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발화와 의도의 이분법을 넘어 [문화 전반]

왜 너는 말을 그렇게 해?
글 입력 2019.09.15 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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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얼마 전 이었다. 오랜만에 불규칙한 생활패턴에서 벗어나 아침 7시 정각에 기상하여 책이나 한 권 읽으며 아침 시간의 여유를 즐기고 있었던 때였다. 그런데 뜬금없게도, 8시쯤 이었나, 갑자기 친구한테 카카오톡이 하나 오더라. 아침 8시에 갑자기 지금 전화가 가능하냐고 물어보는 카톡이었다. 그 때부터 머리가 마구 돌아가기 시작했다. 내가 이 친구한테 안 갚은 돈이 있었나? 아니면 뭐 잘못한 일이 있었나? 아니면 무슨 일 있나? 이 시간에? 온 갖 질문이 내 머릿속을 떠다니기 시작했다. 이 친구가 나에게 전화를 할 이유가 도대체 무엇인지에 대해서 추론해내는 작업을 하며 조심스럽게 카카오톡을 확인했다. 1이 없어지자마자 핸드폰 화면이 휙 전환되면서 전화가 걸려 왔더니 화면이 떴고, 심호흡을 고르며 ‘그래 일단 부딪혀 보자’라는 마음으로 통화 아이콘을 옆으로 밀어서 전화를 받았다. 전화를 받자마자 들려온 것은 친구의 격앙된 목소리와 다음과 같은 말이었다. “야, 내가 말을 그렇게나 공격적으로 하냐?”


아아, 아마 어디선가 분쟁을 겪고, 그 억울함을 성토하기 위해 전화한 것이구나. 안심을 하고 일단 자초지종을 물었다. 친구는 오랫동안 친하게 지냈던 자신의 친구들과 마찰이 있었고, 그 마찰이 혹시 자신이 평소에 지니고 있었던 날카로운, 혹은 공격적인 말투 때문에 일어난 일인가 걱정하고 있었다. 친구가 고백하기를, 항상 자신의 의도와는 다르게 자신의 말이 받아들여지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항상 ‘왜 너는 말을 그렇게 해?’라는 질타를 주변에서 많이 받아 왔으며, 이번 분쟁마저도 그 연장선이 아닌가 싶은 마음에 너무나 걱정이 된다고 말했다.


친구의 이야기는 친구의 이야기이고, 생각을 한 번 해보자. 사실 ‘말 좀 예쁘게 해라’나 ‘너는 같은 말을 왜 그렇게 기분 나쁘게 하니’ 라던지 ‘아 다르고 어 다르다’라는 말들이 우리 일상에 너무나 자명한 진리처럼 자리 잡은 것 같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의도를 상대가 오해하지 않게 예쁘고, 신경을 거스르지 않는 발화를 통해 전달하기 위해 고민하고 노력하고 있다. 나는 여기서 발칙한 주장을 하나 해보려고 한다. 나는 이런 말들이 모두 발화와 의도에 대한 왜곡된 상에 의해 생겨난 문제들이라고 생각한다. 분리될 수 없는 발화와 의도를 마치 칼로 무 자르 듯 둘로 나눠질 수 있는 것으로 사고하고, 이를 바탕으로 발화와 의도의 불일치가 문제인 듯 여기는, 발화와 의도의 이분법이 모든 문제의 근원이라고 주장하려고 한다.


이 주장을 펼치기 위해서 나는 먼저 발화와 의도의 이분법이 발생시키는 문제가 무엇인지 정확히 밝힐 것이다. 규명의 과정에서 드러날 것이지만, 이 문제는 단순히 우리가 마주하는 일상적인 어려움에 대한 것이다. 이후 실제로 발화와 의도의 이분법이 인간 소통에 대한 왜곡된 형이상학적인 상임을 간단히 보이고, 어떤 극복이 가능한지 살펴 볼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극복이 가지는 함축을 온전하게 다룰 수는 없겠지만, 처음에 의도와 발화의 이분법에서 발생하던 문제가 어떻게 이 극복을 통해 해결되었는지 살피겠다.



 

1.



