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걸작을 넘어선 예술가의 삶 이야기 - 다락방 미술관

비범함 그림 뒤에 어찌 평범한 인생이 있으랴?
글 입력 2019.09.03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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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범한 그림 뒤에

어찌 평범한 인생이 있으랴?”



다락방 미술관

_문하연



519-다락방 미술관_표지(대).jpg
 


[Review]

걸작을 넘어선 예술가의 삶 이야기



내가 지금까지 잡았던 책들을 떠올려보면 삶의 이야기는 언제나 나를 쉽게 놓아주지 않았었다. 그리고 기쁨의 정반대인 순간이라 할 수 있을 때에는 오히려 내가 그것을 힘껏 끌어당기기도 했었다. 말 그대로 쉽지 않은 상황 속 나에겐 ‘이유’와 ‘해석’은 단지 남들 앞에서 사실과 인정이 되고 싶은 문장일 뿐이다. 그럴 때 나는 어떤 틀에 얽매일 수 없는 사람의 삶과, 단지 이야기뿐이지만 거기서 다가오는 공감의 선에 의지하고 싶어진다. 누군가의 삶에서 나의 삶을 보기도 하고, 그가 삶을 이겨내는 과정에서 힘과 위로를 얻기도 한 경험들은 믿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이런 순간을 그림 앞에서 느낄 때가 많다. 그림은 삶이기 때문이다. 때때로 그림을 그리는 나는 스스로 내린 그 정의에 많이 의지하고 있다. 그림은 정말 삶이라고 믿는다.


한편으론 요즘 질문이 생겼다. “예술은 정말 무엇일까”라는 질문. 어려운 질문이지만 수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예술이 사람과 공존하고 있다는 점에서 예술에 관심을 계속 두고 있는 나에겐 달고 살아도 좋을 유의미한 질문이었다. 이 질문에 답하는 것은 여전히 어렵지만, 나는 예술이 여전히 우리 곁에 있다는 것은 분명 예술이 사람과 필연적인 관계 속에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왔다. 그저 사람이 만들었으니 예술이 사람과 연관성이 있을 수밖에 없지, 라는 이유가 아니었다. 이런 생각은 예술을 단순히 창조된 객체로 보았을 때의 얘기라 생각한다. 나는 주체와 주체로서 대면할 수 있는 예술에게 질문을 던져보고 싶었다. 어느 순간 그 작품에게 빠져 위로와 공감을 얻고 의지하고 있는 나를 볼 때, 예술은 단순히 파생된 창작물뿐이 아니었다.


이에 대한 지금 떠오르는 생각을 나열하자면 아마 그만큼 작품에는 한 사람의 삶이 함축되어 있기 때문일 테다. 하나의 화면에 닿은 손길 하나하나가 저마다의 의미를 가지고 한 화면에 모이고 쌓여 탄생한 삶의 거울. 그렇게 작품은 이미 그 스스로 많은 것을 이야기하고 있었고, 그 자체로 존재하기 때문에 기꺼이 사람과 대면할 수 있는 것이 된 것이지 않을까.


