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찰나의 시간을 스크린에서 점유할 동안 – 제17회 아시아나국제단편영화제

플롯의 연속을 체험하다 왔습니다
글 입력 2019.11.14 1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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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세계에 도달하기 전에


 

토요일(2일) 오전에 집을 나섰다. 열시 반에 상영하는 ‘국제경쟁5’를 관람하고자 최대한 일찍 일어나려고 했으나 주말마다 발현되는 게으름의 공기를 거스르기가 매우 힘들었다. 부랴부랴 아홉 시 사십 분 즈음에 집에서 나와 광화문으로 향했으나 지하철 배차 시간을 고려하지 않은 탓에 꽤나 아슬아슬하게 극장에 도착할 것 같았다. 같이 보러 오기로 한 친구도 급작스러운 일정으로 인해 도착하지 못할 것 같다는 연락을 보내 왔다. 그래서 내친 김에 넉넉하게 한 시에 상영하는 ‘국내경쟁1’을 보기로 마음을 고쳐먹었다. 나머지 한 장은 지인 한 명에게 선물하기로 했다.

 

경복궁역에 도착했을 때에는 열시 이십 오 분이었다. 곧바로 직진하고 꺾어서 광화문역으로 걸어갔고 근처 카페에 들어가서 나쓰메 소세키의 『마음』을 읽었다. 책을 읽고 핸드폰으로 이것저것 무언가를 하다 보니 어느덧 시계가 열두시 반을 가리키고 있었다. 조금 일찍 도착해서 극장을 구경하기 위해 카페로 나와 씨네큐브 쪽으로 걸어갔다. 길거리에는 이제 막 시위를 시작하고자 준비하는 사람들과 일부 관광객, 이외 주말을 맞이해 일찍이 광화문으로 나들이를 온 사람들이 있었다. 주말의 광화문 거리를 혼자 거닐다보니 기분이 묘했다. 자아의 무심함을 면밀하게 고찰한 소세키의 작품을 읽은 직후여서 더욱 그랬던가. 사람들을 지나치는 중에도 나의 시선은 온전히 나를 향해 쏠려 있었다.

 

쓸데없는 공상을 읊어 내리다 보니 어느덧 영화관에 도착했다. 처음에는 영화관이 어디인지 몰라서 길을 헤맸다. 씨네큐브가 단독 건물로 위치하고 있을 것이라 착각했던 거다. 온라인 홈페이지를 통해 상세한 위치를 파악한 후에 겨우겨우 어떤 건물의 지하 2층으로 내려갔다. 생각만큼 큰 공간은 아니었음에도 사람들이 많이 대기하고 있었고 영화제 부스도 알차게 운영되고 있었다. 자원봉사자로 활동하시는 분들을 보면서 어쩌면 내가 이번 영화제에서 자원봉사자 명찰을 달고 저분들과 함께 일을 할 수도 있었을 텐데, 라며 되뇌었다. 부스 앞으로 가서 초대권을 영화 티켓으로 교환받고 15분가량 여유시간이 남아 영화제 현장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누군가와 같이 왔으면 포토존에서 사진을 찍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니 조금 아쉬웠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혼자 와서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 날의 나에겐 회복의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나는 생각보다 사람에 익숙하지 않은 관계로 사람을 마주할 때 사용할 수 있는 에너지의 양이 보편적인 타인들에 비해 굉장히 적다. 그래서 주말이 다가올 즈음이면 에너지 할당량의 90%는 사용한 후이기 때문에(...) 그냥 포토존에서 사진을 열심히 찍으시는 분들을 앉아서 구경했다. 영화제 부스에서 받은 갖가지 굿즈들을 가방에 집어넣고 홍보 책자를 꺼내서 읽었다. 상영작이 많아서인지 책자의 두께가 상당해서 양이 적은 소설책을 읽는다는 느낌을 받았다.

 

내가 한 시에 관람할 ‘국내경쟁1’에 해당하는 홍보 코너를 펼쳐서 읽었다. 그러다가 시간이 다 되어 영화관으로 입장했다. 바깥에 비해 상영 공간이 굉장히 넓어서 놀랐다. 대기 장소가 비교적 작았던 이유가 영화 상영 공간에 많은 지분을 할당해서였나. 앉아서 대략 한 시간 반 동안 다섯 작품을 관람했다. 그 중에서 유독 기억에 남았던 두 가지 작품을 소개하려고 한다. 재밌게도 첫 번째와 두 번째 작품이 나에게 가장 인상 깊은 작품으로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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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 교보문고의 풍경

 

 

 

2. 세계로의 입장: 서보형, <탈날 탈(頉), Breakdown>


 

자리에 앉자마자 광고 없이 상영이 시작됐다. 첫 번째로 상영된 작품은 서보령 감독의 <탈날 탈(頉)>이었다. 집집마다 화장실 불이 켜지는 모습을 몽타주 기법으로 포착하여 감독의 주제의식을 반영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잠결에 주인공은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듣고 잠에서 깬다. 그는 문밖으로 나가지만 문을 두드린 사람이 누구인지, 그 누군가가 무엇 때문에 새벽부터 자신의 집에 왔는지는 파악하지 못한다. 그리고 다시 집으로 들어가려고 비밀번호를 누르지만 문은 열리지 않는다. 계속해서 비밀번호를 누르고 눌러도 집 문은 열리지 않는다.

