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SS] 그리고 두개골이 있었다 - 피부밑 두개골 [도서]

정통 추리소설의 고전적 아름다움
글 입력 2019.09.18 2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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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살인을 저지르는 이유는 둘 중에 하나였다. 사랑, 아니면 돈. 따라서 범인은 면식범일 가능성이 높았고, 경찰은 가장 먼저 피해자 주변 인물의 알리바이와 살해 동기를 살폈다. 범인을 잡기 위해선 범죄 현장의 증거와 목격자 증언을 토대로 사건을 재구성하고, 그들 사이의 사소한 불일치를 발견해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추리 소설 또한 풍부한 인물 설정, 조심스럽게 깔린 복선, 그럴듯한 살해 동기와 치밀한 사건 구성을 통해 이러한 현실을 재현해내는데 집중했으며, 독자는 작가가 떨어뜨린 빵조각을 따라 범인으로 향하는 야릇하고도 흥미로운 여정을 떠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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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80년대 연쇄 살인범의 이야기가 전 세계적으로 유명세를 얻으면서 범죄를 다루는 드라마나 영화, 소설의 모습도 그에 맞춰 변했다. 아가사 크리스티, 앨러리 퀸 등으로 대변되는 통속적 추리 소설의 시대는 저물고, 범죄 소설이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최근 인기 있는 범죄 소설에는 적어도 두 명 이상의 시체가 묘사만으로 속을 게워내고 싶은 충동이 솟는 상태로 등장하고, 형사가 심리 프로파일링 기법을 이용하여 살인범을 잡는 전개가 주를 이룬다. 후더닛(Who done it?)이라는 추리 소설의 기본 틀은 그대로지만, 정작 '살인범이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살해 방식이 참신하고 역겨울수록, 등장하는 수사기법이 다양할수록 인기를 얻을 뿐이다. 여기에 주인공과 살인범 사이의 팽팽한 신경전과 속도감 있는 전개 과정까지 곁들여지면, 짜잔! 베스트셀러가 완성된다.

 

눈을 뗄 수 없는 전개에 500페이지가 넘는 소설이 하루 만에 끝이 나지만, 읽고 난 후 머릿속에는 조각난 시체의 소리 없는 아우성만이 메아리친다. 결말에 이르러서야 범인이 처음 등장하니 독자가 추리를 하고 말고 할 것도 없다. 피해자를 위한 입체적인 배경 설정도 무의미하다. 어차피 범인은 범죄의 순간이 돼서야 피해자를 처음 봤을 것이고,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수사에 영향을 미칠 정도는 아니다. 현장 증거와 목격자 증언이라는 퍼즐 조각은 전체 그림의 아주 일부분에 불과하다. 그러나 걱정할 필요는 없다. 어차피 빈자리는 작가가 수년간의 취재로 얻은 경찰 지식이 차지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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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부밑 두개골>의 작가 P.D 제임스



자, 서론이 길었다. 이제 평소에 추리 소설을 잘 읽지 않는 사람들도 추리 소설 애호가들이 왜 그토록 정통 추리 소설의 부활을 기다려왔는지 대충 감이 잡힐 것이다. <피부밑 두개골>은 범람하는 범죄 소설의 홍수에서 고고하게 전통 추리 소설의 고전적인 아름다움을 뽐내는 작품이다. 아가사 크리스티를 연상시키는 구성과 제인 오스틴이 떠오르는 인물 설정, 그리고 P.D 제임스만의 유려한 문체까지. 추리 소설이 갖출 수 있는 모든 장점을 한데 모아 <피부밑 두개골>은 조각난 시체에 질린 독자의 마음을 촉촉이 적신다.

 

<피부밑 두개골>의 고전적인 아름다움은 작품의 배경에서부터 시작된다. 빅토리아 시대 성에서 드레스를 입고 17세기 연극을 연기하는 배우와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 고용된 사립탐정, 연극 인용문으로 가득한 협박편지, 외딴섬과 섬의 주인을 섬기는 하인 부부……. <피부밑 두개골>을 읽다 보면 소설의 배경이 마이클 잭슨이 한 창 활동하던 80년대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고전적인 정취에 푹 빠지게 된다. 이는 자연스럽게 산업 혁명 당시의 침착하면서도 동요하는, 예의를 차리면서도 기만적인 분위기를 형성하는데,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코시섬의 두개골은 은밀한 계급 간의 분화-당연하게도 신분보다는 자본에 의해 나눠진-, 장막에 가려져 의중을 알 수 없는 대화를 통해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 균열의 신호를 알린다.