발화와 의도의 이분법이 폭넓게 받아들여지는 이유는 아마 많은 사람들의 사고 기저에 깔린 어떤 강력한 직관 때문일 것이다. 그 직관이란, 우리의 마음속에 사적이고 내밀한 의도가 존재하고, 그 의도가 바깥으로, 타인과 공유될 수 있다는 의미에서의 공공성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언어를 통해 전달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슨, 우리 마음 안에 존재하는 심적 내용(Mental content)가 선행하고, 그 심적 내용을 우리가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전달한다는 아주 기본적이고 직관적인 생각이 우리 사고 기저에 깔려 있기에, 발화의 의도의 이분법이 성립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직관은 자명해 보인다. 우리는 자명하게 우리가 생각하고 느끼는 것을 말한다고 생각하지, 그 반대는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이 직관 위에서 성립하는 발화와 의도의 이분법은 더 나아가 소통과 대화에 관한 어떤 일반적인 모델을 제시한다. 소통은 언어를 통하여, 혹은 발화를 통하여 우리의 심적 내용(mental content)를 타인에게 전달하는 과정인 것이다. 소통의 가장 근본적인 요소를 두 가지, 심적 내용과, 발화로 분석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모델이 문제적인 이유는 소통의 실패를 근본적으로 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모델 내에서 소통의 실패는 심적 내용(의도)와 언어(발화) 간의 불일치로 인해 일어난다. 해결은 의도와 발화를 일치시킴으로써 성취된다. 내가 하려고 했던 말이 적절한 발화를 통해 제대로 전달되는 경우 그리고 오직 그 경우에만 성공적 소통이 이루어진다. 여기서 요구되는 것은 심적 내용과 언어의 동일성이다. 그런데, 성공적 소통을 위해서 요구되는 이 동일성의 가능성이 이 모델 내에서 근본적으로 제한되고 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이 모델 내에서 심적 내용은 지극히 개인적이고 내밀한 심적 속성이다. 언어는 공공성을 지니고, 타인과 공유될 수 있으며, 어느 정도 물리적인 속성(글자, 소리)을 지니고 있다. 어떻게 우리의 마음속에서만 존재하는 심적 내용과 언어가 동일성을 지닐 수 있겠는가? 소통의 근본적 요소를 둘로 나누어 분석하는 이상, 성공적 소통의 필요조건인 발화와 의도의 일치는 애초에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2.



약간 다른 이야기를 해보자. 미국의 미디어학자인 마셜 맥루한이 오래 전에 확실하게 지적한 것처럼 미디어는 우리의 인식을 결정한다. 이런 경우를 상상해보자. 동일한 사건을 한 명에겐 신문으로, 한 명에겐 티비 뉴스로, 한 명에겐 인터넷 뉴스로 전달했다. 이 셋은 하나의 사건에 대해 동일한 이해를 보여줄까? 애초에 그들이 동일한 사건을 전달받은 것은 맞기는 할까? 맥루한이 미디어는 메시지라고 자신 있게 주장했을 때는, 바로 이런 경우를 염두에 둔 것이다. 우리가 얻는 지식, 정보는 우리에게 전달되는 경로인 미디어를 배제한 채로 순수하게 존재하지 않는다. 항상 정보는 무언가의 매개를 통해 우리에게 전달될 수 밖에 없고, 어떤 의미에서 항상 매개에 의해 오염받은 상태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정보 그 자체, 의도 그 자체는 오로지 개념적으로만 사고되고, 상정될 수밖에 없다. 실제로 소통이 이뤄지는 현실에서 사용되는 ‘정보’ 혹은 ‘의도’라는 그 단어 안에는 이미 그 것이 전달 되는 방식에 대한 고려가 이미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도 고려해보자. 정확하게 같은 문장과 글자를 가지고 있는 소설이 두 권 있다. 다른 것이라면 한 소설은 글자의 크기가 (한글 기준)300pt로 설정되어 있어서 한 페이지에 많아보았자 두 글자 이상이 들어가지 못하는 방식으로 편집되었다. 다른 소설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소설과 비슷한 방식으로 편집된 책이다. 이 두 권의 책은 내용의 측면에서 보면 정말로 동일한 책이다. 정확하게 동일한 문장과 의미로 구성되어 있기에 그렇다. 그렇다면, 이 두 책을 읽는 독자들은 두 권의 책에서 같은 독서경험을 할 까? 내 직관에는 그렇지 않아 보인다. 아마 전자의 책을 읽고는 이해조차 제대로 못할 가능성이 커 보인다. 이런 예는 어떤가. 동일한 그림이 두 개 있다. 한 그림은 굉장히 고풍스러운 액자에 담겨 전시되어 있고, 다른 한 그림은 액자 없이 벽에 고정하기 위해 노란색 박스테이프가 덕지덕지 붙어 있는채로 전시되어 있다. 이 두 그림은 정말로 같은 그림인가? 두 그림은 관람자에게 같은 경험을 불러일으킬 것인가? 이 역시 의심스럽다.


