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구덩이에 빠졌을 때 [영화]

그 누구도 빗겨 갈 수 없는 '의심' 의 구덩이
글 입력 2019.10.01 0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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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심, 이 영화를 보고 나와 가장 최근에 내가 한 의심이 뭘까 생각해보았다. 여느 때와 같이 편의점에서 일을 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정장을 쓰리피스로 잘 차려입은 한 남성이 가게에 들어왔다. 그는 한 손에 휴대폰을 들고 에프에프(도시락,삼각김밥 등의 유통기한이 짧은 신선식품들) 매대 앞에 서서 한참을 위아래로 진열된 물건들을 훑어보았다. 끼니를 해결하러 들어온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는 무려 20분도 넘게 가게를 돌며 모든 매대를 오랫동안 들여다보았다.

순간 내 머릿속에는 다른 생각이 떠올랐다. 혹시 미스터리 쇼퍼인가?? 가게를 평가하러 온 건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던 나는 그 수수께끼의 손님이 비상 상비약 코너를 살피는 순간 확신했다. 본사에서 온 게 틀림없다.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리고 빠진 물건은 없는지 살피며 물건을 채웠다.

손님은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내가 생각하기에) 그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초코우유와 초콜릿 바를 골라 계산대로 왔다. 그리고 할인과 적립까지 야무지게 마치고 나서야 가게를 떠났다. 나는 친구에게 부산스럽게 메시지를 보냈다. '안사고 나가면 이상하니까 뭐라도 산 거 같아!!' 친구가 답장했다. '뭐가 그렇게 의심스러운 건데?' 나는 빠르게 키패드를 눌렀다. '그냥 모든 게 다!!!'

가게를 다녀간 수상한 손님이 진짜 미스터리 쇼퍼였는지는 알 수 없다. 내가 그 손님을 붙잡고 물어보지 않았으니 모든건 나의 추측이다. 물론 나의 추측이 맞았을 수도 있고, 그냥 혼자 북치고 장구 친 것 일수도 있다. 하지만 새삼 이렇게그 날의 일을 돌이켜 보니 드는 생각이 있다. 정말 의심이라는 불씨는 한번 생겨나면 어지간해서 꺼지지 않는구나.


*
이 글에는 줄거리를 포함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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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당혹스럽게 시작한다. 마리아 사랑병원의 엑스레이실에서 몰래 관계를 가지는 모습이 엑스레이 사진으로 찍히고, 다음날 병원의 광장 한가운데에 그 남사스러운 사진이 전시된다. 윤영은 그 엑스레이 사진 속 주인공이 자신과 남자친구일 것이라 짐작하고 병원을 그만두기로 마음먹는다. 그런데 이게 웬걸, 다음날 병원에 출근하니 자신과 부원장 경진을 제외한 병원 사람들이 모두 결근했다. 오직 윤영과 경진만 병원에 있다. 모두들 그 사진이 자신일 것이라는 생각에 병원에 나오지 않은 것이다.

경진은 윤영과 병원에 나오지 않는 사람들에게 전화를 하지만, 각자 나름의 결근 이유를 말한다. 경진은 엑스레이에 찍힐 수도 있는 것 아니냐며 사람들이 거짓말을 한다고 믿는다. 이에 윤영은 경진을 데리고 결근한 의사 중 한 명을 무작위로 찾아간다.


경진: 거짓말이라면요?

윤영: 의심만 키우겠죠.