매번 일일이 짚어보진 않지만, 다른 것 없이 작품 앞에만 서 있어도 여러 질문을 하게 된다. 이 그림이 탄생하기 전  예술가에겐 어떤 순간이 지나고 있었을까, 어떤 삶의 결을 스쳐온 사람이길래 그런 모습이 작품으로 나타났을까, 그 순간에 왜 이런 이미지와 언어의 방식을 선택했을까, 이 기호는 예술가의 삶의 어느 지점에서 탄생한 걸까, 이 붓을 옮기는 순간을 위해 그는 무엇을 사색하고 있었을까, ‘완성’이라는 정의를 그는 어느 순간에 무엇을 느끼고 내렸을까. 아마 모르는 작품 앞에 섰을 때 모호하지만 무엇인가가 느껴지는 순간을 풀어 헤치면 이런 질문이 나올지도 모르겠다. 무엇보다 질문을 다시 살펴보면 이 질문들이 작품만을 향하는 것이 아니란 걸 알아차릴 수 있다. 질문은 자연스럽게 그 그림을 그린 예술가에게로 향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어떤 의미에선 작품의 이야기는 결국 또 다른 모습의 사람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그림은 이야기로도 다가갈 수 있다. 그리고 그래야 모두가 함께하는 예술이 될 수 있다. 왜냐하면 모두가 저마다의 이야기로 풀어질 수 있는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삶의 경험 앞에서 우리는 공감하고 이해하며, 동시에 함께 따라오는 선물을 받을 수 있다. 앞서 말한 위로 같은 선물처럼 말이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꼭 작품 감상이라는 것이 아닌 작품 앞에서 무엇인가를 느낀다는 것은 이야기와 이야기가 만나 이루어지는 또 다른 방식의 대화라고 할 수 있다.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다. 언어로 표현되지 않고, 표현될 수 없는 이야기들을.


그리고 이것이 이번에 [다락방 미술관]을 읽으며 내가 느낀 것이고, [다락방 미술관]을 통해 내가 찾아낸 내가 달고 사는 “예술은 무엇일까”라는 질문에 대한 어떤 대답의 결이다. 어쩌면 책 표지 앞에 적힌 “그림 속 숨어있는 이야기”라는 소개가 나만의 방식으로 증명된 셈이었다. [다락방 미술관]은 내게 정말 이야기였다. 예술가와 그의 삶의 이야기. 웅장한 미술관에서 분위기와 명성에 압도되어 자의인지 타의인지 모를 애매한 사이에서 그저 작품이 명작이라며 감탄하는 것이 아닌, 다락방에서 그들의 작품을 기억하고 그들의 삶의 이야기를 조용히 나눠보며 그 삶에 공감하고 그 강렬한 작품의 순간을 느끼는 그런 미술 이야기 말이다.



한 사람을 깊숙이 들여다보는 일은 결국 나 자신을 성찰하게 했다.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나 프리다 칼로의 글을 쓰면서 가슴속에서 뭔가 뜨거운 것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고통을 승화한다는 것은 이런 것. 인간이, 또 삶이 진정 위대해지는 지점, 그 순간을 묵도하는 일은 실로 가슴 벅판 일이 되었다. 눈물이 쏙 빠졌고 감기 엄살이 쏙 들어갔다. 글을 쓸수록 단단한 사람이 되고 싶어졌고 당당한 삶을 살고 싶어졌다.


- '프롤로그'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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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사를 공부하고 있어서 그림의 해석이라는 것과 분석이라는 것도 남들보다 더 익숙하지만, 나로서 확신하는 건 사람과 삶으로 다가간 그림은 정말 따스하다는 것이다. 살아있는 그 온도가 느껴진다고나 할까. 분석하고 의미란 것을 찾아내려 그림 앞에 서면 어떻게든 사고의 틀에서 이해하고 설명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든다. 하지만 이야기는 다르다. 마치 그림 곁에 앉는 기분이다. 사람 옆에 앉았을 때 묘하게 느껴지는 어떤 온기를 아는가, 그런 느낌이다. 그림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이 작품에는 분명히 사람의 온기가 잔뜩 스쳐 갔음이 느껴진다. 나와 전혀 다른 온도에서 잘게 소스라치며 적응하기 위해 발버둥 치던 도중 같은 온도를 만났을 때 느껴지는 어떤 포근함이 있다면, 이것을 그림과 대면할 때 느낀 알 수 없는 감동의 순간을 표현하는 비유로 쓰고 싶다.



자주 모델이 되어주었던 언니 리디아가 병으로 사망하자 큰 슬픔에 빠진 메리는 허전한 마음을 ‘엄마와 함께 있는 아이’ 시리즈를 그리며 달랬다. (...) 그녀의 대표적으로 알려진 대부분의 그림들이 이 시기에 그려졌다.


