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사적인 폭력] 06. 피해자가 피해자다울 수 없는 이유

언제나 검열 당하는 피해자들
글 입력 2019.09.23 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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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 피해자가 피해자다울 수 없는 이유



내게 초등학교 교실은 무엇보다 권력 관계가 뚜렷한 전쟁터였다. 그 권력 관계는 항상 일방적인 폭력과 복종, 가해자와 피해자를 낳았다. 그중에서 유독 집요하게 괴롭힘을 당했던 한 아이가 지금 내 머릿속에 떠오른다.

 

그 아이에게 맥락 없는 놀림과 물리적인 폭력은 일상이었다. 그리고 그 아이는 늘 그것들을 겪으면서 한 번도 그만하라고 한 적이 없었다. 당장 멈춰달라는 표정을 지으면서 말이다. 싫다는 말이 없어도 그 아이가 느꼈을 불쾌함은 모를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나를 포함한 교실에 있는 아이들 모두 필사적으로 모른 척했다.

 

그러던 어느 날, 책 읽으러 간 텅 빈 도서관 구석에서 담임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누군가를 달래면서도 다그치는 목소리였다. 호기심에 천천히 다가가자 묵묵히 고개 숙인 채 선생님의 말씀을 듣는 그 아이가 보였다. 선생님이 하는 말은 정리하면 다음과 같았다. 다음부터는 싫다고 말해라. 언제까지고 참기만 할 거냐. 선생님은 분명 제자를 위해서 하신 말씀일 테지만, 그 말은 초등학생인 내가 듣기에도 황당했다. 설마 그 아이가 그걸 모르겠는가, 그게 가능하면 진작에 그러지 않았겠는가. 이렇게 생각하면서 조용히 도서관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그런 일이 있었는지도 잊었을 무렵, 선생님은 그 아이를 향해 똑같은 말을 반복하셨다. 이번엔 조용히 빠져나올 필요가 없었다. 반 아이들이 모두 보는 앞에서 큰소리로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가해자의 폭력을 왜 장난이라고 옹호하느냐고, 대체 왜 당하고만 사냐고, 계속 몰래 주의 줬었는데 이젠 못 그러겠다고. 심지어 바보 천치냐는 말까지 나왔다.

 

그 당시 나는 너무 어렸다. 그리고 선생님과 그 아이 사이에 내가 모르는 일도 많았을 것이다. 그러니 분명 내가 모르는 선생님 나름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반 아이들 앞에서 피해자에게 역정을 내는 행동은 내 기준으론 이해할 수 없었다. 고개를 돌려 가해자를 바라보았다. 그는 그저 멋쩍은 표정으로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다시 고개를 돌려 정면을 바라보았다. 그 아이는 그때 도서관에서 그랬던 것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나는 그게 이 교실만의 특이한 상황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에도 계속 비슷한 모습이 보였다. 피해자는 고개 숙이고 가해자는 외면하고 제삼자가 피해자에게 다그치는 모습.

 

피해자는 말 그대로 피해를 본 사람이다. 해당 상황은 모두 가해자가 초래한 결과이다. 그러니 피해자는 아무런 잘못이 없고, 피해 사실만으로 사람들에게 보호받아야 한다. 하지만 이 한국 사회에서 피해자는 자격증 시험을 거치게 된다. 정말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는지, 당하는 동안 저항은 했는지, 일을 당한 후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해졌는지 등 많은 질문을 통과해야 비로소 피해자로 인정받을 수 있다.

 

피해자를 검열하는 태도가 옳지 않다는 건 당연한 사실이다. 나도 항상 다른 사람들에게 힘주어 말하는 부분이다. 그러나 그럴 때도 나는 피해자들을 타자화했다. 나도 얼마든지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은 안 한 채 내가 마땅히 좋게 봐주어야 할 대상으로만 생각하고 진심으로 공감하지 못했다. 공공장소에서 성추행을 당했을 때 놀라서 아무 말도 못 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그리며 ‘나는 크게 소리 지르고 저항해야지.’ ‘똑바로 대처해야지.’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실제로 그 상황에 맞닥뜨리게 됐을 때, 나는 그 생각을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긴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지하철역으로 올라가던 중이었다. 계단을 오르는 줄과 가만히 서 있는 줄 두 개 중 나는 후자를 선택했다. 뒤에 있는 지인과 이야기 나누며 지상으로 도착하기만을 기다리던 그때, 사람이 드문 옆줄에서 누군가가 몸을 휘청거렸다. 겨우 중심을 잡은 그 사람의 손은 내 엉덩이에 놓여 있었다. 너무 놀라서 정상적인 사고가 불가능했다. 손을 떼 내기 위해 몸을 돌려보았지만, 그 사람은 중심을 잡은 지 꽤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몸을 돌리는데도 불구하고 손을 거두지 않았다.

 

상황은 내 뒤에 있던 지인이 그 사람의 팔을 치는 것으로 끝이 났다. 지금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파악하기도 전에 에스컬레이터는 우리들을 지상으로 내몰았고, 그 사람은 제대로 된 사과도 없이 지하철역의 수많은 사람 사이로 자취를 감췄다. 그제야 혼란스러운 상황이 머릿속에서 정리되기 시작했다. 그 사람은 일부러 그런 것이고, 나는 추행 당한 것이었다. 에스컬레이터에서의 나는 너무 놀라서 순간 ‘정말 중심을 못 잡아서 실수로 그랬구나.’라는 황당한 판단을 내렸었다.

 

뒤늦은 깨달음 뒤에 찾아온 건 허무함이었다. 가해자는 이미 한참 전에 사라졌고 나의 분노는 갈 곳을 잃었다. 엄연한 추행을 당했음에도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는 자괴감에 그 자리에서 펑펑 울었다. 모든 게 다 화나고 서러웠다. 대체 그 사람은 왜 그랬는지, 그 상황에서 왜 내 판단력은 기능을 상실했는지 등등 온갖 생각들이 머릿속을 헤집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나를 서럽게 만들었던 생각은 ‘나는 그저 에스컬레이터를 탔을 뿐인데 왜 이런 봉변을 당해야 하나.’였다.

 

그날의 경험으로 피해자에게 ‘처신을 잘했어야지’, ‘싫다고 말했어야지’라고 말하는 게 얼마나 무의미한지 몸소 깨달았다. 그 상황에서 사람들이 요구하는 대로 행동할 수 있는 피해자는 거의 없다. 초등학교 때 그 아이처럼 권력 관계에 의해 말을 못 할 수도 있고, 나처럼 내가 당한 게 범죄인지 아닌지 판단조차 하지 못해서 말을 못 할 수도 있다.

 

중요한 건 피해자의 행동이 아니라 가해자의 행동이다. 피해자는 가해자가 끼어들지만 않았으면 평범한 일상을 이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인터넷 뉴스 댓글을 보면 이 세상엔 여전히 가해자의 범행 동기를 항상 피해자에게서 찾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분명 누군가는 그건 그 사람 개인의 인성 문제 아니냐고 말할 것이다. 그렇다. 그런 댓글을 다는 사람들의 인성은 대개 알만한 수준이다. 그런데 똑같이 말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닌데, 모니터 밖에서도 떠돌아다니는데 꾸역꾸역 개인의 문제라고 주장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성교육 시간에 대처 방법이랍시고 ‘싫어요.’ ‘안 돼요.’, ‘하지 마세요.’ 따위의 말만 주문처럼 외게 하는, 따돌림 예방법이랍시고 행동을 똑바로 하라고 말하는 사회의 탓은 정말 없는 걸까.



[진금미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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