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더는 그대를 과음하고 싶지 않습니다 [사람]

술, 그리고 사랑에 취하지 않는 법
글 입력 2019.10.22 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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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 입학하면서 술을 마실 일이 많아졌다. 술을 좋아하는 친구들도 많고, 공식적인 술자리도 많아졌다. 내 주량을 알게 되었고, 술에 취한 내 모습을 마주할 일도 많았다. 내가 봐도 별로였기 때문에 "적당히"를 아는 것이 중요함을 배웠다. 취하지 않기 위해 나름대로 애썼고, 나만의 방법을 만들기도 했다. 천천히 마시기, 적당히 끊기, 눈치껏 덜 마시기 등이 그 방법이다.

 

하지만, 취하면 그런 방법은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성은 마비가 되고 감각은 흐려진다. 당장에 눈앞에 놓은 것도 잘 보이지 않는다. 그만큼 마시지 않는 것도 중요하지만 확실히 마음대로 안 되는 것도 맞다. 다음 날 정신 차려보면 많은 일이 일어났고, 끊어진 기억의 잔상들만 남아있을 뿐이다.


*


가을을 타는지 자꾸만 외로움이 불쑥불쑥 찾아왔다. 그래서 그런지 이상하게 설렘이 자주 느껴졌다. 지금 나에게 중요한 것들을 뒤로한 채 자꾸 사랑이 하고 싶은 내가 참 미웠다. 그래서 다짐했다. 적당히, 천천히, 나부터 생각하자고.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하자고. 즐길 수는 있지만, 사랑에 눈이 멀어 나를 잃지 말자고.

문득 술에 취하지 않으려는 내 모습 같아 보였다. 어쩌면 술과 사랑은 취한다는 점에서 같은 맥락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술이든 사랑이든 취하고 나면 주변도, 내 모습도 잘 보이지 않는다. 본능과 감정에 따라 행동하고, 정신을 차리기 쉽지 않다.


물론 모두의 사랑이 그렇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지금까지의 내 사랑은 그랬던 것 같다. 아마 어려서 그랬겠지. 갓 성인이 된 스무 살이 자신의 주량을 모른 채 술을 마시고 후회하는 것처럼, 아마도 나는 사랑에 취하지 않는 법을 몰랐던 것이 아닐까?



첫 잔은 당연히 원샷이겠죠?



술이 한두 잔 들어가면 기분이 좋아진다. "이러려고 술 마시는 거지." 하며 분위기를 즐긴다. 아직은 술기운이 덜 들었기 때문에 분위기가 달아오르지는 않았지만, 서서히 공간이 편안해짐을 느낀다. 아직까지는 만취나 비용에 대한 걱정이 있지만, 이대로라면 조절할 수 있을 것 같고, 더 기분이 좋아지고 싶은 마음이 든다. 현실을 잊고 순간을 즐기기 시작한다.

사랑을 처음 시작할 때와 같다. 처음의 설렘은 현실의 모든 걱정을 잊게 해준다. 무엇을 하든 그에 대한 생각이 끊이지 않고, 그와 연락하며 내내 웃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주위에서 "얼굴 폈다."는 말도 듣는다. 사랑을 하면 사람이 달라진다고, 누가 봐도 행복한 사람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미래에 대한 걱정이 가장 많이 들 때이기도 하다. 이렇게 시작해도 괜찮을까 하는 마음에 조심스러워진다. 하지만, 이내는 "사람은 역시 연애를 해야 해." 혹은 "이 사람이라면," 이라는 생각과 함께 그에게 마음을 열고 한 걸음 더 다가가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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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병을 비워갈 즈음 이성적인 판단과 제어가 쉽지 않아진다. 한두 명씩 취한 사람들이 생기며 분위기는 확 무르익는다. 누군가는 진지한 속마음을 털어놓고, 누군가는 신나서 춤을 추며 노래를 부른다. 빈 병이 늘어날수록 분위기는 난장판이 된다. 물론 그 속에 있으면 누구보다 즐겁다. 현실이고 뭐고, 고민 같은 거 다 잊고 지금, 이 순간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된다.