소설의 고전적인 분위기에는 인물의 연극적인 어조도 한 몫한다. 그러나 여기서 연극적인 어조라는 것은 부자연스럽게 과장된 표현이나 낡고 촌스러운 말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피부밑 두개골> 속 인물들의 극적인 말투는 배경 설정과 마찬가지로 영국 특유의 체면치레와 위선적인 속성들을 더욱 분명하게 드러내면서 소설의 통속적인 구조에 생기를 불어넣고, 소설에 우아한 무게감을 부여한다. 누가 살인범인가? 소설 속 인물들은 저마다의 살인범을 마음에 품고 있지만, 절대 겉으로 드러내는 법이 없다. 독자는 연극처럼 의도적으로 구성된 대화 사이를 헤매면서 살얼음과도 같은 관계를 누가 하나 깨뜨리지는 않을지 숨죽인 채 지켜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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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리아 시대 성


추리 소설은 말 그대로 독자가 작가의 창조한 범죄 세계 속 범인을 '추리'해나가는 소설이다. 너무 많은 사람이 등장하면 독자가 이야기를 따라가기 어렵고, 살인 용의자를 열 명 내외로 추릴 수 있으려면 한정된 공간에서 이야기가 진행되는 것이 좋다. <피부밑 두개골>은 코시섬이라는 한정된 공간 안에서 저마다의 살해 동기를 가진 11명의 사람이 모여 사건이 전개되는, 전형적인 후더닛 추리 소설이다. 그렇기에, 작가는 할 수 있는 한 사건의 모든 면을 세세하게 독자에게 전달해야 한다. 자칫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결국 그런 사소한 것들이 모여 살인범의 정체를 밝힌 중요한 단서가 되기 때문이다.


좀 더 현대적으로 설명하자면, <피부밑 두개골>은 독자의 머릿속에서 진행되는 글자로 구성된 방탈출이다. 제임스는 명확하지만 눈에 잘 띄지 않는 복선, 주인공 코델리아 그레이의 추리를 통한 힌트, 그리고 의미심장한 인용문을 조금씩 쌓아 올려 종국에는 거대한 소용돌이 속으로 독자를 인도한다. 눈을 뜨고 보면 소용돌이는 임의적인 사건이 마구 뒤섞인 재앙이지만, 눈을 감고 보면 그것은 사소한 사건과 운명 같은 우연이 논리적으로 얽혀 발생한 필연적인 결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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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피부밑 두개골>의 구조와 스토리 텔링 기법에 주목했다면, 이제는 P.D 제임스에 문학성에 주목할 차례다. P.D 제임스의 묘사는 사진보다 정확하고, 그림보다 아름답다. 사진은 바람의 뺨에 닿았을 때의 거친 정도를 알려줄 수 없고, 그 어떤 그림도 순간적으로 눈동자에 비친 슬픔만큼 아름답지 않다. 오직 문학만이, 이 두 가지를 동시에 해낼 수 있는 훌륭한 매체다. 삶의 통찰을 담은 우아한 대사들은 또 어떤가. P.D 제임스의 소설을 읽고 있노라면 소위 순문학과 장르 문학이라는 경계가 얼마나 터무니없는 것인지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


적재적소에 배치된 연극 인용문들도 <피부밑 두개골>만의 매력이다. 인용문만큼 간접적이면서도 직관적으로, 비밀스러우면서도 눈에 띄는 것이 있을까? 추리 소설과 인용문은 떼려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지만, 정말 문학에 애정을 갖고 인용문을 쓰는 작가를 찾아보기 어렵다. 그러나 P.D 제임스는 연극이라는 소재를 누구보다 잘 이용할 줄 아는 작가였고, 그녀의 실력은 <피부밑 두개골>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된다. 출판사 서평대로, <피부밑 두개골>에는 피 대신 <리어왕>이 낭자하게 흘러내리지 않는가.


입체적이고 풍부한 인물 설정은 살인범을 밝혀내는 것을 떠나서 소설 그 자체에 집중하게 해주는 중요한 요소다. 달리 말해 인물들이 생생히 살아 움직이기만 한다면, 사건이 긴박하게 전개되지 않아도 소설을 매력적으로 만든다. 추리 소설, 특히 후더닛 소설을 쓸 때, 사건의 트릭과 반전 등에 너무 집중한 나머지 인물 설정을 소홀히 하는 작가가 많다. 그러나 추리 소설은 보드게임 클루(Clue)가 아니다. 무릇 훌륭한 추리 소설 작가라면 직업이나 성별 같은 피상적인 특징 외에도 인물의 결핍과 트라우마를 볼 줄 알아야 한다. <피부밑 두개골>은 주인공 코델리아 그레이부터 비중이 적은 하인 문터에 이르기까지 모든 등장인물의 인물 설정에 공을 들인 작품이다. 책장을 넘기다 보면 그들의 생생한 숨결이 머리카락을 흩날리는 듯한 착각이 든다.


한마디로, <피부밑 두개골>은 풍부한 인물 설정과 흥미로운 복선, 그럴듯한 살해 동기와 치밀한 사건 구성을 모두 갖춘 정통 추리 소설의 이상향이라 할 수 있다. 그러니 오늘은 다른 일을 제쳐두고 <피부밑 두개골>의 매력에 푹 빠져보는 것은 어떨까. 그곳에는 추리 소설의 탈을 쓴 인간의 기묘한 욕망과 부조리한 관계, 넘쳐흐르는 셰익스피어의 거대한 소용돌이가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이렇게 외치고 있을 것이다.



"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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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나경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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