그녀가 그린 일련의 시리즈들은 다른 어느 작가와도 확연히 구별된다. 굉장히 촉각적이다. 아이의 따듯한 살결이 닿는 느낌이 든다. 너무나도 사랑스러운, 그래서 마음이 따듯해지다가 때론 울컥하게 만드는 작품들.


- 7장 메리 카사트 중


지금이야 유명한 작품들이고 동시에 많은 사람이 귀를 기울이고 있는 작품의 목소리지만, 당시에는 얼마나 예술가가 작품에게 쉽지 않은 시대를 살았었는지, 그런 세상 속에서 이들이 얼마나 비범한 삶 결을 지나왔는지 이 책을 읽으며 알 수 있었다. 이 책 속의 예술가들은 자신의 삶을 바쳐 자신의 목소리와 그림을 오롯이 지켜내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에서 벗어나 당시의 삶을 기억하면 그 작품에서 느껴지는 온도는 더 진하다. 마음 어느 지점을 손바닥으로 지긋이 짚어주는 느낌을 주는 작품이 있었다면 그런 온도를 느꼈다는 것이었을 테다. 느낌을 문장의 틀로 해석하지 않아도 좋았다. 가만히 듣다가도 느껴지는 여운과 온도에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책과의 만남이었다.



그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그 속에서 나를 발견한다. 그래서 그의 그림 속 이야기들은 모두 내 이야기가 된다. 뒷모습의 남자는 가장이라는 무게에 눌린 내 아버지가 되고, 내 남편이 되고, 내가 된다. <밤을 새우는 사람들>을 보며 마음이 베이는 까닭이다. 그가 표현한 고독은 즐길 만한 것이 아니다. 한 발만 더 내밃면 공포로 다가올 외로움이다. 그래서 그의 작품 감상 뒤에는 누군가 생각하고, 걱정하고, 그리워한다.


- 11장 에드워드 호퍼 중


내겐 에드워드 호퍼가 그랬다. 익숙한 풍경에서 진하게 풍겨오는 황량함과 외로움, 보이지 않는 인물의 그림자가 가진 이야기가 무엇인지 알 필요 없이 나의 이야기인 것만 같은 전환은 내게 흥분할 정도의 감동이 아닌, 무언의 감동과 공감이 뒤섞인 힘을 주었다. 한 번쯤, 어쩌면 여러 번 나도 느꼈을 이 공허함과 외로움, 거기서 느껴지는 냉담함. 에드워드 호퍼의 시선은 누군가들의 한 켠에 소리소문없이 자리하고 있던 고독과 그 차갑고 차분한 공기를 보고 있었음을 알기란 어렵지 않다. 이런 온도와 풍경이 내게도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익숙해지려던 참에 에드워드 호퍼는 화면으로 그 온도를 더 생경하게 만들어 내가 가진 익숙함을 다시 느끼고 생각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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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중에서도 호퍼의 마지막 작품이라는 <두 코미디언>은 도시의 풍경을 넘어선 삶의 고독과 고요함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 작품은 이번 도서를 통해 처음 만난  작품이었는데, 직접 작품을 만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사진만으로도 호퍼만의 그 고요함과 허전함이 느껴졌다. “80년을 넘긴 긴 삶을 뒤돌아보니 인생이 코미디처럼 느꼈던 것이 아니었을까”라는 저자의 생각에 나도 공감했다. 아래에는 탁한 연갈색의 무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검은 배경을 두고 전신이 하얗고 우스꽝스러운 하얀 옷을 입은 두 인물이 코미디언이라기엔 차분한 동작으로 인사를 하고 있다. 어딘가 복잡한 심경에 뒤덮인듯한 느낌은 작품을 차분하고 고요하게 만들었다. 빛과 어둠이 선명하게 구분된 배경은 단순하고 또 단순하지만 그럼으로써 풍겨오는 호퍼의 시선은 결코 가볍지 않았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지난 인생을 바라보는 시선, 너무 많은 것이 복잡하게 얽히면 결국 공허한 모호함으로 남기 마련이다. 두 인물의 뚜렷하지 않은 눈이 그것을 말하는 것만 같았다. "우리의 삶의 끝은 무엇을 보려하고 보고 있을까"라는 질문이 문득 떠오른다. 이제 인사가 끝나면 저 검은 배경으로 두 코미디언은 퇴장할 것이었다. 인생의 무대에서 보아온 세상을 뒤로하고, 아무것도 알 수 없고 보이지 않는 검은 어딘가 속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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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을 그림으로 승화시킨 작품은 늘 나를 뒤흔든다. 삶이 어찌 기쁜 일만 있겠는가, 언젠가 마주한 고통의 순간은 반드시 있을 터였다. 그리고 그들의 그림은 자신의 고통을 스스럼없이 드러낸다. 두려움의 대상인 고통에 기꺼이 맞서는 용기를 가지고 작품을 기어코 탄생시킨다. 그 용기 앞에서 작품을 판단하려는 모든 것들은 그 세계를 어떤 방식으로든 해할 수 없다. 고통이 응축되고 마음껏 풀어진 작품은 그 모습과 분위기 자체로 나를 붙잡는다. 나는 그런 작품 속에서 자유를 본다. 결코 단순화할 수 없고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인간으로서의 고통을 그림은 기어코 담아낼 수 있다는, 그 세계의 자유와 가능성을. 그래서 그런 그림들은 내게 다른 곳에선 찾을 수 없는 자유와 해방을 상징한다.



