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작은 숲은 어디에 존재할까?

영화 '리틀 포레스트'를 보고.
글 입력 2019.10.22 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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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틀 포레스트」는 이가라시 다이스케의 만화를 원작으로 한 영화이다. 일본에서는 이미 영화화가 되었으며 국내에선 임순례 감독이 연출을 맡아 2018년 개봉되었다. 적은 투자비용에 비해 영화 순위에서 3주간 2위를 기록하며 150만 가량의 관객 수를 동원하는 등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었다. 영화는 ‘농촌에서의 힐링’이라는 자주 보이는 클리셰를 사용하지만, 우리에게 현대 사회 속에 살면서 잊고 상실해왔던 것들에 대해 주목하게 해준다. 영화가 좋은 평가를 얻을 수 있었던 데에는 여유, 친구, 꿈과 같이 현대인들로부터 멀어진 가치들이 영화 내에 모여 있다는 점이 기여한 것으로 보인다.

 

 

 

‘촌놈’으로서 살아나는 주인공


 

주인공 혜원은 우리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임용고시 준비생이자 가난한 20대 청년 중 한 명이다. 혜원은 고단한 도시 생활에 지쳐 고향인 미성리로의 도피를 결심한다. 그런 혜원이 고향 집에 돌아오자마자 하는 일은 다름 아닌 지푸라기를 태워 방을 데우는 것. 카메라는 혜원이 지푸라기를 하나씩 넣을 때의 표정 그리고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타는 지푸라기를 클로즈업한다. 자신만의 공간에 와 처음 한 일이 하필 지푸라기를 태우는 행동인 것은 필시 우연이 아닐 것이다. 혜원의 힘들었던 도시 생활에 대한 일말의 해소이자 뒤를 돌아볼 수 없던 기계적인 노동에서 벗어나 자신의 필요와 생각에 따른 능동적인 노동과 생활에 관한 새로운 시작을 암시하는 행위로서 작용한다고 볼 수 있다.

 

처음 봤을 때 차갑기 그지없던 집은 혜원이 돌아오면서 조금씩 온기를 찾아간다. 그리고 혜원도 마찬가지다. 웃음기 없던 그녀는 집에서 제대로 된 끼니를 챙겨먹고 고향 친구들과 어울리며 생기를 찾기 시작한다. 주인공은 대부분 매 식사를 직접 요리해 먹고, 감독은 이 부분에 주목해 요리하는 과정 순간순간이 마치 요리프로그램을 보듯이 자세히 나오도록 연출한다. 돌아가는 믹서기부터 수제비 반죽까지, 요리 도구와 요리하는 손길을 구석구석 비춰준다. 이건 단순히 시골생활에서의 정경을 느끼게 하려고 한 의도일 수 있지만 요리를 하는 과정을 강조한 것에는 감독의 다른 의도가 있다고 생각한다. 도심의 집에서 밥을 먹는 회상 장면에서 혜원은 푸석하게 된 편의점 도시락을 젓가락으로 꾹꾹 누르며 애써 먹는 모습을 보인다. 과장해서 말하면 그저 허기를 채우기 위해 먹는 것이지 혜원의 취향이나 생각이 나타나지 않는 모습이었다. 이것은 곧 혜원의 주체성의 상실을 의미하기도 하다. 하지만 미성리에 온 후 자신이 주도적으로 요리를 하며 그에 따른 결과들을 맛있게 먹는 모습은 상실했던 자신의 사고와 능력이 되살아나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그 능력이 뛰어나건 아니건 혹은 진로와 상관이 있건 없건 주인공의 잊었던 자아의 일부분을 찾아가며 살아가는 모습은 한층 더 주인공이 살아있음을 느끼게 해준다.