 

하지만 집 안 화장실에는 불이 켜진다. 이윽고 누군가가 문을 열고 나온다. 아내가 아닌 낯선 사람이 그를 바라보며 불쾌한 표정을 짓는다. 그는 당황한다. 그리고 끊임없이 계단을 오르내리며 자신의 집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집집마다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고 문을 두드린다. 그럴 때마다 문은 당연히 열리지 않고 화장실 불만 켜질 뿐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다. 이윽고 날이 밝아오기 시작하고 멍하게 서 있던 그는 가까스로 어떤 집 문 앞에서 아내가 문을 열고 나옴으로써 자신의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된다. 아내는 그에게 대체 새벽부터 무엇을 하고 오는 것이냐고 타박하고 남자는 산책을 다녀왔다고 변명한다. 그러고 다시 잠자리에 눕는다.

 

사실 이 작품의 플롯이 무엇을 암시하고자 했는지 정확히 파악할 순 없었다. 그러나 이런 의문은 들었다. 그가 들어간 집은 과연 그의 집이었을까? 그가 존재했던, 앞으로도 존재할 것인 공간이 맞을까. 침대에 다시 눕고 잠에 들고자 할 때 아내는 TV에서 여행 상품을 할인 판매하고 있어 이를 구매했다고 이야기하며 저렴하게 휴가를 갈 수 있게 되어 기쁘다고 말한다. 남자도 기쁘다고 답한다. 그는 집을 나오기 직전에 아내가 말한 여행 상품을 TV로 잠깐 보다가 현관문을 열고 나갔다. 그와 아내가 시청했던 여행 상품 광고는 그들에게 집밖을 나가 일시적인 휴가를 보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 준다.

 

하지만 이 가능성은 그들이 돌아갈 집, 여행 상품의 배경이 되는 타국이 아니라 이곳 한국 어딘가에 자신들이 돌아갈 집이 있다는 전제 하에 성립된다. 하지만 남자에게는 진정으로 돌아갈 공간이 있었을까? 그가 제 발로 다시 돌아간 집은 자신의 존속을 지금껏 감당해 온 그 집이 맞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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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 교보문고의 풍경

 

 

 

3. 세계의 전환: 김지희, <주근깨, Freckless> 


 

다음으로 김지희 감독의 <주근깨>라는 작품이 상영됐다. 앞선 영화에서 느꼈던 의문을 그대로 안은 상태로 다음 작품 시청에 동원되었다. 영신과 주희는 다이어트 캠프에서 만나 친해진 사이다. 주희는 다이어트 캠프에서 엄청난 체중 감량에 성공했다. 영신은 그저 부모님에 의해 억지로 다이어트 캠프에 끌려 왔기에 다이어트에는 큰 관심이 없다. 그녀의 관심은 오로지 룸메이트 주희와의 관계에만 집중되어 있다. 주희는 어떤 사람일까. 주희는 미용에 관심이 많다. 그녀가 독하게 체중 감량에 성공했던 이유도 자신의 강력한 의지가 발현 되어서일 것이다. 그녀는 앞으로 2-3kg 정도만 더 감량하면 다이어트 캠프에서 설정한 목표 체중에 도달하게 되어 캠프 참가비용 전액을 돌려받을 수 있게 된다. 자신이 원하는 만큼의 체중 감량도 이루어 내고 캠프에서 좋은 친구도 만남으로써 그녀는 행복해 보였다.

 

