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나는 어제도 죽고 싶었다. [드라마]

드라마, 死의 讚美 [사의 찬미] 리뷰
글 입력 2019.10.13 1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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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제도 죽고 싶었다. - 死의 讚美[사의 찬미]


 

정말 간절히 삶을 원해 본 적이 있을까. 드라마, 사의 찬미를 보며 나는 생각했다. 총 6부작 밖에 되지 않는 이 드라마는 고작 하룻밤만에 내게 많은 생각의 연결고리를 이어주었다. 살면서 죽을 병에 걸리지 않는 이상 간절히 살고 싶다고 생각하는 순간이 올까. 가끔 살아 있기에 볼 수 있는 광경이나, 느낄 수 있는 벅찬 감정에 이 정도면 행복한 삶이라고 생각했던 적은 있다. 반면에, 죽고 싶은 날들은 많았다.

 

내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 모든 일을 관망할 때, 지금을 살아가는 의미를 찾을 수 없을 때 혹은 그냥 다 때려치우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을 때 나는 자주, 쉽게 죽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나는 어떤 알 수 없는 힘으로 여기까지 살아왔고 죽고 싶다고 생각은 했었으나, 실행에 옮기지 않았다. 죽음이라는 진중한 단어는 역설적이게도 나의 삶에 가볍게 스며들어 있었다.

 

여기 참으로 살기 위해 죽음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두 청년의 이야기가 있다. 그들은 진정 살고자 살지 않는 삶을 선택했고 그 죽음의 서사를 함축해놓은 것이 바로 윤심덕의 곡 “사의 찬미”이고 그들의 인생을 읽기 쉽게 풀어 놓은 것이 드라마 “사의 찬미”이다.

 

본래 “사의 찬미”란 일제강점기, 조선 최초의 소프라노 윤심덕이 이오시프 이바노비치의 〈 다뉴브강의 잔 물결〉에 가사를 직접 지어 가창한 곡이다. 드라마 사의 찬미는 윤심덕과 김우진의 죽음을 뛰어 넘은 사랑 이야기를 주제로 잡았다. 김우진은 같은 시기 극작가로 활동하던 문인인데 가업을 이어야 하는 아들로서의 역할도, 고향에 두고 온 아내의 지아비로서의 역할도 모두 그에겐 벅찬 것이었다. 그는 단 하나, 시대의 극작가로 살고 싶었을 뿐이다.

 

우진은 자신의 신극이 조선인의 자긍심을 일깨워줄 수 있는 하나의 돌파구가 되길 바랐다. 그 생의 목표는 그가 서있는 위치와는 다르게 흘렀다. 그 와중에 극단원으로 윤심덕을 만나고 둘은 서로의 작은 쉼터가 되어준다. 드라마 속에 잠깐씩 비치는 우진의 일기는 몇 마디 대사보다 더 깊이 그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게 해주어 꽤 긴 여운으로 남았다. 일제강점기 극작가로서의 신념과 아들로서, 남편으로서의 역할 사이에서 괴로워하던 그는 그 충돌의 끝에 다다라 마침내 죽음을 동경하게 된다.

 

 

나는 열렬히

자신의 운명에 대한 저주를 들었다.

이 악마의 포위 속에서 단 한 번이라도

마음에 안일을 준 것은 그녀였다.

- 1921년 11월 26일 일기, <마음의 자취>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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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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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저는

이 심장 속 회오리 바람으로써

처음으로 아들이라는 울타리를 뛰어 넘었습니다.

- 1926년 6월 21일 수상록, <출가>에서

 

 

한편, 심덕은 가난한 집안에 4남매 중 둘째 딸로 태어나 조선 최초의 소프라노가 되기까지 쉼 없이 달려왔다. 어느 순간 집안의 가장이 되었지만, 부호와 스캔들에 휘말리면서 믿었던 가족에게 마저 배신감을 느끼고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다. 이와 동시에 경제적인 어려움도 함께 찾아오면서 심덕 역시 자신을 이해하고 다독여주는 우진에게서 작은 위로와 안식을 찾는다. 심덕이 죽기 전 작사한 사의 찬미의 노랫말엔 자신과 사회의 한계를 깨달은 허무함과 인생의 무의미함이 적나라하게 담겨있다.