 

이 영화의 큰 흐름은 주인공 혜원이 미성리에서 지내는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의 사계절을 타고 흘러간다. 봄에는 쑥을 캐고, 여름엔 토마토를 따먹고, 가을엔 떨어진 밤을 줍고, 겨울엔 곶감을 말리는 모습으로 각 계절들이 시작된다. 먹을거리를 준비하는 과정이 계절에 대한 대표성을 주는 이유는 농촌이라는 장소의 특수성 덕분이다. 도시에서라면 아무 때나 시켜먹거나 사먹을 수 있는 음식들이 농촌에서는 매 계절 수확되는 작물들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는 관객은 계절의 흐름을 천천히 따라가며 농촌의 여유를 느낄 수 있다. 토마토를 따며 장난치면서 먹고, 직접 수확한 벼로 빚은 막걸리를 마시며 편안히 누워 자는 장면들에서 육체적으로 힘들지라도 도심 생활에서는 느낄 수 없는 여유와 정들이 가감 없이 드러난다. 이를 통해 우리는 가슴 한편 채우고 싶었던 삶의 여유라는 요소를 다시금 떠올리고 여유로운 삶 안에서 능동적으로 사는 혜원의 모습에 미소 짓게 된다.

 

 

 

관계의 소중함


 

이 영화가 또 한 가지 부각하는 요소는 ‘친구’이다. 시골에 사는 친구라는 특성을 드러내기 위해서인지 작품 내의 등장인물들은 전화를 제외하고는 SNS나 메신저를 이용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서로의 집에 찾아오거나 개울가나 논과 같은 자연 속에서 어울리며 서로 얼굴을 마주본 채 진솔하게 이야기하는 점이 돋보인다. 처음 미성리에 온 날, 혜원은 밤에 공포에 떠는 모습을 보이며 고모와 가장 친한 친구인 은숙을 찾지만, 정작 아무한테도 전화를 걸지 못한다.

 

다음날 혜원의 표정과 하품하는 제스처는 한숨도 자지 못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이는 주인공의 관계가 아직 단절되어 있다는 것을 은유적으로 표현하며 도시에 혼자 사느라 끊겼던 혜원의 인간관계를 대변한다. 다음 날 고향친구들에 대한 자세한 소개와 함께 어렸을 적 있었던 추억 이야기를 하며 장난치고 쉬는 장면이 나온다. 이를 보며 개별화된 개개인들 속에서 살아가는 현대인(관객)들은 혜원과 친구들의 모습에 더욱 정감을 느끼고 그러한 관계에 대해 부러움을 감출 수 없을 것이다. 어쩌면 외로움과 고립감을 느낄 수 있는 농촌에서 친구라는 관계는 혜원에게 큰 위로와 격려가 되어준다. 거의 매 사건마다 등장하며 혜원을 돕는 은숙과 재하는 우리에게 친구라는 관계가 얼마나 큰 존재로서 다가올 수 있는 지 느끼게 해준다.

 

 

 

‘꿈’이라는 양분


 

한편 몇몇 관객들은 꿈을 이루지 못하고 쉬러 내려온 혜원을 현실로부터 도피하는 태도라고 생각하며 비판적인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다. 하지만 이 영화는 꿈을 빨리 찾으라는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꿈을 빠르게 이룰 필요가 없으니 자신의 꿈을 잃지 말고 천천히 가져가라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선 영화에서 찾을 수 있는 대사들이 함께 근거가 되어준다. 첫째로 혜원의 엄마가 과거에 말한 ‘기다려. 기다릴 줄 알아야 최고의 음식을 맛 볼 수 있어.’라는 대사이다. 이 대사를 혜원은 봄까지 시골에서 무엇을 할까 고민하던 중 떠올리는데 이는 곧 생각하고 기다리고 다시 생각하다보면 자신의 꿈을 찾을 수 있다는 말이 아닐까.

 

다음으로 자신이 시골에서 회피하고 있는 상태로 멈춰 있다는 것을 느낀 혜원에게 재하는 폭풍우에도 떨어지지 않은 사과를 건네주며 “얘는 너랑 다르게 폭풍이 불어도 끝까지 견디더라.”라고 한다. 이 말이 매섭게 들리기도 하지만 꿈이 무엇인지 혹은 꿈을 어떻게 이룰지 고민하고 힘들더라도 천천히 그리고 열심히 노력하며 버텨가라는 의미가 담겨져 있는 조언이라고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재하의 말을 들은 혜원이 그에 동의하며 엄마와의 추억을 떠올리는데 엄마는 “겨울이 비로소 와야 만들 때 고생했던 곶감이 맛있는 줄 알 수 있는 거야.”라고 한다. 이 세 대사들은 결국 꿈을 가져야 하고 또 이루기 위해 노력해야 하지만 잠시 쉬어가도, 서툴러도 괜찮다는 따뜻한 위로의 의미로 일맥상통한다. 이는 혜원과 같이 꿈을 잃거나 포기하는 젊은 세대들에게 전하는 위로와 응원의 메시지라고 생각해볼 수 있다.