하지만 초중반부까지 영화를 관람하면서 내가 포착했던 주희의 모습은 즐거움이 아니라 불안정에 가까웠다. 캠프의 담당 코치 중 한 명은 그녀에게 관심을 표현한다. 그녀도 거부하지 않는다. 영신은 이런 주희를 지켜보며 원장의 귀에 안 좋은 소리가 들어갈 것이 아닐지 걱정한다. 하지만 주희는 아랑곳하지 않고 평소의 그녀가 보여주었던 것처럼 명량하고 활발한 모습으로 영신을 대한다. 영신의 표정에는 걱정 말고도 또 다른 어떤 감정이 숨겨져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그게 무엇일지 영화를 보는 내내 궁금했다. 불안함, 질투, 시기. 여러 감정들의 형태를 떠올렸지만 그 무엇에도 해당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어느 날 캠프에서 등산 운동을 가면서 주희는 자신에게 관심을 보였던 코치와 등산 중에 샛길로 빠진다. 영신은 수상한 낌새를 눈치 채고 주희와 코치를 몰래 미행한다. 둘의 은밀한 행위를 지켜보던 중간에 영신은 좌절감과 절망 가득한 표정으로 그 길을 다시 빠져나온다. 무엇 때문인지 그녀는 주희에게 매우 화가 나 보인 듯 했다. 영신도 그 코치에게 관심을 보였기 때문이었을까. 혹은 그 코치에게 주희라는 자신의 친구를 빼앗겼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을까. 어느 한 쪽으로도 결론을 재단하기 어려웠다. 그 날 밤 주희는 영신의 태도가 갑자기 변하자 당황하지만 이유를 묻진 않는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캠프 안은 어떤 사건으로 인해 뒤집어진다. 그 코치가 쫓겨난 것이다. 영신은 캠프 밖으로 향하는 코치를 붙잡고 무슨 일 때문에 나가는 것이냐고 추궁한다. 코치는 주희를 욕하며 그깟 고등학생 하나랑 성관계를 맺었다고 자신이 왜 이처럼 모욕적인 처분을 받아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이딴 허접한 곳 따위 처음부터 들어오지 말았어야 한다고 폭언한다. 영신은 그에게 시원한 한 방을 날리며(!) 주희를 찾으러 캠프 안을 샅샅이 뒤진다. 불행 중 다행이게도 아직 그 코치와 성관계를 맺은 참가자가 누구인지는 밝혀지지 않은 상태였다. 간신히 화장실에서 주희를 발견하고 영신은 울음을 그치지 못하는 주희에게 뭣 때문에 그리 슬프냐고 물어본다. 주희는 네가 무엇을 알겠냐며, 너같이 억지로 부모에게 끌려온 주제에 다이어트도 해내지 못하고 부모 돈만 축내는 애가 무엇을 알겠냐고 대꾸한다. 영신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아마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이 시점에서 원장이 누군가와 통화하는 장면으로 넘어간 것 같다. 애가 맹랑한 것을 어쩌겠냐며 학부모에게 사정을 설명하는 원장의 모습이 나오고. 이후에 짐을 싸 들고 캠프 밖으로 걸어 나오는 영신이 등장한다. 영신이 주희 대신 코치와 문란한 관계를 맺었던 ‘그 학생’이 되기를 자처했던 것이다. 모든 전말을 눈치 챈 주희는 영신을 자신의 인스타그램 게시물에 태그하며 일련의 말을 남긴다. 영신은 그것을 보고 아주 기쁜 표정으로, 햇빛이 강력하게 내리쬐는 여름의 어느 날에 캠프 바깥의 시골길을 뛰어 간다. 영화는 그렇게 끝난다.

 

영신은 주희를 “연애의 감정으로” 사랑했을까? 나는 주희를 향한 영신의 마음이 단순히 연애의 감정에 해당하는 사랑으로 단정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영신은 주희를 사랑했다. 그저 우정으로서도 연애의 감정으로서도 아니라 지옥 같은 공간에서 본인의 존재를 위로하기 위한 심정으로 그녀를 사랑했다. 영신은 비자발적으로 캠프에 끌려왔다. 작중에서 그녀가 보였던 가장 밝은 모습은 모든 사건을 자신이 뒤집어쓰고 캠프 바깥으로 빠져나왔을 때다. 그때 비로소 그녀는 자유를 얻은 것처럼 보인다. 캠프 안에서 그녀는 의지를, 자신의 자유를 상실했다. 억압적인 상황 속에서 영신이 간접적으로나마 자유로웠던 순간은 주희와 함께 시간을 보냄으로써, 그녀와 공유하는 시간 자체에 애착을 보였던 때다. 누구에게 애정을 줄지, 누구와 유대를 공유할 지의 문제는 오로지 그녀의 힘으로 결정할 수 있는. 모든 것이 제한되는 캠프 안에서 그녀가 유일하게 자신의 의지를 발휘할 수 있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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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객과의 시간을 함께하는 감독님들

 

 

 

4. 세계를 나오며


 

마지막 작품인 김소현 감독의 <노량대첩>을 관람한 후 잠깐 감독과의 대화 시간을 지켜보다가 영화관을 빠져 나왔다. 영화 상영 시간이 끝난 시점에서 늦어도 한 시간 반 후에는 엄마를 만나러 일산으로 넘어가야 했기에, 그 전에 광화문에서 경복궁으로 이어지는 길을 걸어 경복궁 주변을 조금 산책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중간에 나와야만 했다. 훌륭한 감독님들의 대화 시간에 끝까지 참여할 수 없어 아쉬웠지만 한편으로 영화관 바깥의 차가운 공기를 맞으니 정신이 비로소 번쩍 드는 것만 같았다.

 

스크린 안에서 찰나의 세계들을 마주하다가 한 시간 반 만에 처음으로 내가 원래 살던 세계로 돌아왔다. 홀가분했지만 아쉬웠다. 짧은 시간동안 온갖 상징과 주제의식으로 가득한 다채로운 세계들을 엿보고 와서 내 CPU가 이들을 다 감당하지 못해 일어난 불상사일지도 모르겠다. 시간의 여유가 따라준다면 다른 상영작도 관람하러 오고 싶었다. 부디 나에게서 티켓을 양도받은 친구도 나와 비슷하게 색다른 경험을 하고 왔다면 좋겠다. 어땠는지 연락을 해보아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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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공티 처음 먹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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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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