사랑이 무르익으면 어떻게 될까? 주체할 수 없을 만큼 사랑에 빠진다면, 주변으로부터 눈이 멀게 된다. 친구나 과제보다 그를 더 생각하고, 나의 생활을 포기해서 그와의 시간을 보낸다. 왠지 이 순간을 놓쳐서는 안 될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나에게 1순위가 그가 되는 순간, 내 모든 생활과 사고는 그를 중심으로 흘러가게 된다. 절대 모두가 그렇지는 않지만, 사랑에 모든 걸 걸어본 사람이라면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랑에 빠졌을 때 보이는 행동의 양상도 사람마다 다르다. 술에 취해 매번 술값을 내는 사람처럼, 사랑을 할 때 소비가 급격히 많아지는 사람이 있다. 술을 마시고 노래방에 가는 사람처럼, 연애할 때 데이트에 할애하는 시간을 최우선시하는 사람이 있고, 취하면 더 마시는 사람처럼 사랑할수록 집착하는 사람도 있다. 사랑에 완전히 취하면, 이성적인 판단력이 마비된다.



너 취했어. 그만 마셔.



함께 술자리에 있는 친구가 너무 많이 취한 걸 보면 걱정이 된다. 더 마시면 큰일 나겠다는 생각과 함께 그가 술을 마시는 것을 말리기 시작한다. 술잔에 술 대신 물을 따라주기도 하고, 안주를 계속 먹이기도 한다. 이때 대부분 취한 친구들은 "나 안 취했어!"라고 소리친다. 그는 "나ㅏ앋ㄴ치해뗘ㅕ"에 가까운 말을 하는데, 그만 마시라 해도 굳이 술이 더 달라고 한다. 몇몇은 병째 들고 가서 마시는 모습도 보인다. 무조건 말려야 한다.

정말 잘 맞는 사람이라면 괜찮겠지만, 섣불리 시작한 연애는 좋지 않은 결과를 보이기 쉽다. 사랑이 어긋나기 시작할 때, 친구들에게 털어놓을 때가 많다. "이런 일이 있었는데 그가 이랬어." 제삼자가 보기에도 사랑이 끝났다 싶을 때가 있다. "그 사람은 아닌 것 같아."라고 말을 해도 당사자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다. 그래, 남이 뭐라 하든 들리겠냐 싶어서 말을 안 하려 해도, 병나발을 불듯 병든 사랑을 끌고 가는 모습은 너무나 말리고 싶을 따름이다. 하지만 본인에게는 들리지 않는다. 머리로는 이해해도 마음으로는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다. 잠시 힘든 것뿐이라고 생각하며 "걱정해줘서 고마워."라는 말로 친구의 입을 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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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주량을 무시하고 술을 들이부은 결과는 참담하다. 몸에 받지 않는 술을 계속해 마시면 토를 하는 경우가 많다. 위가 상하고 간이 상한다. 속을 버리고 건강을 잃을 수 있다. 또한, 취해서 하는 행동들은 흑역사로 남게 된다. 평소였으면 하지 않았을 말과 행동을 하고, 비상식적이거나 비윤리적인 행동을 하게 될 수도 있다. 잊고 싶은 기억들이 쌓인다. 도를 넘어선 음주는 몸과 마음에 모두 상처로 남게 된다.

사랑이 과해지고 자신을 컨트롤할 수 없게 되면, 끊임없는 상처의 굴레에 빠지게 된다. 관계에서의 상처는 몸과 마음에 씻을 수 없는 아픔을 안겨준다. 상처를 받았을 때 그만둘 수 있어야 하는데, 관계를 지속하는 동안의 매몰 비용 때문인지 끊어내기가 쉽지 않다. 결국 집착과 폭력의 언저리에서 서로에게 해서는 안 되는 말들을 반복하고, 잊고 싶은 기억을 가득 채우고서야 우리는 아니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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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은 더 심각하다. 숙취로 인해 "으윽"소리와 함께 눈을 뜬다. '적당히 마실걸.' 취했다며 그만 마시라던 친구의 말이 기억 속을 스쳐 지나간다. 속은 속대로 상해 있고, 끊어진 기억들은 이불을 걷어차게 만든다. 머리도 아프고 속도 안 좋고 만신창이가 되어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방에 널브러진 옷들과 벗어 던진 신발이 어젯밤을 증명한다. '내가 다시 술 마시면 사람이 아니다.'라는 다짐과 함께 해장하기 위해 침대에서 일어난다.

