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세상의 모든 피식자에게 바칩니다. [도서]

<채식주의자>_한강
글 입력 2019.10.24 2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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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의 모든 피식자에게 바칩니다.

- <채식주의자>, 한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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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의 소설은 날카롭고 연약하다. 한없이 여리지만, 다분히 폭력적이다. 이게 이 소설을 접한 나에게 처음 떠오른 생각이었다. 작가 한강을 처음 접한 건 소설 《흰》을 통해서였다. 표면을 파고드는 묘사, 날카롭고 살아있는 문장을 통해 생생하게 느껴지는 경이감. 이 정도가 한강 작가의 첫인상이었다.

 

소설 <흰>에서 섬세한 묘사로 감탄을 자아내던 문장은 《채식주의자》에선 날카롭다 못해 폭력적으로 변모했다. 첫 번째 소설 <채식주의자>을 읽다가 나는 몇 번이나 책장을 덮어야 했다. 숨이 막혔다. 섬뜩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폭력이 글을 통해 나를 스쳐 지나갔다. 그 느낌이 너무 강렬하고 아득해서 차마 한 번에 읽을 수 없었다.

   

《채식주의자》는 단편 소설이기도, 장편소설이기도, 연작소설이기도 하다. 처음에는 장편소설이라 이름 붙은 표지를 보지 못하고, 첫 소설 <채식주의자>를 읽었다. 그리고 두 번째 소설 <몽고반점>을 슬쩍 훑어본 뒤엔, 이 책은 단편 소설집이라 생각했다. 두 소설을 관통하는 이미지는 비슷한 듯 달랐기 때문이다.

 

뒤늦게 안 사실이지만, 이 책에 실린 3편의 소설은 각각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고, 연이어 존재할 수도 있다. 그래서 이들은 단편이기도, 장편이기도, 그 둘을 모두 가로지르는 연작이기도 하다. 덕분에 이 《채식주의자》 속에 실린 단편들을 모두 한편 한 편 마음에 담아보기로 한다.

 

  

 

짓이겨지다, 그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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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녀와 결혼한 것은, 그녀에게 특별한 매력이 없는 것과 같이 특별한 단점도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9)

 


소설은 평범하고 평범한 아내를 둔, 남편의 시점으로 시작된다. 그의 아내는 특별히 특출 난 매력이 있지는 않지만, 특별히 모난 점도 없는 사회의 기준에서 적당히 괜찮은 사람이다. 남편은 딱히 걸출한 삶을 살고 싶어 하지 않는 인물이다. 적당히, 남들 하는 만큼, 그럭저럭 사는 삶에 만족한다. 덕분에 이 부부는 결혼 이후, 큰 문제없이 잘 살아왔다. 어느 날 아내가 그 꿈들을 꾸기 시작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수많은 가족들이 소풍중이었어. 그 광경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찬란했어. 시냇물이 소리내서 흐르고, 그 곁으로 돗자리를 깔고 앉은 사람들, 김밥을 먹는 사람들, 한편에선 고기를 굽고, 노랫소리, 즐거운 웃음 소리가 생생했어.


하지만 난 무서웠어. 아직 내 옷에 피가 묻어 있었어. 아무도 날 보지 못한 사이 나무 뒤에 웅크려 숨었어. 내 손에 피가 묻어 있었어. 내 입에 피가 묻어 있었어. 그 헛간에서, 나는 떨어진 고깃덩어리를 주워먹었거든. 내 잇몸과 입천장에 물컹한 날고기를 문질러 붉은 피를 발랐거든. 헛간 바닥, 피웅덩이에 비친 내 눈이 번쩍였어. (19)

 

 

아내는 꿈을 꾸고 난 이후, 갑작스레 고기를 끊는다. 영혼이 어딘가 빠져나간 사람처럼, 그녀는 ‘고기를 먹지 않는다’라고 이야기할 뿐 고집스럽게 육식을 거부한다. 아내가 꾸는 꿈들은 피가 방향을 바꿔 살며시 올라오듯, 소소한 섬뜩함을 불러일으킨다.

