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햄릿 아닌 오필리어의 이야기 - '햄릿, 죽은 자는 말이 없다'

오필리어가 등장하는 순간, 전혀 다른 이야기가 시작된다
글 입력 2019.10.02 0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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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은 세 사람의 세 가지 이야기를 담고 있다. 햄릿 배역을 맡은 배우, 오필리어를 연기하는 배우, 공연의 분장사. 이들은 독백을 통해 각자가 가진 고민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공연은 아주 공평하게 세 인물들에게 이야기할 시간을 내어주는 듯하다. 그러나 유일하게 구체성을 띠는, 가장 생생히 살아 숨쉬는 듯한 인물은 오필리어이기에 이 극의 제목에 오필리어가 들어가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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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의 포문을 여는 햄릿의 독백이 끝나고 등장한 오필리어, 정확히 말하면 오필리어 역을 맡은 배우는 분장을 받고 있다. 언뜻 보기에 그는 다른 두 인물과 아무 문제 없이 대화를 나누는 것처럼 보이지만 어딘가 편치 않은 모습이다. 오필리어 역의 여자 배우는 오늘따라 더 진하게 느껴지는 화장이 불편하고, 몸에 딱 붙는 화려한 드레스에 거부감을 느낀다.

 

그는 셰익스피어의 원작에서 오필리어라는 인물이 소비되는 방식에 문제를 제기한다. 다분히 여성혐오적인 시선으로 그려진 오필리어, 그가 보여주는 태도와 행동들에 의문을 품는다. 왜 오필리어는 주변의 남성들에게 들은 조언을 곧이곧대로 따르면서 그 남성들이 모두 사라진 다음에는 미쳐서 자살해야 하는 것인지, 왜 몇 분 되지도 않는 등장 장면들에서조차도 아름답고 화려한 미모를 뽐내야 하는 것인지.

 

놀랍게도 원작 속 오필리어가 겪는 문제는 지금, 2019년에 <햄릿>을 공연하는 여자 배우에게도 반복된다. 햄릿을 맡은 연상의 남자 배우는 오필리어를 연기하는 배우에게 잔심부름을 시키고, 난해한 조언을 하고, 훈련과 가르침을 명목으로 성추행을 저지른다. 이후 분노와 수치심에 휩싸인 채 독백을 이어가던 그는 원작 속 오필리어와 같이 강물에 누워 베일을 뒤집어쓰고 침묵을 택한다.

 

그의 독백은 왜 원작 속 오필리어와 같이 침묵으로 귀결되었을까. 오늘날의 오필리어 또한 침묵을 피할 수 없는 잔인한 현실에 놓여있음을 이야기하고자 한 것일까.


다음 장면에서 오필리어는 햄릿에게 소품용(이지만 사람을 다치게 할 수 있는) 칼을 겨눈다. 그것이 그들 사이에 잠시 간의 긴장감을 조성한다. 하지만 그는 이내 “소품 잘 챙기셔야죠”하고 칼을 돌려준다.


또다시 같은 문제에 직면해야 했던 지금의 오필리어는 어떤 선택을 한 것일까. 명확히 답할 수 없다. 다만 그는 의심했고, 부당한 현실에 대해 열변을 토했으며, 자신의 감정을 표출했다. 그는 연극이 진행되는 내내 뜨거운 열기를 갖고서 살아 숨쉬는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오필리어의 이야기 안에서 햄릿 배우와 분장사는 가해 남성, 그리고 그것을 방관했거나 문제의식조차 느끼지 못한 남성 구성원의 자리에 위치한다. 이로써 나는 더 이상 그들의 실존적 고민에 대해 함께 사유할 수 없다. 더 이상 햄릿의 비참함에 동조할 수 없고, 그들의 번뇌에 귀기울일 수 없다. 무대 위에 재현된 너무도 중대한, 현재진행형의 성폭력 문제는 다른 모든 이야기를 압도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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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을 만들어가는 이들의 고민은 원작 <햄릿> 속 인물들과 자주 겹쳐진다. 그리고 어느 순간 이들은 작중 인물에 투영된 자화상을 마주한다. 이 과정에서 공연장은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한쪽 벽면이 거울로 되어 있는 블랙박스형 극장 안에서 배우들은 자신을 비추는 거울과 마주한 채 내면을 들여다보고, 점점 더 깊이 빠져든다. 거울 안의 세계가 실재하면서 동시에 실재하지 않는 것처럼 이 극 안에서 원작 <햄릿>은 환영처럼 존재한다.



[김주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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