 모습을 발견했다. 은희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수많은 은희들은 고백했다. 나는 이 세계가 궁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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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에 입원했을 때 은희는 집보다 병원이 더 편하다고 고백한다. 은희의 집은 일상이란 이름 아래 수없이 가해지는 폭력의 공간이며, 그를 감내하며 무기력을 학습하는 공간이다. 학교는 선생님이 외치게 하는 “나는 노래방 말고 서울대 간다”라는 문장으로 모든 설명이 가능하다. 개인의 특성을 지우고 오로지 성적만을 요구한다.

 

은희는 자신의 감정을 감추려는 듯 집과 학교에서 무표정으로 일관한다. 집도 학교도 은희에게 편히 쉴 수 있는 공간이 아니다. <벌새>의 영어 제목 처럼, 은희는 ‘집’이 필요했다. 자신에게 마음 한 켠 내어줄 수 있는 존재. 그런 게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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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희는 관계 속에서 안정감을 얻으려 한다. 친구 지숙이, 남자친구 지완, 후배 유리. 주는 만큼 받을 수 있는 게 마음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모든 관계가 그렇듯 은희의 인간관계도 조금씩 엇나간다.

 

모든 걸 나눈다고 생각했던 친구와 엇갈리기도 하고, 친구가 던진 한 마디에 마음이 내려앉기도 한다. 남자친구인 지완은 아무 이유 없이 사라져 은희에게 상처를 남긴다. 갑자기 다가온 후배 유리로 인해 괜스레 두근거림을 느끼지만 유리도 이내 떠나가고 만다.

 

은희가 붙잡으려고 애쓰는 것들은 어떤 특별한 이유도 없이 쉽게 사라졌다. 누구나 그렇듯, 은희도 상실을 통해 영원한 것은 없음을 배운다.

 

 

여러분이 아는 사람들 중에

속마음을 아는 사람은

몇 명이나 될까요?

 


한문 학원 선생님 영지의 질문에 은희가 아득해진 건 은희의 세계를 구성하는 누구의 마음도 알 수 없다고 생각해서이지 않을까. 다행히도 은희는 영지와의 만남을 통해 이 세계의 가닥을 조금은 잡을 수 있게 된다.

 

은희가 애를 쓰지 않고, 불안해하지 않고, 갈구하지 않아도 은희에게 마음에 한자리를 내어준다. 은희를 완전한 한 존재로서 대해주었기 때문에 은희는 고요한 얼굴 뒤 요동치는 감정을 꺼내보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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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지를 연기한 김새벽 배우는 영지에 대해 "삶에 서툰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그럼에도 믿음에 대한 끈을 놓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인간이라고 여겨졌다"라고 이야기한다.

 

은희에게 든든한 삶의 멘토였던 영지도 사실은 수없이 많이 흔들리는 한 청년이다. 사회의 아픔을 외면하지 못해 노동운동에 발을 담그고, 자신이 싫어질 때마다 자신의 손가락을 내려다보는 그런 사람.

 

 

은희야, 힘들고 우울할 땐, 손가락을 봐. 그리고 한 손가락, 한 손가락 움직여. 그럼 참 신비롭게 느껴진다. 아무것도 못 할 것 같아도 손가락은 움직일 수 있어.

 

 

긴 호흡으로 은희의 일상을 그리던 초반부와 달리 영화의 후반으로 가면 작은 균열을 만들어 내던 것들이 순식간에 무너진다. 오래 곪아온 것은 터지기 마련이다. 등굣길에 매일 보던 철거 반대 현수막들이 다 찢겨 있었던 날, 성수대교가 무너진다.

 

<벌새>의 역사성은 여기서 가장 가시화된다. 일상이 되어버린 크고 작은 폭력 속 무너져가는 은희의 마음과, 기형적 발전이 만들어 낸 사회의 균열의 집약체인 붕괴된 성수대교. 한 개인의 일상은 절대 개인적일 수만은 없다.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이다.

 

<벌새>는 중학교 2학년 은희의 일상을 통해 1994년의 아픔을 관통하여 2019년에 다다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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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제 삶도

언젠가 빛이 날까요?

 

 

영지는 마지막 편지에서 "그때 만나면, 모두 다 이야기해줄게"라는 말을 남긴다. 하지만 '그때'는 오지 않았고, 은희는 영원히 영지가 하려 했던 말을 알 수 없게 되었다. 무너진 성수대교에서 은희는 영지를 잃게 된다.

 

거대한 세상 속 개인은 너무나도 무력하다. 우리 모두는 한 마리 작은 벌새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수없이 불어오는 잔 바람에 날아가지 않기 위해, 파도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1초에 몇십 번씩 날갯짓을 해야 하는 벌새. 아무리 날갯짓을 해도 세상을 다 알 수는 없겠지만, 작은 벌새의 날갯짓은 그 자체로 찬란하게 빛날 것이다.





[이지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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