이 두 예시를 통해 말하려는 것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형식과 내용을 너무나 자연스럽게 분리한다. 어떤 예술 작품이 담고 있는 내용이 있고, 그 내용은 각 예술 형태의 형식에 맞게 적절하게 표현된다는 직관이다. 그러나 조금만 자세히 생각해보자. 과연 어디까지가 내용이고, 어디까지가 형식인가? 캔버스에 그려진 풍경은 내용이고, 액자는 형식인가? 위에서 어떤 액자를 가지고 있는지 여부가 그림의 내용을 결정함을 확인했지 않은가? 그렇다면 액자 바깥에 있는 그림이 전시되어 있는 공간부터가 형식인가? 그런데 생각해보면 어디에 전시되어 있는지에 따라서 또한 그림의 소위 ‘내용’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지 않는가? 어디서 내용이 끝나고 형식이 시작되는가? 어디서부터 예술이 끝나고, 현실이 시작하는가? 어디서 현실이 종적을 감추고 예술이 모습을 드러내는가? 그 경계는 도저히 확정할 수 없어 보인다.


인간 소통에 있어서 발화와 의도도 마찬가지이다. 발화와 의도를 둘로 나눔으로 발생한 메울 수 없는 간극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말을 예쁘게 하라“는 충고는 그래서 잘못되었다. 이 조언은 자신의 의도가 발화에 오해받지 않게 담길 수 있도록 노력하라고 우리에게 제언한다. 그러나 어디부터가 발화이고, 어디까지가 의도인가? 의도를 전달하지 못하는 발화는 실패한 발화이고, 제대로 전달한 발화는 성공한 발화인가? 위의 두 가지 예에서 추론할 수 있는 것은 발화는 그 자체로 의도이고, 발화와 의도 사이의 경계는 명확하게 지어질 수 없다는 사실이다.

 

또 다른 문제를 하나 생각해보자. 발화와 의도의 이분법이 제시하고 있는 소통의 모델을 도식화 시켜서 보자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의도(발화자) → 발화 청자


    

청자가 직접적으로 지각하는 것은 발화자의 발화이다. 그리고 발화는 의도와 대응되기 때문에, 혹은 발화가 의도를 표상하기에, 소통이 가능해진다. 발화가 만약 발화자의 의도와 적절하게 대응하고 있다면, 성공적인 소통이 이루어지는 것이고,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소통이 실패하는 것이다.

  

이 도식의 어려움이 있다면, 발화와 의도 간의 대응 관계가 도대체 어떻게 성립되는지가 제대로 규명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청자는 발화를 감각을 통해 직접적으로 인식한다. 그리고 그렇게 인식된 발화에 대응되는 의도를 알아봄으로써, 소통에 참여한다. 그런데 생각해보자. 청자가 감각적으로 인식하는 발화는 물리적인 존재자이다. 여기서 물리적이라는 말은 정신적이라는 말의 반대 의미로 사용되었다. 실제로 우리의 감각의 대상이 될 수 있는 대상들거나, 물리학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들이 바로 물리적인 것들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지금까지 인간의 의도를 다루는 물리학을 접하지 못했고, 그렇기에 물리학의 대상이 아니며, 따라서 물리적인 대상이 아니라고 믿는다. 발화는 물리적인 것이고, 의도는 비물리적인 것이다. 대응을 맺는다는 것은, 두 대상이 어떤 관계를 맺는 것을 의미하는데, 여기서 대응은 그저 아무 종류의 대응일 수 없다. 발화와 의도가 가지고 있는 강력한 의미적 상관 관계를 매개하기 위해서는 그 관계는 인과 관계가 되어야 할 것이다. 어떤 의도가 인과적으로 특정 발화를 발생시키고, 그런 의미에서 둘은 의미적 인과관계를 가지고 대응한다.


