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프로메테우스의 뿌리를 찾아서 [문화 전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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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메테우스와 ‘앞서서 생각하는 자’
: 『신통기』와 『결박된 프로메테우스』
필자가 그리스 로마 신화를 처음 접한 경로는 만화책이었다. 지금은 누가 그렸는지, 어느 출판사에 나왔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기는 하지만, 그리스 로마 신화에 대한 내 최초의 관심은 바로 그 만화책에서 시작되었다. 그렇게 총 스물 몇 권에 달하는 만화책을 독파해나가던 와중에, 나에게 조그만 의문이 떠올랐었던 것 같다. ‘이 많은 이야기들은 도대체 누가 만든 것일까?’ 물론 그 때는 이 의문을 가지기만 했었고, 실제로 해결하기 위해 무언가를 했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 의문이 제대로 대답된 때는 그 당시로부터 몇 년이 지나고 대학에 입학 한 이후 그리스 로마 신화와 관련된 교양 수업을 들었을 때였다. 우리가 대중적으로 접하는 그리스 로마 신화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여러 작가들이 창작했던 문헌에서 등장하는 이야기들을 신화 내적인 순서에 맞추어, 현대의 편집자가 하나의 이야기로 만들어 낸 것이었다. 그러니까 고대 그리스부터 로마에 이르기까지의 기간 동안 그 시대를 살아나갔던 많고도 많은 작가들이 구전으로만 떠돌던 신화의 내용을 각자의 의도와 예술적 목표에 따라 재구성하여 작품으로 써내었고, 그렇게 축적된 내용들이 지금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그리스 로마 신화를 구성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후 내 신화에 대한 관심은 ‘내가 알고 있었던 이야기가 어디에서 왔고 누구에 의해 쓰였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는 방향으로 기울었다. 오늘 필자가 쓸 글도 이와 관련된 것이다. 프로메테우스라는 이름을 다들 들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신들에게서 불을 훔쳐 인간에게 가져다 준 선량한 신, 제우스를 도와 티탄들과의 전쟁에서 승리하도록 도와준 티탄. 등등 아마 그리스 로마 신화 만화책을 읽어 보았다면 프로메테우스에 대해 이 정도로 알고 있을 것이다. 이 사실을 모른다고 해도 당신이 프로메테우스를 모르고 있을 것 같지는 않다. ‘프랑켄슈타인’이라는 소설을 들어 본 적이 있는가? 프랑켄슈타인의 부제가 바로 ‘현대의 프로메테우스(Modern Prometheus)다. 무한도전에도 등장했던 책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 기억하는가? 여기도 프로메테우스가 등장한다. 2012년에 개봉했던 에일리언의 프리퀄 영화 ’프로메테우스‘ 기억하는가? 여전히 우리 주변에 이렇게나 많은 프로메테우스가 돌아다닌다. 그렇다면 조금 궁금해지지 않는가? 프로메테우스는 어디서 처음 등장했는지, 그리고 누가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프로메테우스의 이미지를 만들었는지?
