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전쟁에는 싱클레어와 여자도 있습니다 [도서]

전쟁, 그리고 인간
글 입력 2019.11.04 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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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강산도 변한다고 비유되는 10년이란 세월의 무게는 다들 말하지 않아도 알 것입니다. 그보다 고작 1년 모자란 9년도 만만치 않죠. 저는 그 9년의 무게를 최근 <데미안>을 다시 읽으면서 실감했습니다.

 

예술에 막 눈을 뜨던 시절, 세상이 마냥 아름답던 시절, 지적 허세에 찌들었던 그 시절, 저는 <데미안>을 읽었고 감동했습니다. 그게 바로 9년 전의 일입니다. 그 이후 저는 오랜 시간 <데미안>을 제 인생의 책이라고 말하고 다녔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왜냐는 사람들의 물음에 답하기 어려워졌습니다.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모두 까먹었거든요. 전반적인 줄거리와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을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트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다.

 

 

그 유명한 아브락사스가 나오는 구절 말고는 기억에서 사라져버렸습니다. 싱클레어가 왜 데미안에게 의지했는지, 1차 세계대전 이후 젊은이들이 왜 이 책에 감명받았는지, 나는 왜 이 책이 좋았는지 등등 말이에요.

 

그래서 다시 읽었습니다. 망각 때문에 놓아버린 감동을 다시 붙잡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다시 읽었고 저는 또 감동했습니다. 책장을 넘기면 넘길수록 그전에는 보지 못했던 부분들이 보였고 그럴수록 제 몸에는 전율이 일었습니다. 이제 저는 다시 당당하게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나는 <데미안>을 사랑한다고, 싱클레어에게 공감한다고. 그래서 다 읽고 나면 아트인사이트에 책에 대한 서평을 남겨야지 다짐했습니다.

 

빨리 서평을 쓰고 싶어서 서둘러 마지막 책장을 덮었습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한 달 반이 지나도록 그러지 못했습니다. 게을러서? 바빠서? 네, 그것도 맞겠죠. 그런데 그보다 확실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다음에 읽은 책이 바로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였거든요. 그 책이 제가 서평을 쓰지 못하도록 가로막았습니다. 두 책은 완전히 별개의 책입니다. 그러나 첫 번째 챕터를 다 읽기도 전에 저는 다짐을 새로 고쳤습니다. 이 책까지 읽고 서평을 쓰자고요.

 

<데미안> 이후에 그 책을 읽은 건 결코 의도한 바가 아니었습니다. 그저 오래전부터 읽고 싶었으나 여태 미뤄왔던 책을 드디어 펼친 것뿐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책 안에는 무수히 많은 싱클레어가 있었습니다. 그녀들은 모두 살아있는 목소리로 생생하게 싱클레어와 같은 고통을 증언하고 있었습니다.

 

<데미안> 속 싱클레어는 남자고 독일인이며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였습니다.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속 그녀들은 여자고 러시아인 혹은 벨라루스인이고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였습니다. 그들 사이에 전쟁에 참전했다는 것 말고는 공통점이 없습니다. 그 차이점도 굉장히 강하게 대립하고 있죠. 여성과 남성, 러시아군과 독일군이라니요. 그런데도 저는 두 권의 책을 분리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두 작품 모두 전쟁에 대해 다루고 있고, 전체주의에 매몰된 한 개인을 호명하고 있으니까요.

 

먼저 <데미안>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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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기 전, 제 머릿속에 어렴풋하게 남은 책의 인상은 대략 ‘따뜻한 선의 세계에서 자란 에밀 싱클레어가 오묘한 소년 막스 데미안을 만나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뜨고 성장한다.’ 이 정도였습니다. 다시 읽은 <데미안>은 저의 흐릿한 인상처럼 단순한 작품이 아니었습니다.