여기서 심각하게 의문스러운 지점은 과연, 심리적인 대상과, 물리적인 대상이 정말로 인과적 관계를 맺을 수 있냐는 것이다. 이 문제는 굉장히 논쟁적인 것으로, 이 글에서 쉽게 답을 내릴 수는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비물리적인 것과 물리적인 것이 진정으로 인과관계를 맺을 수 있다면, 우리가 익숙해져 있는 과학적 사고는 그 뿌리부터 뒤바뀌어야 할 것이다. 물리학은 심리학이 되어야 할 것이고, 더 나아가 모든 인간의 정신 활동과 심리 상태를 서술할 수 있는 사실상 세계의 모든 것에 대한 이론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필자에게 이 함축은 그저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어려운 논제이다. 현대인으로써 가지고 있는 과학적 사고관과 직관에 크게 반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이 논제가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사람에게 증명의 부담이 있다고 믿는다.




3.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발화가 어쩌구, 의도가 어쩌구 위에서 열심히 떠들었지만, 가장 중요한 사실인 ‘소통이 실패한다’는 문제는 전혀 해결된 것이 없지 않은가? 그리고 발화와 의도의 구분을 포기 할 경우, 인간 소통의 실패를 어떻게 포착할 것인지도 큰 의문으로 남는다. 사실 말하자면, 필자도 명쾌한 해답을 지니고 있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제시 되던 이분법이 가리고 있던 사실, 발화와 의도가 분리될 수 없는, 그리고 애초에 분리되어 있지 않은 한 덩어리의 소통 요소였다는 것을 유념하고 소통에 임한다면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소통의 실패’라는 문제에 새로운 시각으로 접근해 볼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이번 장에서는 간단하게 발화와 의도라는 구분을 철폐하는 것으로 얻을 수 있는 새로운 관점과 그에 따른 실천적인 지침들을 살펴볼 것이다.


발화와 의도 구분 앞에서 실패한 소통의 책임 소지는 적절하지 못한 발화 방식을 사용한 발화자나, 발화에 대한 잘못된 해석을 적용한 청자에게 돌아간다. 그리고 소통의 실패의 잘잘못을 따지는 것은 그 쓸모가 거의 없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다툼에서 굉장히 중요한 쟁점이 된다. 간단히 상상해보라. ‘너는 왜 말을 그렇게 해?’라고 누가 묻는다면, 상대는 ‘너는 왜 말을 그렇게 알아들어?’라고 되받아칠 것 아닌가? 그리고 이 의견 불일치는 대부분의 다툼에서 전혀 좁혀지지 않은 채로 끝나고는 한다(최소한 내 경험상은 그렇다). 발화자는 발화자 나름대로 억울할 것 아닌가. 나는 이런 의도를 이렇게 말해서 전달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했는데, 청자가 왜 그렇게 안 이해해 주는지 화가 날 것이다. 청자는 청자 나름대로, 도대체 자신이 호의적으로 해석할 수 없는 방향으로 말을 해오는 발화자의 무신경함에 분노할 것 아닌가. 결국 이 좁혀질 수 없는 의견 불일치는 누군가의 양보, 혹은 둘 모두의 양보로 해결되고는 한다. 발화자가, ‘아 내 말이 그렇게 들렸을 수도 있겠구나.’ 혹은 ‘상대가 처한 상황이라면 그렇게 들릴 수밖에 없었겠구나.’를 인정한 뒤, 사과하고 자신의 발화를 수정하거나, 아니면 청자가 ‘내가 꼬여서 저 말을 이상하게 들어버렸구나.’, ‘사실 좋은 의도가 그 바탕에 있었음을 내가 눈치재지 못하였구나.’를 인정하는 것이다.


문제는 누가 항복할지가 관계적 권력에 의해서 정해진다는 것이다. 을은 갑의 말을 좋게 들어야만 하고, 자신의 말이 갑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을까 언제나 노심초사해야 한다. 서비스 센터의 전화를 받는 직원은 화가 난 고객에게 최대한 말을 조심해서 전달해야 하며, 고객이 한 모욕적인 말들을 아무렇지 않은 듯 받아내야 한다. 그래서 발화와 의도의 구분이 만들어낸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이 마치 해결된 것처럼 우리에게 보이는 것이다. 그 구분이 만들어낸 발화와 의도 간의 좁힐 수 없는 간격, 발화자와 청자 간에 합의 될 수 없는 투쟁은 관계적 권력의 차이에 의해서 일축되어 버린다. 마치 도박판에서 ‘쫄리면 뒤지시든지’라는 협박에 진짜 ‘쫄리는’ 사람이 판에 걸린 돈을 포기하고 기권 선언을 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렇게 짜잔. 문제는 해결되었다. 그런가?