맞다. 무한도전의 그 책
프랑켄슈타인 - 모던 프로메테우스
리들리 스콧 - 프로메테우스
그렇지만 프로메테우스가 등장하는 최초의 문헌들을 찾고, 그 연대기를 쓴 다음, 그 내용들을 정리해서 늘어놓는 일은 이 짧은 글에서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그런 작업을 하려면 한 단행본이 필요할 것이라는 사실도 어렵지 않게 예측이 가능해 보인다. 그래서 이 글에서 내가 할 작업은 간단하다. 프로메테우스가 주요한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고대 그리스의 대표적인 문헌은 두 가지가 있다. 헤시오도스의 『신통기』와 아이스퀼로스의 『결박된 프로메테우스』이다. 이 두 문헌에서 각각 프로메테우스가 어떤 이미지로 등장하는지 살펴보고, 그 두 프로메테우스를 비교할 것이다. 그러나 이 비교를 통해 더 무언가를 글에서 성취하려고 하지는 않겠다. 그저 프로메테우스가 이 두 작품에 다르게 등장하였고, 어떻게 다르게 등장하였는지만을 보이는 것이 내 목표이다. 바라는 것이 있다면, 이 분석을 보고, 그리스 로마 신화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생각보다 재미있는 지적인 작업임을 독자들이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서론이 길었다.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들어가며
프로메테우스란 누구인가? 그의 이름을 살펴보는 것에서 시작해보자. 그의 이름은 보통 ‘앞서서 생각하는 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앞서서 생각하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도대체 무엇에 앞선다는 말인가? ‘앞서서 생각함’이란 말을 ‘남들보다 앞서서 생각함’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남들보다 꾀나 지혜가 뛰어나, 일을 생각지도 못한 방식으로 해결하거나, 기가 막힌 속임수를 고안해 내는 행위가 그렇다면 ‘앞서서 생각함’이란 행위일 것이다. ‘앞섬’이란 것을 시간적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미래의 어떤 일이 벌어질지 정확하게 예측하고, 그 예측이 이뤄질 것을 아는 것이 이 경우에는 ‘앞서서 생각함’일 것이다.
프로메테우스는 그렇다면 어떤‘앞서서 생각함’을 행하고 있을까. 헤시오도스와 아이스퀼로스의 두 작품- 『신통기』와 『결박된 프로메테우스』 -이 같은 프로메테우스 신화를 다루고 있으면서도, 프로메테우스에 대하여 전혀 상반된 서술을 하는 근본적 이유가 여기에 있다. 헤시오도스는 프로메테우스의 ‘앞서서 생각함’이란 교활함과 꾀를 바탕으로 남들이 생각하지 못하는 것을 생각해 내는 것이라 본다. 아이스퀼로스는 반대로 프로메테우스의 ‘앞서서 생각함’이란 미래가 도래하기 전에 먼저 그 미래를 생각해내는 것이라고 본다. 두 작품을 정리하면서, 이 생각의 흐름을 따라가보자.
『신통기』와 『결박된 프로메테우스』
신통기
먼저, 헤시오도스의 『신통기』에서 프로메테우스에 자세한 서술은 507행부터 616행까지, 총 100행에 걸쳐 이뤄진다. 이아페토스와 오케아노스의 딸 클뤼메네간의 자식이고, 형제로는 아틀라스와 메노이티오스 그리고 에피메테우스를 두었다(신통기507-512). 제우스는 프로메테우스를 사슬에 묶어, 독수리가 그의 간을 매일 쪼아먹도록 하였는데, 후에 헤라클레스가 그 독수릴 죽이고 프로메테우스를 구해줌으로써, 그는 이 형벌에서 해방된다(520-530). 프로메테우스가 이런 형벌을 받게 된 이유는 그가 제우스를 속였기 때문이다. 인간들이 신에게 제물을 바칠 때, 프로메테우스는 살코기와 기름기 많은 내장을 소의 위로 덮은 다음 소가죽에 싸서 내놓았고, 뼈와 쓸모 없는 부분들은 기름 조각으로 덮어 내놓았다. 제우스는 프로메테우스의 속임수를 알아챘지만, 알고도 뼈와 쓸모 없는 부분을 골랐다(535-555). 제우스는 이 기만에 대한 처벌로 인간들에게서 불을 빼앗았다. 그러자 프로메테우스는 불을 훔쳐 인간들에게 다시 돌려주었다. 더 화가 난 제우스는 인간들에게 더 큰 재앙을 선물하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그는 헤파이스토스와 아테네로 하여금 한 여성을 만들게 한다(570-590).