재판이 시작되었다. 재판의 쟁점은  ‘타시가 강간했느냐’가 아니라  ‘아르테미시아가 순결했느냐’였다. 여성의 순결만이 재산으로 간주되던 때였다. 그녀는 자신의 순결을 입증하기 위해 산파들 앞에서 부인과 검사를 받아야 했고, 자신의 말이 진실임을 입증하기 위해 타시와 대질 상태에서  ‘시빌레’라는 모진 고문을 견뎌야 했다. (..)


이 사건 후 아르테미시아는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디트>를 그렸다. (...)


아르테미시아는 홀로페르네스의 얼굴에 타시를, 유디트에는 자신의 얼굴을 넣었다. 이렇게라도 표현하지 않았으면 죽을 듯이 괴로웠으리라. 그의 절망과 고통과 분노가 얼마큼 극에 달했는지 작품에 고스란히 투영되어 있다. 아르테미시아의 아픈 서사를 보여주는 이 작품은 감히 다른 작품들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강력하다


- 1장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시대와 시선에 억눌린 화가, 특히 사회 아래에서 유독 더 많은 투쟁을 겪어야 했던 여성 예술가들의 이야기는 나의 마음을 뜨겁게 하기에 충분했다. 아니,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 한숨이 푹푹 나오기도 했다. 위대한 작품을 그려낸 이들의 삶은 얼마나 거친 것이었는지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이 그것을 그림으로 이겨내고 세상에 말하는 삶의 과정은 단순하지 않고 처절하지만 그래서 오히려 내게 힘을 주었다.



자신에 대한 밀도 높은 성찰과 사물과 사람에 대한 깊은 통찰로 대상들을 표현했다. 프리다 칼로, 앨리스 닐, 신디 셔먼, 키키 스미스 등 많은 여성 예술가들이 자신들의 방식으로 그 뒤를 이었다. 시대를 앞선다는 건 먼저 부딪히고 깨지는 거다. 깨지고 피 흘린 자리에 길이 난다.