절대 아니다. 이는 인간과 인간이 맺는 소통과 관계의 가능성을 모두 권력 투쟁으로 간단화 해버린다. 인간과 인간이 권력적 투쟁 말고 다른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것도 어떤 의미에서 철학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주장이겠지만, 별 다른 근거를 대지 않으려고 한다. 그 이유 하나는 내 직관이 그렇다고 말하기 때문이고, 둘째는 내 직관이 ‘그래야만’한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 필자는 지금 얼토당토 않는 원리가 관계가 작동하는 기본적인 원리가 되어야만 한다고 애처럼 보채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부모와 자식의 관계가, 연인 사이의 관계가, 친구들 간의 관계가, 내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들과 내가 맺는 관계가, 모두 권력적 투쟁이라고 믿는 것은 나에게는 어려워 보인다.


그래서 결국 발화와 의도의 이분법을 철폐하는 것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는가? 내 생각은 이렇다. 발화와 의도는 분리되지 않는다. 발화와 의미로 우리가 인위적으로 분리해놓은 소통의 두 근본적 요소는 사실 하나였다. 마치 액자와 그림의 경계가 무너지고, 매체와 전달되는 것이 하나가 되듯이 말이다. 또한 발화와 의도는 하나의 행위 안에서 동시에 나타난다. 우리의 합리적인(여기서 합리적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행위에 고도의 이성적 판단이 내재되어 있다는 것이 아니다. 그저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수단을 선택하는 의식적 작용이 발생한다는 의미에서 합리성을 의미한다.) 판단 아래에서 일어난다. 그렇다면 소통은 그 행위를 단위로 그 성공과 실패가 가늠되어야 할 것이다.


결국, 그렇다면 소통이 실패하고 성공하는 것은 오로지 행위자의 책임 소지이다. 그 공이 있다면 행위자의 것이겠고, 과가 있다면 역시 행위자의 것이다. 스스로의 행위에 대한 윤리적 책임의 향방이 명확해진다. 소통의 실패는 청자에게 그 책임이 귀속되지 않는다. 오로지 전적으로 그 발화(의도) 행위를 수행한 사람에게만 귀속된다. 그러나 발화(의도) 행위 수행자만이 소통의 책임을 지게 만드는 것은 불공평하지 않은가? 청자도 소통의 일부로 기능하는데 말이다. 하지만 발화와 의도의 구분이 무너진 이상, 메시지의 전달은 오로지 발화(의도) 행위 수행자의 몫이다. 이 지점에서 진정 윤리적으로 말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나는 말 할 테니, 너는 잘 들어라‘의 소통에서 탈피하여 자신의 한 말에 진정으로 책임 질 수 있는 길이 열리는 것이다.



 

4.



사실 그런데 실천적으로 어떻게 행위해야할지에 대해서 말해줄 수 있는 것은 별 다를게 없을지도 모른다. 사실 의도니, 발화니, 행위니, 하는 것은 모두 사변적인 주장들이었고 우리가 실생활에서 수행해야 하는 매일 매일의 소통에 실제로 어떻게 임해야 할지에 대해 한 마디 말도 못해줄 것이다. 어떻게든 실제적인 지침을 이끌어 내보려고 해봤자 나온다는 것이 ‘발화와 의도가 분리되지 않으니 말 조심해라..’ 수준일게 뻔하다. 그렇다면 사실 구분을 철폐하기 이전의 지침과도 그렇게나 다르지 않은 지침 아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통이 작동하는 방식에 대한 왜곡된 상을 피하는 것이 아무런 의미도 없다고 말 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이런 경우를 상상하면 조금 편하지 않을까. 내포(Intentional)적 문맥에서는 동일한 뜻을 가진 단어로 문장 요소를 대치해도 뜻이 동일하지 않다. 예를 들어, ‘나는 샛별이 개밥바라기 별임을 믿는다’와 ‘나는 샛별이 샛별임을 믿는다’의 뜻이 같아 보이는가? 아닐 것이다(샛별과 개밥바라기별은 모두 금성의 다른 이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샛별과 개밥바라기 별은 동일하다. 그러니까 즉, 구분을 철폐하는 사유를 한 이전과 이후에 실제로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외연적인 것이 모두 일치하더라도, 내포적으로 우리가 삶과 소통을 바라보는 방식과, 그 인식에 있어서 무언가 달라짐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아무쪼록 내가 하려고 했던 말들이 잘 전달되었으면 좋겠다. 그 책임은 오로지 나한테 있겠지만 말이다.



[김영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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