 

선은 따뜻하지만, 악은 달콤합니다. 싱클레어는 그 사이에서 끊임없이 방황하고, 자신이 어느 세계에 어울리는 존재인지 알기 위해 사투합니다. 방황의 시작은 프란츠 크로머였습니다. 싱클레어는 거짓으로 크로머 일당에게 자신이 저지르지도 않은 악행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크로머는 그를 빌미 삼아 싱클레어를 협박합니다. 싱클레어를 둘러싼 따뜻한 세계가 처음으로 균열을 보이는 시점입니다.

 

그는 왜 그랬을까요? 왜 자신이 하지도 않은 악행에 협박받고 고통스러워할까요? 크로머에게 사실은 다 거짓말이었다고, 그런 도둑질은 저지른 적도 없다고 하면 되지 않았을까요? 하지만 그렇게 지나간 일을 수습하는 건 싱클레어에겐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이미 거짓말이라는 악행을 저질렀고, 예전 세계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죠.

 

크로머로 인해 지옥 같은 나날을 보내게 된 싱클레어는 자신이 벗어나 버린 가족으로 대표되는 따뜻함의 세계를 사무치게 그리워합니다. 그러나 그 역시 본능적으로 알았습니다. 따뜻함이 곧 자신의 행복을 보장해주지 않는다는 것을요. 그래서 거짓말로 악행을 시도해보았지만, 그 결과 역시 처참했습니다. 싱클레어는 결국 완전히 선할 수도, 완전히 악할 수도 없는 존재였습니다.

 

그런 싱클레어에게 데미안이 나타납니다. 데미안은 싱클레어를 크로머의 압박에서 구해내는 한편, 진리와도 같은 성경의 내용을 부정하기도 하는, 선과 악이 혼재된 기묘한 존재입니다. 싱클레어는 그런 데미안에게 강렬히 끌립니다.

 

처음 읽었을 땐 그저 선의 세계엔 지루함을, 악의 세계엔 공포를 느끼던 싱클레어에게 데미안이라는 새로운 존재가 매력적이어서 끌렸다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그 이유도 있었겠지만, 데미안이 싱클레어에게서 카인의 표적을 보았다고 말한 것도 한몫했으리라 믿습니다.

 

오랜만에 다시 만난 싱클레어는 단순히 방황하는 성장소설의 주인공이 아니었습니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불안하고 외로운 존재였습니다. 그 불안과 고독의 근원에는 자신에 대한 무지가 있었습니다. 그의 삶은 나에게로 이르는 길을 찾기 위한 여정 그 자체입니다.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해 알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싱클레어를 제대로 알아주지 않았습니다. 부유한 집안의 도련님, 말 잘 듣는 아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세상은 항상 싱클레어를 객체로만 바라보았죠. 그런 싱클레어에게 너에게는 특별한 표적이 있다며 자신에게만 선과 악, 그 사이의 세계를 알려주는 데미안이 얼마나 고마웠을까요.

 

데미안은 제가 기억하던 모습 그대로였습니다. 그런데 의외로 데미안이 나오는 부분이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제목도 <데미안>이고, 시종일관 강렬한 존재감을 뿜어내어서 저도 모르게 데미안이 많은 분량을 차지했다고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저는 매력적인 데미안에게 관심을 기울였고, 싱클레어는 그에 관해 서술하는 화자 정도로 인식했었습니다.

 

하지만 <데미안>은 명백히 싱클레어의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그는 분명히 이 이야기의 주인공입니다. 그렇다면 제목이 왜 <데미안>일까요? 그건 이 책이 철저히 싱클레어의 불안한 내면을 담아내는 데에 집중하기 때문입니다. 나에게로 완전히 이르지 못했던 그의 내면엔 자신을 맨 처음 알아주었던 데미안이 가장 강력하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책에는 데미안에 대한 싱클레어의 그리움이 가득합니다.

 

선과 악 그 어디에도 자신의 자리를 찾지 못한, 나에게로 이르기 위해 투쟁하고 방황하는, 자신을 알아주는 존재에 감동하는 싱클레어의 이야기로 책에 대한 감상을 끝맺으려 했습니다. 그런데 그 끝에 제가 완전히 잊어버렸던 전쟁이 있었습니다.