이별 후유증은 순간 몰아친다. 사랑이 끝난 후 상처투성이로 남겨진 자신을 마주한다. 그에게 들었던 말, 나를 보던 눈빛이 아직도 칼날이 되어 찌르는 것만 같다. 그 말은 하지 말 걸, 그러지 말 걸, 온갖 후회가 몰려온다. '그때 그러지 않았더라면, 무언가 달라져 있을까?' 계속해 자신을 탓하다가도, 그가 너무 미워진다. '사랑하지 말걸. 이렇게 모든 걸 주지 말걸.' 소식을 들은 친구에게 와 있는 위로의 메시지를 보고 깨닫는다. 사랑에 눈이 멀어 내게 소중한 것들도, 나 자신도 돌보지 못했었구나. 헤어지라는 친구의 말을 들을 걸 하는 생각이 몰려온다. 다시는 사랑 같은 건 하지 않겠다는 다심을 하며 그와의 추억이 담긴 사진을 지워나간다. 그에게 선물 받은 물건도 전부 모아 버린다. 술에서 깨듯, 사랑에서 깬 것이다.

  


내일 일정 있어서 적당히 마실게.


술을 마시러 갈 때 "술을 취하려고 마시는 거지!" 하며 가는 친구와 "적당히 마시다 갈게. 취하면 안 돼."하는 친구가 있다. 취하고자 하는 친구들은 미리 숙취를 걱정하지 않는다. 현재는 현재가 중요할 뿐이다. 이 순간의 행복을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 깨고 싶어 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 즐긴다.

반면에, 취했을 때의 걱정과 숙취에 대한 생각으로 술을 조절하는 친구들은 나름의 선을 지키려 애쓴다. "내가 술을 조절해야지, 술이 나를 컨트롤하면 안 된다"며 각자의 방법으로 자신을 지킨다. 취하지 않기 위해 어떻게 하냐는 질문에 친구들은 정신력, 취했다 싶으면 그만 마시기, 물과 안주 많이 섭취하기, 천천히 마시기 등의 이야기를 했다. 나도 조절하며 마시는 사람으로, 같은 방법으로 술자리에서 정신을 유지하곤 한다.

