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설리를 겨눴던 악플의 정체 [문화 전반]

글 입력 2019.10.18 2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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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일 저녁, 설리의 사망 신고를 접수했다는 기사가 속보로 떴다. 오보이길 바랐으나 그는 결국 자택에서 숨을 거둔 채 발견됐다. 고작 25살이었다. 자살로 생을 마감하기엔 너무 이른 나이였다. 고인은 전날까지도 SNS를 통해 팬들과 소통했다. 광고 촬영에도 성실하게 임했다. 그것이 위태로운 외줄 타기였다는 걸 알아차리지 못했다. 세간에 떠도는 조롱과 비난에 맞서 의연함을 유지한다고만 짐작했다.


일각에선 그의 죽음 원인을 놓고 '악플'이 영향을 미쳤을 거라 말한다. 유서도 남기지 않고 떠난 이가 무슨 연유로 목숨을 끊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는 분명 활동을 중단한 적도 있을 만큼 악성 댓글로 힘겨워했다. 그간 설리에게 향했던 매서운 눈초리와 칼을 품은 말들을 구체적으로 되짚어보자. 그를 고통에 빠뜨렸던 악플이 그저 '악플'일뿐이었는지. 여성 연예인에게 쏟아지는 악플의 특수성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이를 악플로만 규정하는 것은 문제의 근본을 축소하고 평면화하는 행위다. 본질은 여성을 향한 폭력이자 혐오였다.

 



악성 댓글의 정체, 여성 혐오



21세기에는 여성을 공격하는 도구로 사이버폭력이 추가된다. 온라인상에서 여성이라면 누구나 공격 대상이 된다. 특히 일거수일투족이 실시간으로 공개되는 여성 연예인은 더욱 취약한 표적이다. 설리도 이런 현상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노브라에 관한 그의 소신은 단골 비방 주제였다.


그는 당연하다고 여겨온 브래지어 착용에 의문을 던졌다. 노브라를 선호하는 이유로 편안함을 들며 직접 몸으로 실천하고 말로 설명했다. 여성이 브래지어에서 해방될 자유를 말이다. 가슴을 옥죄는 브래지어의 압박감은 대다수 여성이 느끼는 불편함이다. 그로 인해 소화불량에 걸리는 여성들도 부지기수다. 그런데도 쉽게 브래지어를 벗기 어렵다. 사회적 규범을 거스르는 여성에게 쏠리는 욕설과 따가운 시선을 견디는 건 더 어려운 일이다. 이 사실을 알기에 일부 응원도 뒤따랐으나 대부분 그를 향해 성적 모욕과 조롱을 일삼았다.


언론 역시 소신 있는 행동을 선정적으로 소비했다. 관음적 시선으로 여성 연예인을 대상화하고 성적 희롱을 부추기기 바빴다. 그가 라이브 방송을 진행하다 벌어진 사고에는 '가슴 노출', '대범' 등 자극적인 문구를 달아 확산시켰다. 2017년 영화 리얼을 개봉했던 당시에도 일관된 태도였다. 노출 수위에만 관심을 쏟았다. 언론은 조회 수에 매몰되어 기본 윤리강령조차 잊었다. 집단을 감시하고 비판하는 역할을 망각한 채, 여성 혐오로 점철된 목소리의 대변자를 자처했다.


남성 배우를 격의 없이 대한 사건도 뭇매를 맞았다. 연장자를 높이는 호칭 대신 동료에게 사용하는 의존명사로 남성 배우를 호명한 점이 문제였다. 한국 사회에서 통용되는 기본 예의범절을 무시한 처사라고 비판이 일었다. '씨'라는 호칭에는 원칙적으로 존중의 의미가 담겨 있다. 이를 통해 나이로 결정되는 엄격한 서열 문화와 호칭 사용을 고찰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대중은 비난으로, 언론은 그저 논란으로 치부했다.


자기 주관을 드러내는 연예인일수록 사이버 폭력에 쉽게 노출된다. 배우 서지혜와 가수 아이린도 터무니없는 욕설에 시달렸다. 도서 82년생 김지영을 SNS에 게재했기 때문이다. 아이돌 손나은은 휴대폰 케이스에 적힌 Girls Can Do Anything이란 문구를 빌미로 무차별 비방에 시달렸다. 영화 82년생 김지영의 주인공 역 캐스팅을 수락한 배우 정유미 또한 같은 일을 겪었다.


여성 연예인을 향한 사이버 폭력의 정체는 여성 혐오다. 이는 남성의 성적 판타지를 실현해줄 존재로만 여성을 바라보기 때문에 발생한다. 여성이 수동적 객체에서 자아를 지닌 주체로 변화할까 두려워하는 태도가 '악플'로 이어진다. 여성의 변화는 곧 여성을 둘러싼 사회의 재구축을 촉발한다. 여성에 관한 고정관념을 답습하며 살아온 이들의 세상도 무너질 수밖에 없다. 폭력은 언제나 새로운 지각변동의 불씨를 잠재우는 수단으로 애용된다.

 



강력한 처벌과 인식 개선만이 필요한 때



지난 며칠간 악플 문제에 관해 자성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인터넷 실명제 도입은 직접적인 규제 대책으로 다시 주목받는 중이다. 검열과 통제가 없는 익명성을 폐지해야 사이버 폭력이 사라질 것이라는 주장에 힘이 실리고 있다. 그러나 현실에 비추어보면, 실명제 법안이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할 것이란 결과가 예측된다. 실제로 페이스북에는 본명과 얼굴을 내걸고도 성희롱 댓글을 다는 네티즌이 즐비하다.


이런 상황에서 섣부른 실명제 도입은 오히려 여성의 발언권을 제한할 가능성이 높다. 익명으로 성차별과 폭력을 비판하는 여성들에게 사회적 보복을 가할 우려가 생긴다. 여성 혐오 재생산을 지목하는 정당한 비판과 여성 혐오적 비난의 차이점도 구분하지 못하는 형국이다. 어느 쪽이 더 큰 피해를 볼지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실명제보다 사이버 폭력을 엄중 처벌하는 제정안이 필요하다.


가부장제는 자아가 없는 여성을 올바르다고 칭찬하는 사회다. 성별 고정관념을 깨고 자기 목소리를 가진 여성을 천대하는 구성원들도 많다. 여성 혐오와 차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게 이 사회의 모습이다. 온라인상에 만연한 폭력도 이러한 무지에서 비롯한다. 결국 여성에 관한 인식 개선과 사이버 범죄 형량 강화를 동반해야 폭력의 고리를 끊을 수 있다.


진리 상점을 통해 자신이 '이상'하냐고 묻던 고인을 떠올린다. 모두 의문 없이 따르는 규율에 저항했던 그가 이제는 편안한 영면에 들길 바란다. 끝으로 그가 생전에 남긴 말을 전하고 싶다. 그것이 우리에게 남겨진 몫이니까.

 


“가시밭길이더라도 자주적 사고를 하는 길을 가십시오. 비판과 논란에 맞서서 당신의 생각을 당당히 밝히십시오. 당신의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하십시오. '별난 사람’이라고 낙인찍히는 것보다 순종이라는 오명에 무릎 꿇는 것을 더 두려워하십시오. 당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이념을 위해서라면 온 힘을 다해 싸우십시오."

 

-THOMAS J. WAYSON


 

[장지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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