 

 

처음에 나는, 총격의 선정성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에 실망했다. 예전에 나는 한 인간이 하나의 이상을 위하여 살 수 있는 일이 왜 그렇게 극단적으로 드문지에 대해 많이 생각해 보았었다. 지금 나는 많은 사람들, 아니 모든 사람들이, 이상을 위해 죽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았다. 다만 그것은 개인적 이상, 자유로운 이상, 선택한 이상이 아니었다. 그것은 떠맡겨진 공동의 이상이었다.

 

 

전장에는 싱클레어처럼 나에게로 이르지 못한 젊은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에게서 그들 자신을 빼앗아간 건 국가였습니다. 국가는 사람들을 한 개인이 아닌, 수많은 군인 중의 한 명으로 전락시켰습니다. 싱클레어는 그런 젊은이 중 한 명이었던 것이죠.

 

인간은 선과 악으로 나뉘지 않습니다. 선하면서도 악하고 악하면서도 선하죠. 하지만 전쟁은 그런 인간의 고유한 특성을 모조리 말살시킨 채 선과 악이 이분법적으로 구분되는 세계에 사람을 몰아넣습니다. 그러한 최면은 일정 기간 효과를 발휘합니다. 그로 인해 군인들은 조국을 위한다는 미명 하에 상대방에게 총구를 겨눌 힘을 얻게 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전쟁이 끝나면 집단 최면은 기능을 상실합니다. 전쟁으로써 존재 가치를 입증했던 군인들은 이제 일반인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럴 수 없습니다. 인간이기를 포기했던 그때의 기억이 너무나 강력하게 뿌리내려버렸기 때문입니다.

 

<데미안>이 왜 1차 세계대전 이후 젊은이들에게 큰 호응을 받았는지 이제야 알 것 같습니다. 헤르만 헤세는 전쟁의 상흔으로 괴로워하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했던 것입니다. 너 자신의 존재를 알아야 한다고, 너는 수많은 군인 중 하나가 아니라 고유한 개인이라고, 너는 선과 악으로 구분될 수 없는 특별한 존재라고, 그런 너에게서 인간성을 앗아간 건 국가였다고.

 

데미안은 이 땅의 수많은 싱클레어를 위로해주기 위해 탄생한 존재였습니다. 책의 말미에 그가 싱클레어에게 선사한 입맞춤이 감동적인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일 것입니다.

 

 

“(생략)…언젠가 잘 지내지 못하면 날더러 네게 당신의 키스를 해달라고. 나에게 함께 해준 키스를……. 눈을 감아, 싱클레어.”

 

나는 선선히 눈을 감았다. 내 입술 위에 가벼운 입맞춤이 느껴졌다. 입술에서는 계속해서 조금씩, 그러나 결코 줄어들지 않고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잠이 들었다.

 

 

감동적인 전쟁터에서의 입맞춤은 몇십 년 뒤 제2차 세계대전에서도 나타납니다.

 

 

그런데 내가 누구랑 비슷해 보였나 봐. 그 사람이 나를 부르는 거야. ‘라리사…… 라리사…… 라리사……’ 사랑하는 여자 같았어. 내 이름도 라리사였지만 그 부상병은 내가 모르는 사람이 분명했지. (중략) 지금도 그때 일을 떠올리면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할 수가 없어. 눈물이 쏟아져서. 그 사람이 그랬어. ‘당신과 작별 키스도 못 하고 전선으로 떠났잖아. 지금 키스해줘……’

 

그 사람 위로 몸을 굽히고 입을 맞췄어. 그 사람 눈에서 눈물이 솟구쳤지. 눈물이 붕대를 타고 흘러내렸어. 그리고 그것으로 끝. 그 사람은 숨을 거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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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는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가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여성들을 찾아다니며 인터뷰한 기록을 담았습니다. <데미안>이 가상의 인물 한 명을 통해 전쟁 속 개인을 호명했다면, 이 책은 수많은 실제 인물의 생생한 증언을 고스란히 전달함으로써 그들을 호명합니다.