 

아무런 거리낌 없이 어떤 생명의 살을 발라 먹는 일. 이제까지 아무렇지 않게 해오던 일들이 갑자기 혐오스러워지고 아득해진다. 무언가를 죽일 때의 나타나는 불편함은 감춰버린 채, 무신경하게 고기를 소비하는 사람들. 아무렇지 않게 다른 생명을 죽여버리는 그 무심함의 칼날은 동물을 넘어 사람에게 향하는 무신경함의 폭력을 상징한다.

 

 

나는 알고 있었다. 아내가 여위는 건 채식 때문이 아니었다. 꿈 때문이었다. (23)

 

 

책장을 덮으며 ‘세상의 모든 폭력 앞에 방패 없이 서 있는 느낌’을 받은 건, 상대방에 대한 이해 없이 사회에서 옳다고 정해진 것을 강요하는 사람들의 행동 앞에서, 연약하게 부러질 듯 서 있는 아내의 모습에 공감했기 때문이다. 갑작스럽게 육식을 끊은 아내의 변화는 꿈으로부터 시작되었다.

 

하지만 그녀에게 애초부터 무언가 벗어나고 싶다는, 해방의 욕구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아내는 브래지어를 잘 차지 않았다. 항상 덥다고 이야기했다. 어떤 점에서도 사회적인 기준에서 모나지 않았던 아내는, 그저 드러내지 않았을 뿐 무언의 사회적 압박에 시달리고 있었을 것이다. 꿈은 그것이 쌓이고 쌓이다 터져 나온 폭발의 시발점일 뿐이다.

  

육식을 비롯해 아내는 남편과의 잠자리도 거부한다. 인간의 한 부분으로 인식되는 ‘본능적인 부분’들을 아내는 모두 거부한다. 육식과 섹스. 인간에게서 ‘본능’이라는 이름으로 존재하는 것들로부터 거리를 둠으로써, 아내는 무얼 얻고 싶었던 것일까? 인간을 인간으로 존재할 수 있게 만드는 ‘또 다른 인간의 부분’들을, 강약약강의 진화 논리가 아닌, 인간으로서 행할 수 있는 존엄을 다시 회복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골고루, 못 먹는 것 없이 먹는 사람이 건강한 거 아니겠어요?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원만하다는 증거죠.” (31)

 

 

“다행이네요. 저는 아직 진짜 채식주의자와 함께 밥을 먹어 본 적이 없어요. 내가 고기를 먹는 모습을 징그럽게 생각할지도 모를 사람과 밥을 먹는다면 얼마나 끔찍할까. 정신적인 이유로 채식을 한다는 건, 어찌됐든 육식을 혐오한다는 거 아녜요? 안 그래요?”

 

“꿈틀거리는 세발낙지를 맛있게 젓가락에 말아 먹고 있는데 앞에 앉은 여자가 짐승 보듯 노려보고 있는 것과 비슷한 기분이겠죠.”


좌중이 웃음을 터뜨렸다. 따라 웃으며 나는 의식하고 있었다. 아내가 함께 웃지 않는다는 것을. 허공을 오가는 어떤 대화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은 채, 사람들의 입술에 번들거리는 탕평채의 참기름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그것이 모두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고 있다는 것을. (32)

 

 

하지만, 그런 그녀를 세상은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는다. 가장 섬뜩했던 것이 바로 그녀의 변화를 지켜보는 사람들의 반응이다. 남편은 아내가 변한 이유에 대해 큰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그저, 아내의 변화로 인해 자신이 겪는 불편함에 대해서만 불만을 토로한다. 잠자리를 거부하는 아내를 겁탈하며 은근한 희열을 느끼기도 한다. 회사 사람들이 모인 식사 자리에선, 자신과 다른 존재에 대해 노골적으로 적대감과 은근한 멸시를 드러내는 시선이 가득하다. 회사 상사들과 그의 아내들은 ‘비정상적’으로 보이는 아내에게 무언의 압박을 준다. ‘너는 우리를 불편하게 한다.’라고.