돈 주고까지 대문을 열어서 들어간 그 의사의 집에는 의식을 잃고 쓰러져있는 의사가 있었다. 진짜 몸이 안 좋아 결근을 한 것이다. 다시 병원으로 돌아온 둘은 피투성이의 모습으로 치료를 요구하는 남자와 마주한다. 과도로 사과를 깎다가 이렇게 되었다며 횡설수설하는 남자를 일단 수술대에 눕힌 경진은 그의 몸에 박혀있던 총알을 꺼낸다. 그제서야 엽총으로 사냥을 하다가 다쳤다고 말을 바꾸는 남자를 보며 경진은 다시금 의심을 키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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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는 지속적으로 세 사람이 하게 되는 의심을 주제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별 직업 없이 여자친구인 윤영의 집에 얹혀사는 성원은 갑자기 도심에 나타난 싱크홀을 메꾸는 일을 갔다가 그녀가 사준 커플링을 잃어버린다.

한참 자괴감에 빠져있던 성원은 우연히 동료인 강섭의 발가락에 끼워져 있는 반지를 발견하고, 그가 자신의 커플링을 훔쳐 갔다고 확신한다. 그리고 영화는 의심의 불꽃을 관객에게 지핀다. 지갑을 잃어버린 강섭과 애매한 태도로 그를 방관하는 성원. 난처해하는 강섭을 지켜보던 성원은 잃어버린 지갑에 돈이 얼마나 들어 있었냐고 물어보며 자신이 그 돈을 줄 테니 반지를 달라고 한다.

하지만 12만원과 바꿔온 반지는 성원이 잃어버린 커플링이 아니었다. 약지에 들어가지 않는 반지에 성원은 한숨 쉬고, 관객은 의심한다. 강섭이 지갑을 잃어버린 것은 정말 우연인가? 아니면 성원이 만들어낸 필연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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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탁구하듯이 이리저리 핑퐁 되던 '의심'은 전 여자친구의 등장으로 마침내 윤영에게 향한다.


전 여자친구: 성원이한테 맞아본적 있어요?

윤영: 아니요?

전 여자친구: 난 있어요.


성원의 과거 이야기에 머리가 복잡해진 윤영은 경진에게 조언을 구하고, 경진은 성원에게 직접 물어보라는 대답을 해준다. 하지만 한번 자라난 의심의 불꽃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 결국엔 성원이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오해에 다 닿는다. 때마침 살던 집이 재개발 구역에 포함돼 이사를 앞두고 있던 윤영은 성원에게 새 집의 주소를 알려주지 않고 집을 떠난다.

얼마 뒤 윤영은 성원을 찾아가 전 여자친구에게 들은 이야기의 사실 여부를 묻는다. 돌아오는 성환의 대답에 윤영의 의심은 사실이 된다. 둘 사이에 흐르는 침묵에 관객은 조용히 침을 삼키고, 성환이 밟고 있던 땅이 꺼지면서 그는 씽크홀 속으로 떨어진다. 그 씽크홀 속을 들여다보는 윤영의 얼굴이 스크린 가득 채워지다가 영화는 끝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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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색감과 몽환적인 음악으로 유난히 판타지 영화의 분위기를 띄는 영화 <메기>는 반대로 아주 현실적인 주인공으로 엉뚱한 이야기를 풀어낸다. 또한 주인공 각자 다른 사연을 가지고 있지만 그들에게도 공통점이 있다. 세 사람 모두 의심을 '확인' 하려 하는 것 보다 의심을 '하는' 나에게 더 집중하고 있다는 것이다.

엔딩크레딧이 올라가면 이런저런 생각이 둥둥 떠오르긴 하지만, 그동안 나의 머릿속을 헤집고 떠나갔던 수많은 독립영화와 비교하자면 같은 독립영화의 갈래인 <메기>는 굉장히 직설적이다. 89분의 러닝타임 동안 관객에게 친절하게 '믿음' 에 대한 메타포를 전달하는 이 영화는 적당히 유쾌하다. 또한 영화의 이곳저곳 은근슬쩍 숨겨놓은 사회비판적 요소들은 잔잔한 여운을 남겨 마냥 유머러스한 영화는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구덩이에 빠졌을 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더 구덩이를 파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서 얼른 빠져나오는 일이다.


마지막 퐆스터.jpg
 

[김혜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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