- 14장 파울라 모더존-베커



갑작스런 여담이 될 수 있지만 언젠가 동생이 나의 그림을 보고 차가운 추상을 보는 것 같다고 말한 적이 있다. 예상치 못한 동생의 지나가던 감상에 나도 동의했다. 지금 내 그림은 검은 선만 가득한 것이, 상처와 회의적인 시선을 이해하고 싶어, 결국에는 ‘나’라는 존재 자체를 두고 전전긍긍하다 차갑게 식어버려 숨어버린 모습을 지닌 상태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여성 예술가들의 작품은 달랐다. 그들은 고통을 그림에서 자유롭게 분출해냈으며, 굴하지 않고 자신의 목소리를 지켜내고 있었다. 그 강렬함에 나는 놀라고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진정하려고 노력하는 나의 그림과는 확연히 다른 크기와 온도의 목소리, 강렬한 삶을 담아낸 비범한 그림의 힘이 뜨겁게 다가왔다. 동시에 자신에게 상처 내는 사회 앞에서 그 누구보다 단단한 자신을 표현한 작품들은 나를 먹먹하게 하는 동시에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용기를 주고 있었다. 어찌 이런 이야기를 아무 감동 없이 읽을 수 있겠는가, 마음속은 이미 같이 울고 분노하고 그 고통을 함께하고 있었다. 그런 책을 읽는 과정에서 저자의 프롤로그 속 이야기가 나의 것이 되고 있었다. 그들의 삶을 보니 나는 더 단단해지고 굴하지 않는 당당한 사람이 되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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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범한 그림 뒤에

어찌 평범한 인생이 있으랴?” 

에누리 없는 치열한 인생과

그 속에서 피어난 세기의 걸작들



이제는 그들의 삶을 알고 나니 이들의 작품이 직접 보고 싶어졌다. 하지만 그럴 수 있을지 확언할 수는 없지만 언젠가 책 속 예술가들의 작품을 만나면 전보다 더 반갑게 만날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 그들의 작품 앞에서 나는 그들의 삶을 떠올리고 그림 속 순간을 함께 할 테니 말이다. 책 소개와 저자의 프롤로그가 말하는 것처럼 [다락방 미술관]은 그렇게 우리들의 그림을 만나는 순간을 더 몰입하고 느낄 수 있도록 이야기로 힘을 실어주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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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미술관]의 내용은 이야기이기에 누구나 읽을 수 있는 도서다. 미술 관련 도서라 하면 나올 수 있는 전문 용어나 표현이 거의 쓰이지 않았다(있을 수도 있지만 나는 그렇게 느낄 정도로 분석적인 내용이 거의 없었다). 작품 해석과 분석이 아닌 예술가, 그리고 그와 함께한 작품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혹 전문적인 느낌 때문에 미술 도서가 낯설고 어렵게 느껴졌다면 [다락방 미술관]은 그런 걱정 없이 읽을 수 있는 도서였다고 리뷰하고 싶다. 그리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예술가의 삶을 이해하고 다시 나의 삶을 바라보는 경험은 미술을 통해 할 수 있는 시간을 선물해주는 도서다. 웅장한 미술관 말고 다락방같이 작고 아담하지만 포근한, 사람 냄새 가득한 이야기가 끌린다면 더 좋은 도서가 되어줄 것이라 믿는다. 그리고 책의 중심 내용과 함께 수록된 각 장의 마지막에 자리한 미술관에 대한 소개는 후에 여행을 갈 때 유용하게 참고할만한 꽤나 매력적인 정보가 되어줄 것이다.


"비범한 그림 뒤에 어찌 평범한 인생이 있으랴?"라는 [다락방 미술관] 소개 속 문장은 책 속에 담긴 모든 예술가들의 삶에 어울리기에 부족하지 않다. 그들은 예술가로서 위대한 인물이기 이전에, 삶의 고통을 이겨내는 비범한 힘을 가졌던 사람이었다. 고통에 몸부림치다 일찍 삶을 마감한 화가들은, 그냥 단지 일찍 세상을 떠나게 된 것이 아니라 어쩌면 삶의 모든 것을 그 짧은 시간 동안 감히 상상하지 못할 만큼 그림과 함께 이겨내고 그 끝을 맞이한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마저도 들었다. 어떻게 이들을 단순하게 미치광이, 혹은 천재라는 말로만 치부할 수 있을까. 삶은 하나의 단어로만 정의 내려질 수 없다. 이는 여전히 작품이 우리 곁에 남아있고 여전히 우리의 마음을 울리는 이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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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예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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