아내의 가족들은 또 어떤가. 가부장적인 장인은 폭력으로 아내를 다루려 들고, 가족들은 아버지에 대한 권력을 존중하는 척 그 모습을 방관한다. 아내의 보호자가 되어야 할 남편은 처가에 이 소식을 알려 사단을 만든 장본인이다. ‘내가 어떻게 할 수 없으니, 부모인 당신들이 책임을 지고 아내를 고쳐놓아라’ 하는 식의 비열한 방관이다. 사위에게 사죄하는 장인의 모습에선, 딸들을 물건처럼 사고팔던 시대착오적인 혼인 방식의 그림자가 어렴풋이 드러난다. 여전히 딸 가진 부모는 죄인이 되는 세상이다.

 

 

“네 꼴을 봐라, 지금. 네가 고기를 안 먹으면, 세상 사람들이 널 죄다 잡아먹는 거다. 거울 좀 봐라, 네 얼굴이 어떤가 보란 말이다.” (60)

 


고집스레 고기를 거부하는 딸을 향한 엄마의 말은, 그녀의 변화를 비난하고 불편하게 여기는 세상의 시선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염려’라는 이름을 쓴 강요와 폭력, 다름을 거부하는 혐오, 자신을 불편하게 만드는 것들과는 공존하지 않겠다는 명백한 거절은 이 소설을 관통하는 가장 거대한 폭력이다.

 


검지 손가락을 들어올리자 붉은 핏방울 하나가 빠르게 피어나고 있었어. 둥글게, 더 둥글게. 손가락을 입속에 넣자 마음이 편해졌어. 선홍빛의 색깔과 함께, 이상하게도 그 들큼한 맛이 나를 진정시키는 것 같았어. (26)  다만 그 비슷한 느낌, 오싹하고, 더럽고, 끔찍하고 잔인한 느낌만이 남아있어. 내 손으로 사람을 죽인 느낌, 아니면 누군가 나를 살해한 느낌, 겪어보지 않았다면 결코 느끼지 못할...... 단호하고, 환멸스러운, 덜 식은 피처럼 미지근한.

 

 

무엇 때문일까. 모든 것이 낯설게 느껴져. 내가 뭔가의 뒤편으로 들어와 있는 것 같아. 손잡이가 없는 문 뒤에 갇힌 것 같아.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여기 있었던 걸 이제야 갑자기 알게된 걸까. 어두워. 모든 것이 캄캄하게 뭉개어져 있어. (37)

 

 

이런 세상의 폭력을 마주하는 아내의 감정은 위태롭다. 그녀의 꿈은 그녀가 느끼는 감정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이 부분을 묘사하는 문장들은 여리고 섬세하지만, 이상하게 피학적인 쾌감을 일으킨다. 한창 우울할 때면, 가끔 더 깊은 슬픔으로부터 카타르시스를 느낄 때가 있었다. 분명 제정신이 아닌 기분이지만, 거대한 폭력 앞에 스스로를 상처 내며 위안받는 심리는 무섭도록 선정적이다.