이 여성은 『신통기』에서는 더 이상 다루어지지 않지만, 헤시오도스의 다른 작품 『일과 나날들』에서 자세히 다루어 진다. 『일과 나날들』의 42행부터 105행까지가 프로메테우스와 이 여성(판도라) 간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제우스는 판도라를 온갖 나쁜 것이 담긴 항아리와 함께 프로메테우스의 동생 에피메테우스에게 선물로 준다. 프로메테우스는 에피메테우스에게 제우스의 선물을 받지 말라고 충고하였으나 그는 판도라를 받는다(일과 나날들, 80-90). 판도라가 항아리를 열자, 온갖 악한 것들(죽음이나, 병 같은 것들)이 항아리를 빠져 나와, 인간들의 세계에 만연하게 되었다.(95-105)
결박된 프로메테우스
아이스퀼로스의 『결박된 프로메테우스』는 작품 전체가 프로메테우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결박된 프로메테우스』에서 프로메테우스와 제우스의 대립을 중심으로 극이 진행된다. 둘이 대립하는 가장 큰 원인은 두 가지이다.프로메테우스가 제우스에게 반항하는 이유는 1. 인간을 말살하고 불을 거두려는 제우스의 불의한 계획에 분노했기 때문이고(230-235행) 2. 제우스가 권좌를 차지할 때 받았던 자신의 도움에 대해 배은망덕한 보답을 한 것에 분노했기 때문이다(220-225행). 마찬가지로 제우스는 프로메테우스가 자신의 권위에 도전한 것에 분노했기에, 그에게 끔찍한 고통을 가하고 있다. 프로메테우스는 제우스의 분노가 그치기 전까지 자신의 고통은 끝나지 않을 것이고 제우스에 대한 자신의 분노 또한 그치지 않을 것이라 말한다. 프로메테우스와 제우스 간의 갈등에는 그들의 분노가 중심에 자리하고 있다.
제우스와 프로메테우스의 대립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프로메테우스의 태도이다. 그는 제우스에 의해 바위산에 묶여 고통받고 있지만 언제나 확신에 차있다. 그는 ‘앞으로 있을 일들을 다 알고 있으며, 어떤 고통도 뜻밖에 나를 찾아오는 일은 없으리라’(결박된 프로메테우스, 104행) 고 자신 있게 선언한다. 자신이 ‘의도적으로 잘못을 저질렀고, 인간들을 도와 줌으로써 고난을 자초했다고 말한다.’(265) 그는 작품 내내 어떤 종류의 후회도 내비치지 않는다. 오히려 극이 진행될수록 그의 반항적 태도는 더 확고해진다.
그가 끊임없이 이어지는 고통에도 계속해서 제우스에게 반항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그가 미래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제우스가 자신의 아들에 의해서 왕위를 빼앗길 것이라는 비밀을 계속해서 숨기다, 이오에게만 살짝 귀띔해준다(760-770). 고통을 받아야 할 세월이 한참 남아 있기는 하지만, 결국에는 제우스가 자신의 운명을 피하기 위해서 자신을 풀어줄 수 밖에 없음을 또한 그는 확신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만이 ‘(제우스의)불행을 물리칠 방도를 말해 줄 수 있기’때문이고, 또 오직 그만이 ‘그 일이 어떻게 이루어 질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913-914).
『신통기』 - 교활한 사기꾼 프로메테우스
헤시오도스의 『신통기』에서 프로메테우스는 교활하고 영악한 사기꾼으로 묘사된다. 그러나 아무리 꾀 많고 교활한 사기꾼 프로메테우스라도 제우스의 전능한 힘 앞에서 도망칠 수 없었다. 프로메테우스는 제우스를 속여 보기 위해 온갖 꾀를 내지만, 결국 모든 일은 제우스의 뜻대로 이루어 졌다. 인간은 결국 판도라를 통하여 힘들고 괴로운 삶을 살게 되었고, 프로메테우스 자신은 제우스에게 반항한 죄로 바위에 묶여 영원히 독수리에게 간을 뜯어 먹히는 처벌을 받게 되었다. 후에 프로메테우스는 헤라클레스에 의하여 구원받았지만, 그 구원도 ‘제우스가 마다하지 않으셨기에’(『신통기』, 529행) 가능했다.
그렇다면 작가가 이 이야기를 통해 말하고자 했던 것이 무엇인가? 이 이야기를 마무리하고 있는 문장을 살펴보자.