 

광막한 광야에 달리는 인생아

너에 가는 곳 그 어데이냐

쓸쓸한 세상 험악한 고해에

너는 무엇을 찾으려 하느냐

눈물로 된 이 세상이

나 죽으면 고만 알까

행복 찾는 인생들아

너 찾는 것 허무

웃는 저 꽃과 우는 저 새들이

그 운명이 모두 다 같구나

삶에 열중한 가련한 인생아

너는 칼 우에 춤추는 자도다

허영에 빠져 날 뛰는 인생아

너 속였음을 네가 아느냐

세상에 것은 너의게 허무니

너 죽은 후는 모두 다 없도다

 

- 윤심덕 <사의 찬미>

 

 

이와 비슷한 맥락으로 우진은 죽기 전까지 꽤나 많은 죽음과 관련된 작품을 써왔다. 그가 죽던 해인 1926년 <난파>라는 소설에서 주인공은 현대의 서구적 가치관을 지닌 인물로써 유교적 구조에 갇힌 가족과 사회의 억압으로 처참히 몰락한다. 이는 당시 작가 자신의 모습을 완벽히 투영한 것으로 그가 바라온 삶의 이념과 다른 사람이 그에게 바라는 역할 사이에서 진정한 자신의 모습은 무너지고 있다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같은 해 <사와 생의 이론>에서는 조금 더 직접적으로 죽는 것과 사는 것에 대한 그의 생각을 표현했다. 

 

 

- 왜 살고 잇소.

- 죽을녀고.

 

- 그러면 남이 죽이거나

當身[당신]이 스스로 죽이기를 願[원]하오?

- 아니요.

 

- 왜?

- 사는 것이 죽음이 되는 일도 잇지만,

쥭음이 사는 수가 잇는

理致[이치] 가 잇는 것을 아오?

- 그럴 道˙ 理˙ [도리]도 잇겟지.

- 道理[도리]로 生覺[생각]해서는 안되오.

 

- 그러면?

- 삶이나 쥭음이나 道理[도리]가 아니요.

둘이 다 實狀[실상]은

生[생]의 兩面[양면]에 不過[불과]하오.

그러닛가 道理[도리]를 넘어서

生[생]의 核心[핵심]을 잡으러는 이에게는,

삶이나 쥭음이나 問題[문제]가 되지 안 소.

 

- 當身[당신]은 只今[지금] 살고 잇소?

- 아니요. 그러나 死[사]를 바래고 잇소. 참으로 살녀고.

 

- 김우진, 死[사]와 生[생]의 理論[이론]

 


두 청춘의 죽음을 정사, 또 불륜의 결말로 간주하여 부정적인 시선이 늘 함께 한다는 것을 안다. 다만, 나는 이들의 죽음에 대한 서사가 적어도 나에게만은 늘 같던 죽음의 무게와 다르게 느껴졌기 때문에 특별했다고 말하고 싶다. 그들이 남긴 몇 글자로 인해 하나의 뮤지컬이 탄생하고 또 하나의 드라마가 탄생한 것처럼 여러 사람으로 하여금 그들의 죽음에 대해 생각해보게 만든 것과 죽고 싶어서 죽은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살고 싶어서 죽음으로써 삶을 연장했을 그들의 현생에 대해 골똘히 생각해보게 만든 것이 그 특별함의 이유이다.

 

윤심덕이 발매한 “사의 찬미”는 당시 10만 장이라는 어마어마한 판매량을 기록했다. 이 사실은 그만큼 당시 윤심덕과 김우진과 같은 심정에 처한 사람들의 공감을 나타내는 것이 아닐까. 어쩌면 그들의 죽음은 단지 정사의 결말이 아니라 당시 사회의 유교적 도리와 새 시대를 향한 자신의 신념 사이에서 열렬히 싸웠던 청년들의 흔적으로 남아 지금까지 회자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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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요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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