 

 

내가 믿는 건 내 가슴뿐이야. 난 내 젖가슴이 좋아. 젖가슴으론 아무것도 죽일 수 없으니까. 손도, 발도, 이빨도 세치 혀도, 시선마저도. 무엇이든 죽이고 해칠 수 있는 무기잖아. 하지만 가슴은 아니야. 이 둥근 가슴이 있는 한 난 괜찮아. 아직 괜찮은 거야. 그런데 왜 자꾸만 가슴이 여위는 거지. 이젠 더 이상 둥글지도 않아. 왜지. 왜 나는 이렇게 말라가는 거지. 무엇을 찌르려고 이렇게 날카로워지는 거지. (43)

  

 

젖가슴은 아이를 먹여 살리는 생명의 원천이다. 그녀가 회귀하고 싶던 것은 인간 본연의 ‘모성’, 생명을 길러 먹이고 성장시키는 따스함이었을 것이다. 무언가를 찢고 할퀴고 물어뜯는 인간의 본성이 아닌, 약자를 존중하는 태도와 시선, 다름과 공존을 인정하는 ‘인간을 인간으로서 존재하게 하는 것들’ 말이다. 하지만, 마지막 남은 젖가슴조차 점점 말라간다. 세상은 젖가슴이 아닌 이빨과 혀, 손과 발을 원하기에 젖가슴이 설 자리는 점점 줄어든다. 위태롭게 놓인 것들은 그 존재를 과시하기 위해 힘을 다해 발광하기 마련이다. 아니, 발악하기 마련이다. 온전히 싸우거나, 미치거나. 위태롭게 걸쳐진 존재에게 남은 선택지는 그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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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 뭘 하고 있어, 지금.”

나는 낮은 소리로 속삭였다. 아내의 무릎에 놓인 환자복을 들어 그녀의 볼품없는 가슴을 가렸다.

“더워서......”

아내는 희미하게 웃었다. 내가 잘 알고 있다고 믿었던, 그녀 특유의 순수한 미소였다.

“더워서 벗은 것뿐이야.”

아내는 칼자국이 선명한 왼손으로 자신의 이마에 쏟아지는 햇빛을 가렸다.

“...... 그러면 안돼?”


나는 아내의 움켜진 오른손을 펼쳤다. 아내의 손아귀에 목이 눌려있던 새 한 마리가 벤치로 떨어졌다. 깃털이 군데군데 떨어져나간 작은 동박새였다. 포식자에게 뜯긴 듯한 거친 이빨자국 아래로, 붉은 혈흔이 선명하게 번져있었다. (64)

 

 

아내는 연약한 피식자에서 강인한 포식자로 다시 돌아갔다. 그녀는 여전히 더웠고 갈증에 시달렸지만, 세상의 기준에 따라 다시 포식자의 가면을 뒤집어썼다. 속은 여전히 연약하고 상처 입은 채 두려움에 떨어도, 포식자의 가면을 썼으니 괜찮을 것이다. 약자에 대한 폭력은 자연의 섭리이고, 당연하다는 그 무감각한 당위성이 그녀를 지탱하고 유지해 줄 것이다. 비록 둥근 젖가슴은 말라버리고, 더 이상 둥그레지지도 않겠지만. 그래서 그 연약한 곡선이 사라지는 순간, 아내도 사라지겠지만.


소설을 읽는 내내 한 사람이 생각났다. 의연해 보였지만, 속은 문드러지고 있었던 한 사람. 얼마간의 경험으로 나는 누군가의 죽음 앞에서 활자 나부랭이를 두드리며 이런저런 말을 한다는 사실이 얼마나 위태롭고 위험한 일인지 자문하곤 한다. 한때 나도 누군가의 죽음 앞에서 이런저런 생각을 글로 밝히곤 했지만, 이제는 그저 조용히 침묵을 지키는 편을 택한다. 누군가의 죽음의 글의 소재가 된다는 건 어떤 의미에서건 무서운 일이다. 물론 언제나 누군가는 그 무서움을 무릅쓰고 문제를 제기한다. 그리고 그럼으로써 세상은 굴러간다. 다만 나는, 연약하게 죽어버린 동박새처럼, 포식자의 가면을 쓰고 점점 말라가 버릴 아내처럼 이 세상의 연약한 것들을 조금 더 오래, 마음에 품고 싶을 뿐이다.

 

 



[한나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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