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운명이 아니라면 무엇이겠어요? [사람]

그리고 그에 따른 책임
글 입력 2019.10.16 12:23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그래도 우리는 만났다. 이 계산은 우리에게 이성적 주장들을 납득시키기는커녕, 우리가 서로 사랑하게 된 것에 대한 신비적 해석을 뒷받침해주었을 뿐이다. 어떤 사건이 일어날 가능성이 엄청나게 작은데도 결국 일어났다면, 운명론적 설명에 호소를 한다고 해도 용서받을 수 있지 않을까? 나는 동전을 던졌을 때 왜 앞 또는 뒤가 나왔는지 설명해 달라고 신에게 매달리지는 않는다. 그 확률이 2분의 1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클로이와 내가 옆자리에 앉을 확률처럼 작은 경우일 때, 989.727분의 1의 확률일 때, 적어도 사랑 내부의 관점에서 보자면 그것을 운명 이외의 다른 것으로 설명하는 것이 불가능할 것 같았다. 우리의 삶은 바꾸어버린 만남의 확률이 그렇게 작았던 것을 아무런 미신 없이 받아들이려면 대단히 냉철한 지성이 필요할 것이다. 따라서 누군가 하늘에서 [3만 피트 상공에서] 운명의 줄들을 잡아당기고 있었다고 생각할 수밖에.

 

 

알랭드 보통의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의 한 구절이다. 한 남자는 비행기 옆자리에 앉은 여자와 사랑에 빠져버린다. 그리고 이것이 얼마나 운명적인 일인가에 대해 온몸으로 느끼기 위하여 수학적인 확률을 계산해 보았고, 결국 이는 하늘이 내려 준 운명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만큼 둘의 만남은 희박한 확률을 뚫고 이루어졌다.

 

 

131.jpg

 

 

사실 이런 식으로 수학적 확률을 계산해 보자면, 조금 전 편의점에서 초콜릿 한 봉지를 계산해 준 직원과 나조차도 엄청난 확률을 뚫고 운명적인 만남을 가진 셈이다. 나는 오늘 샛길로 갈지, 큰 길로 돌아서 갈지를 고민했고, 큰 길에서는 편의점을 그대로 지나칠까, 초콜릿이나 하나 사서 먹을까, 아니면 저 길 건너에 있는 대형 마트로 갈까에 대해서도 고민했다.

 

저 편의점 직원은 왜 수많은 일터 중 편의점에서, 그것도 이 동네 이곳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으며, 왜 하필 이 시간에 일해서 나를 마주치게 되었을까. 어쩌면 원래는 8시에 퇴근을 해야 하지만 오늘만 사장님의 부탁으로 연장 근무를 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렇지만 나는 그의 얼굴이 기억나지 않고 아마 그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와 나는 초콜릿과 돈, 그리고 간단한 인사말이라는 형식적인 의례만을 주고받았다.

 

내게 그는 21년간 마주친 수많은 편의점 직원 중 하나일 뿐이고, 그에게 나는 수많은 편의점 고객 중 하나일 뿐이다. 내가 만약 그의 눈을 10초간 똑바로 바라봤다든가, 그와 단 5분이라도 이야기를 나누었다면 그와 나 사이에는 얄팍하게나마 관계가 형성되고 우리는 서로에게 조금은 더 특별한 사람으로 남았으리라. 그렇지만 나도, 그도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았다. 모든 관계에는 그에 따른 책임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미 주어진 책임감에도 허덕이며 벅차하는 중이라서, 새로운 대상에게 책임감을 가져 볼까, 하는 호기심을 느끼기에 어렵다.

 

이렇게 스쳐 지나가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엄청난 우연 속에서 만난 것이기 때문에, 그 수많은 우연 속에서 조금이라도 의지를 개입해 관계를 형성했다는 것은 정말이지 어마어마하게 희박한 운명적인 사건이라는 뜻이다.

 


141.jpg

 

 

관계를 맺는다는 이 오묘하고 특별한 행위를 가장 잘 설명한 사람은 누구보다도 어린 왕자에 등장하는 여우이다. 여우는 어린 왕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네가 나를 길들인다면 우리는 서로를 필요로 하게 된단다. 너는 나에게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존재가 되는 거야. 나는 너에게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존재가 되고......."

 

이 커다랗고 무한한 우주에서, 다른 것 하나 없이 비슷비슷한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오롯이 나 하나만 다른 존재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짜릿하다.

 

*

 

관계를 맺는 형태는 아주 다양하다. 꼭 상호작용이 일어나야 하는 것은 아닌데, 가령 좋아하는 연예인이나 작가를 향한 팬의 사랑은 한 방향으로만 흘러가는 일방통행이다. 예시를 하나 들어 보자. 이 주일 쯤 전에 나는 책을 하나 샀다. 가볍게 읽기 좋은 에세이가 한창 유행하는 요즘, 그득히 쌓인 비슷한 표지 비슷한 제목의 책들 속에서 표지를 펼쳐보지도 않고 이묵돌 작가의 <사랑하기 좋은 계절에>라는 책을 단번에 집어 구매한 이유는 하나뿐이다. 나는 이 작가의 작품을 읽으면서 일방적이기는 하지만 관계를 쌓아왔고, 호감이 생겼고, 그간의 작품들에서 비롯된 신뢰가 생겼기 때문이다.

 

쌓아올리기 어려운 만큼, ‘관계’가 지닌 파급력은 엄청나다. 그래서 관계 맺기는 힘들다. 넓게 생각하면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단순한 상호작용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 전체를 아우르는 힘과 같다. 수많은 제품들의 광고, 사람들의 사소한 행동 하나 말 한 마디, 소비자의 입장에서 제공받는 각종 서비스. 어쩌면 이 모든 것들은 관계 맺음을 갈망하는 손짓일지도 모른다.

 

아까 언급했던 이묵돌 작가를 예시로 들어 보자. 나는 몇 년 전 페이스북을 통해 ‘리뷰왕 김리뷰’라는 페이지로 그를 처음 만났고, 그 이후 그가 제작한 콘텐츠와 그의 SNS에 올라온 600여편의 글을 읽으면서 그를 알아가게 되었다.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그만큼 많은 글들을 접했고, 일방적이기는 하지만 많은 시간을 함께하면서 견고한 신뢰를 쌓을 수 있었다. 수많은 가수들이, 연인들이 바라는 것도 이런 것이다. 열심히 노래를 부르고 열심히 사랑을 주어서 소중한 관계를 만들어 서로를 안정적으로 길들여 버리는 것.

 

 

222222222222.jpg

 

 

이렇게 관계 맺음은 시작도 어렵고 쌓아올리기란 더더욱 어렵다. 그래서 사람들은 처음 형성에만 열중하고 공을 들인다. 하지만 무너지는 것은 한순간이다. 이 정교하고 복잡하게 얽힌 관계는 하나가 틀어지면 다른 것들에도 스멀스멀 의심을 품게 되면서 몽땅 무너져 버리기 때문에, 처음 대했던 그 마음가짐처럼 아주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 길들인 모든 것에게, 당신이 만들어낸 관계인 만큼 끝까지 책임을 져야 한다.

 

"사람들은 이 진실을 잊어버리고 있어. 하지만 넌 잊지 말아야 해. 네가 길들인 것에 대해서는 영원히 책임을 져야 해. 넌 네 장미를 책임져야 해."

 

 

[이현지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4.25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