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목소리 없이 살 수 있을까? [사람]

조용히 지내는 법만 가르치는 어른들에게
글 입력 2019.11.13 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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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시절, 휴학 후 대외활동을 하면서 부산의 한 청년활동가를 인터뷰한 적이 있다. 그는 청년으로서 국가에 마땅히 요구할 것들을 먼저 나서서 제안하는, 아주 적극적인 삶을 살고 있었다. 같은 청년으로서, 그는 마치 전쟁터에서 앞장서는 장군 같았다. 그는 먼저 우렁찬 소리로 진격할 것을 결정하고, 전쟁의 승패에 대해 오롯이 짊어지는 그런 우두머리였다. 그럼 나는 무엇일까? 아마 우두머리를 믿고 칼과 방패를 열심히 챙기는, 오로지 주어진 임무에만 충실한 그런 부하일 것이다. 나는 왜 자신을 고작 졸병이라고만 여겼을까. 이는 단지 그와 나의 목소리 차이였다.

 

 

 

학교생활 잘하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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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말씀 잘 듣고

얌전히 학교생활 해야지!

 

 

초등학교로부터 입학 통지서가 날아왔을 무렵, 나는 웃어른들로부터 이런 말을 줄곧 들어왔다. 선생님의 말을 잘 들어야 한다는 것, 얌전히 학교를 다녀야 한다는 것. 이는 나보다 먼저 학교에 다녀본 선배들의 애정 어린 조언이었다. 선배들의 조언대로 나는 선생님이 하는 말을 진리인 마냥 아주 잘 따랐고 말썽 없이 조용히 학교에 다녔다. 간혹 반 친구들과 갈등을 빚었을 때는 학교에서 소란을 피운 것 같은 마음에 자책을 일삼았다.

 

그래서 선생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건, 내게 일종의 반항이었다. 염색하지 말라고 하는 것, 머리 길이를 짧게 유지해야 하는 것, 화장하면 안 되는 것, 중앙계단을 오르지 말라는 것 등 선생님들이 요구하는 규율은 넘쳐났다. 이런 규율은 중학교, 고등학교에 진급할 때마다 더 다양해지고 엄격해졌고 나는 이에 대해 늘 순종하며 바른 학생이라는 타이틀을 유지했다.

 

그리고 ‘왜 염색을 하고 머리를 기르면 안 돼?’, ‘왜 중앙계단을 오르면 안 돼?’라고 질의하며 규율을 어기는 친구들을 학교의 말썽꾸러기로 분류했다. 실로 선생님들은 규율을 어긴 학생들을 학교 운동장에 모은 채 체벌을 내리곤 했다. ‘벌을 준다’는 행위는 규율 위반이 얼마나 심각하게 잘못한 행동인지를 각인시키는, 아주 극적인 행동이었다.

 

그때는 그 친구들이 제기하는 의문들이 그저 선생님 말씀을 듣고 싶지 않은, ‘청개구리 심보’인 것으로 생각했다. 선생님의 말씀은, 학교의 규정은 곧 내 세상의 전부였다. 그래서 학교의 규정에 반하는 친구들을 볼 때면, ‘나는 절대 그러지 말아야지’라고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곤 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은 아주 시간이 흘러 대학교 졸업을 앞둔 시점에서야 바뀌게 되었다.

 

 

 

조금은 소란스러워도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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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년간 바른 학생으로 살며 굳어진 순종적인 태도는, 이후 이어진 대학 생활과 사회생활을 더욱 윤택하고 평화롭게 했다. 선생님이 그랬던 것처럼 교수들은, 상사들은 자신의 말을 잘 듣는 사람을 원했다. 이에 바른 학생이었던 나는 그들에게 아주 최적화된 제자였고 부하 직원이었다.

 

이렇듯 평화로운 일상의 틀은 ‘왜요?’라는 한 마디에 와르르 무너졌다. 처음 던진 ‘왜요?’라는 질문은 학보사 기자 시절 무작정 기사를 유보하라는 교직원의 엄포에 대한 반박의 차원이었다. 이는 결코 어른에 대한 아이의 반항이 아니었다. 그저 왜 나의 행동이 금기되는 것인지 되물었던 것뿐이다. 나는 아직도 그 당시의 쾌감을 잊지 못한다. 나의 질문은, 기사의 편집권은 편집국에 있다는 일종의 소신을 갖게 해주었고 교직원의 잘못된 행동을 바로잡는 개선의 계기가 됐다.

 

그리고 무엇보다 과거 ‘왜?’라는 질문을 던져야 했던 순간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새삼스레 깨달았다. ‘왜 머리를 마음대로 가꿀 수 없나요?’, ‘왜 중앙계단을 오르면 안 되나요?’ 등. 그 어떤 선생님도 학교의 규율을 지켜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먼저 말해주지 않았다. 그저 당연히 지켜야 하는 것이었다. 친구들이 학교 규율을 위반한 것은 단순한 반항이 아닌, ‘당연함’의 당위성에 대한 의문이었을지도 모른다. 돌이켜보면 친구들의 그런 의문과 질문들은 선생님이 다그쳐야 할 말대꾸가 아닌, 그저 하나의 목소리였을 뿐이다.

 

이처럼 평범한 목소리조차도 사회는 용납하지 못할 때가 많다. 용납할 수 없는 이유가 따로 있는 건 아니다. 그저 목소리 하나하나가 모이면 시끄럽고 요란해지기 때문이다. 개개인의 목소리보다는 조직의 평화를 중요시하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나 또한 시끄러움은 곧 유난이라고 생각하며 언성보다는 침묵을, 반대보다는 동조를 택할 때가 많았다. 작은 목소리가 모여 변화를 일구어냄을 알면서도, 열심히 언쟁하고 요구하는 사람들을 지켜보기만 했다. 그리고 응답 없는 제안과 변화 없는 세상에 지친 이들이 결국 포기할 때면 혼자 조용히 안타까워하기만 했다. 정말 부끄럽게도 말이다. 이러한 부끄러운 행동은 사실 내가 살기 위한 아주 비겁한 행동이었다. 깊이 반성한다.

 

비겁한 행동이라 일컬으며 나 자신에게 반성의 시간을 주는 것은, 내가 잘 살기위해 침묵을 택했지만 누군가는 모두가 잘 살기위해 목소리를 냈다는 점을 깨달았기 때문이리라. 침묵을 지키고 반대 없는 사회는 겉보기에만 평화로운 세상임을 우리 모두 알고 있다. 하지만 이를 자각했을 때는 우리는 이미 목소리를 잃은 인어공주가 되어 있다. 뒤늦은 반성과 후회, 자책을 미래의 후손들은 겪지 않을 수 있을까? 침묵이 이어지는 곳에서 말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는 아이들은 없을 것이다.

 

이처럼 당연한 침묵이 학습되지 않기 위해 누군가의 목소리는 정말 귀한 존재이다. 개인의 목소리는 곧 모두의 목소리가 될 수 있다. 이를 유념하면서, 나 자신에게 되물어본다. 결국 목소리를 잃은 인어공주로 답답하게만 살 것이냐고 말이다. 아마 나는 여전히 이것저것 재고 눈치 보며, 그 질문에 망설이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점은, 나는 그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은 ‘말하는 방법’을 배우고 있다는 것이다.

 

 



[황채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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