 

이미 전쟁과 관련된 예술 작품들은 차고 넘칩니다. 그러나 그 이야기들은 모두 남성의 시각으로 전쟁을 표현하였습니다. 그런 이야기 속 여성은 피해자, 그뿐입니다. 세상이 싱클레어에게 그랬던 것처럼 그런 작품들 역시 여성을 객체로만 바라보았습니다. (<데미안> 역시 그런 작품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전쟁에는 분명히 여자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일방적인 피해자가 아닌 다른 존재로서 전쟁에 존재했었습니다. 하지만 세상은 그런 여자들의 이야기를 완전히 지워버렸습니다. 국가는 그들의 희생을 짓밟으며 승리의 문턱에 올랐으면서도 전쟁은 남자들만의 전유물이라며 전쟁의 흔적이 묻은 여자를 수치스러워했습니다.

 

평소 책 읽는 속도가 빠른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한 달 가까이 읽을 줄은 몰랐습니다. 최근 읽은 책 중 가장 오래 걸렸습니다. 한 장 한 장 넘기는 게 너무 힘들었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이 책을 끝까지 읽었습니다. 그건 포기하지 않고 이들의 이야기를 모두 들어야 한다는 사명감이었습니다.

 

책에서 묘사되는 전쟁은 너무나 참혹합니다. 차라리 허구라고 믿고 싶지만, 그 아래 적힌 인터뷰이의 이름이 내가 읽은 게 모두 사실이라는 것을 증명합니다. 책을 읽다 보면 나와 그들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기에 나는 이렇게 편한 생활을 영위하고, 그들은 이렇게 비참해야 했는지에 대해 의문이 듭니다.

 

아주 뻔한 답이지만 태어난 시대의 차이겠죠. 지금 제가 사는 세상은 국가의 이익보다 개인의 자유가 더 중요한 세상입니다. 현실적으로는 아닐지 몰라도 제도적으로는 그러합니다. 저는 너무나 다행스럽게도 국가를 위해서 개인이 희생하는 게 당연하지 않은 세상, 그 어떤 것도 살인을 정당화할 수 없는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사는 세상은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들을 그 비참한 전쟁터에 몰아넣은 건 대부분 그들 자신이었습니다. 전쟁이 발발하자 그들은 자진해서 전쟁에 참전합니다. 여자라는 이유로, 어리다는 이유로 제지받지만, 그에 굴하지 않고 조국을 위해서 헌신하고 싶다고 외칩니다. 처음엔 그 인터뷰이가 유별나서 그랬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위와 같은 이야기는 이 책에서 반복되고 또 반복되었습니다.

 

그렇게 스스로 뛰어든 전장은 그야말로 생지옥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그런 지옥에 굳이 뛰어들었을까요? 남자처럼 입영통지서를 받은 것도 아닌데 말이죠. 어리석어서 그런 게 아닙니다. 그 시대엔 조국을 위해서 개인이 희생하는 게 당연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잔인할 만큼 순진했습니다. 상대인 독일군은 철저히 악이고 자신들의 조국은 선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뒤 조국은 그녀들의 희생에 무엇으로 보답했나요?

 

이 책은 <데미안>만큼 선과 악이 혼란스럽게 뒤엉킵니다. 전쟁은 그 자체로 악입니다. 그러나 그 안에 속한 인간은 그렇지 않습니다. 책에는 처음 사람을 죽였을 때의 죄책감, 혹은 쾌감. 또는 상대 독일군을 도와준 경험 등이 자주 등장합니다. 책 속 여자들은 완전히 선하거나 완전히 악하지 못합니다. 전쟁 상황이 끊임없이 악을 유도하는데도 말입니다.