 

 

 

우리들의 리틀 포레스트


 

영화의 내용은 농촌에서의 삶을 대안으로 제시하는 듯하지만, 그렇다고 무작정 낭만적으로 그리지는 않는다. 엄마에 대한 험담을 하는 동네 주민과 같이 농촌 사회의 답답함을 짧게나마 보여주고, 폭우로 인해 1년간 지은 농사를 망치는 장면도 넣어준다. 또한 고향을 떠나 도시로 가고 싶어 하는 은숙을 통해 포근하지만 답답한 장소라는 인식을 간접적으로 드러낸다. 이러한 편집들을 보았을 때 단순히 귀농을 대안적 삶으로 제시하는 영화로 읽히는 것은 곤란해 보인다. 그보다는 혜원이 고향에서 자신만의 작은 숲을 찾았듯이, 나의 작은 숲은 어디에 있을 것인지 생각해보는 것이 이 영화의 핵심 화제라고 생각한다.

 

이 영화는 주인공의 내적 갈등과 성장이 주를 이루고, 갈등 구도가 없다. 주인공이 현대인을 대신해서 특히나 젊은 세대들이 대다수 느낄 수 있는 무력감과 미래에 대한 걱정을 표현하며 한편으론 그런 공간에서 도망가는 초반부 모습을 통해 관객에게 공감과 카타르시스를 유도한다. 그럼에도 그 과정에서 갈등 구조가 너무나 약하기에 대중들에게 외면 받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본 작품은 실제로 여러 영화 수상 분야에서 상을 받으며 관객 수 150만 가량의 나름 괜찮은 성적을 얻었다. 이는 영화 곳곳에서 삶의 여유, 꿈, 노동, 친구, 그리고 자연까지 현대 사회에서 깎아지고 상실되어가고 있는 가치들이 효과적으로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스크린을 통해 바라보면서 내적인 가치들을 대신하여 충족할 수 있는 것이다.

 

그만큼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무언가 상실되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감독은 특히 현대인이 이 영화에서 말하는 ‘작은 숲’을 상실했다고 여긴 것이라고 생각한다. 숲의 죽음. 그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작은 숲은 나의 꿈일 수도 사랑일수도 아니면 그저 여유로운 휴식일수도 있다. 좋게 말하면 안식처 나쁘게 말하면 도피처라고도 부를 수 있는 나 자신만의 ‘숲’은 삶에 있어 중요한 요소임에는 분명하다. 왜냐하면 이 ‘작은 숲’이 우리의 상실했던 주체성을 회복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영화 속에서 주체성을 잃고 마치 죽은 기계처럼 일하던 혜원은 고향에 돌아와 자신의 ‘작은 숲’이라고 할 수 있는 농촌에서의 여유, 친구라는 관계, 요리라는 여가를 통해 자신의 주체성을 찾고 꿈을 향해 다시 한 번 나아간다. 결국 ‘작은 숲’이란 나를 지탱하는 마음의 구심점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마지막 장면에서 혜원은 이렇게 말한다. “그동안 엄마에게는 자연과 요리, 나에 대한 사랑이 그녀만의 작은 숲이었다. 나도 나만의 작은 숲을 찾아야겠다. LITTLE FOREST”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는 너무나도 빠른 고속도로 위에서 달려가고 있다. 우리도 고개를 살포시 돌려 우리의 숲에는 무엇이 자라고 있는가 하는 것들에 관하여 우리 스스로의 내면을 끊임없이 살피고 돌봐줘야 할 필요가 있다. 그게 일이든 여가이든 우리도 살아가는 데 우리들만의 작은 숲을 구축해 나가야한다고, 우리들만의 꿈과 주체성을 찾아나가야 한다고 감독은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작은 숲’이 잘 만들어진 우리는 목표를 상실하거나 사랑을 상실하거나 혹은 죽음을 바라보았을 때 작은 숲을 통해 다시 털고 일어날 수 있는 힘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힘들 때마다 이곳의 흙냄새와 바람과 햇볕을 기억한다면 언제든 다시 털고 일어날 수 있다는 걸 엄마는 알아”- 혜원 엄마

 

 

[박범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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