보통 취했을 때를 걱정하는 사람들은 취해서 실수한 경험이 있거나, 숙취로 고생했던 사람들이다. 술을 많이 마시며 점점 조절하는 법을 익힌다. 자신의 주량을 깨닫고 적당히 마시려 하고, 취하되 어느 정도의 선을 지키려 한다. 뒷일 걱정 없이 마시는 것도 어렸을 때나 가능한 일이라는 말을 많이 듣는다. 아무래도 건강상의 이유나 다음 날의 일정 때문에 나이가 들수록 조절 없이 술을 마실 수는 없는 것 같다. 자신을 주체할 수 없을 정도의 술을 마시는 것이 확실히 미성숙한 행동이기는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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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과 미래를 두려워하지 않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가장 뜨겁게 사랑할 수 있다. 어리기에 가능한 연애가 아닐까? 해가 변하며 따져야 하는 것들이 늘어난다. 즐거움만을 위해 사랑을 할 수는 없다. 자신을 돌보고, 삶을 지키며, 서로에게 플러스가 되는 연애가 성숙한 연애라고 한다. 그러려면 사랑에 취하지 않게, 혹은 적당히 취할 수 있게 조절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사랑은 강한 감정이다. 상대를 향한 끌림과 설렘은 감각을 마비시키고, 중요한 것들을 잊게 만든다. 사랑에 빠지는 일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사랑은 뜨거운 만큼 아름다운 감정임이 확실하다. 하지만, 사랑만 하고 살 수는 없다. 사랑이 삶의 전부가 되어서도 안 된다. 술과 마찬가지로 내가 사랑의 주체가 되어야지, 사랑에 끌려다녀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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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취하지 않기 위한 방법은 술에 취하지 않기 위한 방법과 동일하다. 정신력이 필요하다. 조급해하지 않고 천천히 다가가며, 완급조절을 해야 한다. 또한, 술 마실 때 물과 안주를 먹듯, 사랑에만 완전히 빠져들지 않도록 분산 투자를 해야 한다. 나를 위한 것들에 소홀해져서는 안 된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내가 가진 것들을 지켜가며 사랑을 해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멈출 타이밍을 아는 것이다. "취했다." 싶은 순간, 술잔에서 손을 놓아야 한다. 본인이 인지하지 못한다면 "너 취했어."라는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한 번 놓친 타이밍은 돌이킬 수 없는 흑역사를 만들어 내고, 끝내는 지독한 후유증을 겪게 만들 수 있다. 첫 한두 잔의 술처럼 설레던 사랑의 첫 시작을 아름답게 기억하고 싶다면, 그만둘 타이밍을 알아야 한다. 아직 아니라고 우기고 싶어도, 젓가락을 떨어뜨리고 발걸음이 꼬이는 순간, '아, 취했구나.' 그 순간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끝을 앞두고 있다면 우리의 인연이 여기까지임을 짐작하는 순간은 분명 곳곳에 숨어 있다. 그것들을 외면하는 것은, "나ㅏ앋ㄴ치해뗘ㅕ"를 반복하는 일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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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인생의 전부가 아니다. 사랑만 하고 살 수는 없다. 언젠가 눈 뜨고 마주해야 할, 나의 삶이 존재한다. 순간의 행복과 설렘으로 놓친다면 평생 후회로 남을 수 있는 것들이 많다. 그렇게 현재만 바라보고 살 수는 없다. 다음날 오전 수업이 있는 친구들이 "내일 오전수업이라 일찍 갈게.", 알바가 있는 친구가 "내일 출근이라 두 잔만 마실게."라고 하는 것처럼, 사랑 앞에서도 내일의 나를 생각하는 자세는 필요하다.

더 마신다고 배로 즐거운 것은 아니다. 더 취할수록 더 자신을 놓고 노는 건 맞지만, 대부분 기억조차 못 할 일들이다. 적당히 즐겁게 취하고 적당히 귀가하는 것이 어떻게 보나 효율적인 선택이라고 볼 수 있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적당히 사랑하고 적당히 의지해야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 더 많이 더 헌신한다고 더 깊은 사랑을 하는 것은 아니다. 순간에 충실한 것은 좋지만, 너무 순간에만 충실하기에는 우리에겐 그 이외의 삶이 존재한다.

내일의 일정을 위해 술자리를 정리하는 현명함을, 사랑 앞에서도 보일 수 있어야 현명한 사랑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내일 일정 있어서 적당히 마실게."라고 말하는 나에게 "그래."라고 말해주는 사람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오늘 하룬데?" 만큼 위험한 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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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는 정말 취하고 싶을 때도 있다. 왠지 오늘은 취해야 할 것 같고, 그래도 될 것 같은 날도 있다.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판단력의 문제일까, 아니면 정말 그래도 괜찮은 걸까? 사실은 이 선택 앞에서도 나는 많이 갈등한다. 뻔히 알면서도 괜히 그러고 싶은 마음이라서 그런 것 같다. 후회할 걸 알면서도 마음 가는 대로 하는 내가 참 싫으면서도 어째 잘 고쳐지지는 않는다.

사랑은 더 어렵다. 이 사람은 다를 것 같아서, 늘 새로운 기대를 걸게 된다. 사랑에 상처받는 건 무조건 상대의 탓은 아니다. 내가 사랑에 얼마나 취하느냐, 얼마나 조절하느냐도 중요하다. 하지만 정말 조절이 어렵다. 어떤 이들의 사랑은 소주 한 잔보다 더 큰 가치를 가져다주니까, 그리고 내 사랑이 그런 사랑인지 아닌지 분간이 안 가니까. 이제는 조절해야 할 때가 되었는데 아직 어린 건지, 멍청한 나는 또 기대를 건다.

이 사랑은 내게 소주 한 잔 같은 존재일까, 아니면 그 이상이 될 수 있을까? 묻고 물어도 알려줄 사람은 없다. 그 이상일지 모른다는 희망으로 인해 조용히 한 잔 더 들이켤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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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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