 

전쟁 상황을 합리화하려면 끊임없는 자기암시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조국은 선이고, 독일군은 악이다. 그러나 본능은 그게 정답이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지금 내 총구가 향한 저 독일군은 선도, 악도 아닌 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아무리 조국을 위한다고 해도 사람을 죽이는 행위가 절대 선이 될 수 없다는 것도요.

 

전쟁이 시작되기 전 그녀들의 삶은 싱클레어의 유년 시절처럼 따뜻한 선의 세계였습니다. 전쟁이라는 거대한 악에 휩싸였다가 풀려난 그녀들은 예전의 자신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선의 세계로 돌아가기엔 너무나 끔찍한 지옥도를 겪어버렸고, 악의 세계에 편입하기엔 그녀들은 너무나 나약한 인간입니다.

 

책에는 전쟁에서조차 여성성을 유지하려는 이야기가 많이 보입니다. 처음에는 현재 많은 여자가 사회적 여성성을 타파하려고 노력하는 것을 아는지라 마냥 편하게 넘길 수 없었습니다. 어쩔 수 없는 시대적 한계이겠거니 생각하면서 저 자신을 달래가며 책장을 넘겼습니다. 책을 더 읽자 그건 단순한 시대적 한계에서 비롯한 성 고정관념의 문제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 문제도 작용하는 부분이 있지만, 그 밖에 인간이고자 하는 몸부림도 있었습니다.

 

전쟁인데도 여성성에 집착하는 게 아니라 전쟁이라서 여성성에 집착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가진 특성 중에 그나마 가장 전쟁과 거리가 먼 것이 여성이라는 특성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자신이 여자임을 자기 자신에게 상기시키는 행위는 곧 인간성이라는 끈을 붙잡기 위한 노력이었습니다. 그녀들은 너무나 작은 것에 기뻐했습니다. 사탕에, 간식에, 인형에, 구두에…. 그럴수록 저는 가슴이 미어졌습니다. 저는 그렇게 기뻐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굳이 애써 확인하지 않아도 저는 언제나 여자고 인간이었으니까요.

 

전쟁은 한참 전에 끝났습니다. 여자들이 그토록 열심히 지켜냈던 조국은 결국 승리를 거머쥐었습니다. 그러나 그들 개인의 전쟁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전쟁 당시에는 개인을 조국의 일원으로 삼았던 국가는 전쟁이 끝나자 그 개인을 모두 내팽개쳤습니다. 그래서 그녀들의 마음속 전쟁은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언제나 현재진행형이었습니다.

 

전쟁 당시 그녀들의 나이는 대부분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이었습니다. 아무리 많아도 지금의 제 나이를 넘는 경우는 거의 없었습니다. 세상은 전쟁에 참전했던 그녀들을 인간도 아니라고 말하지만 제 눈에는 어리고 약한 소녀로만 보입니다. 아브락사스에게로 날아간 새가 용맹한 매가 아닌 외로움에 벌벌 떠는 작은 새로 보이는 것처럼 말이죠.

 

처음부터 이 글을 구어체로 써야겠다고 생각한 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전쟁과 인간에 관한 글을 써야겠다고 다짐한 순간,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문장이 모두 구어체였습니다. 애써 문어체로 바꿔보았지만, 어색하기만 했습니다.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가 대부분 구어체로 진행된 영향이 컸을 것입니다.

 

글을 다 쓴 지금, 더 명확한 이유를 깨달았습니다. 전쟁을 겪은 그들이 제게 이야기를 들려준 것처럼 저 역시 그들에게 제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습니다. 전쟁을 모르는 시대에 태어나 당신들의 전쟁 이야기를 듣는 나란 존재를 알리고 싶었습니다. 데미안이 싱클레어에게 그랬던 것처럼,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가 그녀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전쟁 속에 있었던 당신이라는 개인을 호명하고 싶었습니다.

 

 



[진금미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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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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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에움길
    • 두 책을 이렇게 엮어 내시다니 감명 깊게 읽었습니다..! 좋은 오피니언 읽을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 1 0
    • 댓글 닫기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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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진금미
    • 에움길저야말로 정성스레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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