“이렇듯 제우스의 마음을 속이거나 피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아페토스의 아들인 교활한 프로메테우스 조차 그분의 엄중한 노여움을 피하지 못하고 영리한데도 큰 사슬에 억지로 붙들려 있으니 말이다.”(『신통기』, 613-616)
이 이야기의 교훈은 명확해 보인다. 프로메테우스는 전능한 제우스에게 저항할 수 있을 만큼 용감하고, 교활했다. 그의 ‘앞서 생각함’의 능력은 심지어 신까지 속일 수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프로메테우스는 실패했다. 무엇이든지 이룰 수 있게 해줄 것 같았던 그의 ‘앞서 생각하는’ 능력도 제우스 앞에서는 무력할 뿐이다.
『결박된 프로메테우스』 - 제우스와 동등한, 혹은 더 위의
이 작품에서 프로메테우스는 제우스와 동등하거나 심지어 더 위에 위치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제우스는 티탄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프로메테우스의 지혜를 빌려야만 했다. 만약 그의 도움이 없었다면 제우스는 권좌를 차지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사실만으로 프로메테우스가 제우스와 동등한 위치에 서 있다고 말 할 수는 없다. 주인이 노예 없이 밥을 먹지 못한다고 해서 노예와 주인이 동등하다고 말 할 수 없는 것처럼, 단지 어떤 일을 하기 위해서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사실이 둘의 평등한 관계를 보장하지는 않는다.
프로메테우스와 제우스가 실제로 동등하게 묘사되고 있다는 결론은 그가 제우스에게 반항 할 수 있다는 사실에서 따라 나온다. 만약 주인이 노예에게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도록 시키지 못한다면 즉, 노예가 주인에게 반항할 수 있다면 더 이상 둘간의 권력 관계는 성립하지 않는다. 제우스는 프로메테우스를 바위에 묶고 그가 고분고분해지기를 바라지만, 그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는 오히려 정당하지 못한 법에 따라 권력을 행사하고 있는 제우스에게 더더욱 분노하며 그를 성토한다.
프로메테우스가 제우스에게 이처럼 반기를 들고 있었던 이유는 바로 그의 ‘앞서 생각하는’ 능력으로 제우스가 알지 못하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우스도 그 자신의 운명 앞에서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무력하다. 프로메테우스는 제우스가 자신의 아들에 의해 권좌에서 쫓겨날 미래를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제우스가 권좌를 지키기 위해 언젠가는 자신을 필요로 할 것이라는 사실도 역시 알고 있었다. 그는 ‘앞서 생각할’ 수 있었기에 제우스에게 저항할 수 있었다.
인간이란?
인간은 미래를 걱정한다. 미래를 걱정할 수 있기 때문에 인간인 것이다. 지금만이 아니라 언젠가를 생각할 수 있다. ‘앞서 생각하는 자’란 프로메테우스를 부르는 말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인간을 칭하는 말이기도 한 것이다. 그렇기에 이 단어에 대한 각 작가의 정의 내림은 그들이 지니고 있는 인간관을 드러낸다.
아이스퀼로스에게 인간은 속박과, 슬픔, 고통에도 불구하고 미래에 대한 희망과 믿음을 가지고 있는 존재이다. 인간이 그럴 수 있는 것은 자율적이며 마주하는 시련들을 그의 지성과 창조성을 통하여 극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당장은 고통스럽고 힘들더라도, 마지막에는 제우스와 같이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는 적들도, 인간의 의지 앞에서 무릎 꿇어야 할 것이다. 마치 헤라클레스가 프로메테우스를 구원해주듯이 말이다.
헤시오도스에게 인간이란 신에게 대항할 수 있을 만큼 용감하고 꾀 많은 존재이다. 마주한 시련들 앞에서 최대한의 지혜를 발휘하여 상황을 헤쳐나갈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한계가 명확한 존재이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제우스의 힘 앞에서 도망 갈 수 없다. 이해 할 수 없는 신의 의지 앞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몸을 웅크리고 엎드려 자비를 비는 것 밖에 없다. 오로지 신의 자비가 있을 때만, 헤라클레스의 화살이 간을 파먹는 독수리를 죽일 수 있을 것이다.
[김영진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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