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어째서 좋은 사람이 돼야 하는데 [사람]

글 입력 2019.09.01 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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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기자가 되고 싶냐는 서류 문항의 질문에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서, 라고 적었다. 학보사 활동 한 때를 떠올리며 적은 문장이었다. 취재는 타인의 시각을 듣는 일이었다. 기사는 그 시각을 모아 서사로 확장하는 것이었다. 편집과 마감에 쫓겨 하기 싫다, 쓰기 싫다는 말을 입에 달았던 때지만 어떤 순간들은 새겨져 있다. 무수한 타인을 대면했다. 그들의 시각을 관찰했다. 그건 종종 나를 성찰하는 것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그 성찰의 경험들이 새겨져 있다.


공무원 시험을 주제로 기사를 쓰던 때다. 고시 준비하는 학생들을 인터뷰하기 전에 관련 담론을 여럿 접했다. 패기가 없다, 도전 의식이 없다, 하고 싶은 걸 찾지 못한 청년들이 안온한 경로를 취하기 위해 혈안이어서 그렇다는 담론을 읽었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눈 돌리면 아직 가능성이 즐비한 세계인데. 그들이 시야가 좁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물었다. 이런 담론이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오만한 동시에 질문의 주체와 대상을 경계 짓는 질문이었다. 질문을 발화하는 나 자신과 인터뷰 대상을 구별했다. 나는 그렇지 않아. 질문하면서 그렇게 생각했다. 인터뷰이는 곧바로 말했다.


그런 언어를 발화하는 주체 대부분은 기성의 자리에 이미 안착한 이들이다. 나는 기성세대가 밟으라고 강요했건, 자발적으로건 나에게 주어진 과업을 달성하기 위해 이만큼 성실하게 살았다. 그렇게 성실하게 살았기 때문에 공무원이 되려는 거다. 그리고 당신 세대가 나와 같은 처지로 지금 이 시기에 태어났다고 가정했을 때 당신세대 역시 나와 똑같은 선택을 할 거다.

 

페미니즘 관련한 기사를 작성한 적 있다. 메갈리아의 등장, 강남역 살인사건 등으로 남녀 갈등이 점화되기 시작한 때다. 난 어떤 입장이랄 게 없었다. 갈등의 지점을 포착하여 기사 소재로 써 먹으면 그만이었다. 취재를 시작하며 인터뷰를 돌았고 관련 강연에 참석했다.


서열을 매겨 몇 등까지가 주류라고 정의 내리는 건 불가능하다. 주류나 기득권은 상대적인 개념이다. 다수 집단이 한 사회에서 반드시 ‘주류’는 아니다. 숫자의 관점이 아니라 영향력의 관점으로 봐야 한다. 인원이 몇 없어도 사회적 위계가 높다면 해당 집단의 목소리는 영향력을 발휘한다. 위치가 높으면 소리 지르지 않아도 된다. 모두 듣는 시늉이라도 한다.


과격한 방식의 지금과 같은 페미니즘 투쟁이 비이성적이라는 목소리가 종종 발화된다. 그러나 강연에선 수치와 통계를 언급했다. 여성이 느끼는 두려움을 말했다. 인간의 삶엔 생존이 전제돼 있다. 이성, 감성, 논리 같은 무수한 삶의 가치 또한 생존을 담보한 뒤 작동한다. 여성은 생존을 위협받고 있었다. 공포는 논리, 이성 같은 것들을 무색케 한다. 내 신체의 일부가 무수한 타인에게 노출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무방비한 폭력에 언제든 시달릴 수 있다는 염려의 목소리를 비이성적이고 과격하다고 폄하할 수 없다. 그건 살려달라는 외침이었다. 생존이 걸린 문제다. 당연히 사활을 걸 수밖에 없다. 거대하고 시끄러운 구호를 외칠 수밖에 없다.


내가 주류라는 자각도 그때 들었다. 목소리를 발화한 적 없지만, 목소리를 낼 필요 없는 입장에서 평생 살았다. 구태여 큰 목소리를 내지 않아도 될 만큼 안온한 삶을 살았다. 그게 주류라는 반증이었다. 생존에 대한 걱정과 염려를 해 본 일 없었다. 절박함이 없는 인간은 구호를 외칠 이유 없다. 필요도 없다. 나는 중간자로서 기득권을 취한 셈이었다.


학보사 생활을 하며 타인의 이야기를 듣지 않았다면 좁은 테두리의 시야는 계속 바뀌지 않았을 거다. 나는 내가 듣고 싶고 보고 싶은 것만 봐왔다. 내가 이미 알고 있는 바를 확신하여 그걸 확인하면 그만이었다.


개인의 목소리들은 제각각이다. 하나하나의 목소리엔 그렇게 빚어지게 된 배경을 내포하고 있었다. 학생기자 활동은 그 목소리들을 헤아려보는 일이었다. 그럼으로써 타인을 이해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내가 가진 고정된 틀을 반성하는 일이었다. 내가 경험한 이해의 과정을 어떻게든 반영하여 기사를 쓰고자 했는데 잘 됐는지는 모르겠다.


시야가 확장되는 경험을 하고 싶어서 기자가 되고 싶다. 넓은 시야를 가진 사람이 돼 그 사람의 맥락을 가늠할 수 있는 인간이 되고 싶다.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 이해의 폭이 넓은 인간이 좋은 사람이라 생각했고 그래서 기자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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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서 좋은 사람이 돼야 하는데. 희경이 말했다. 글쎄. 할 말이 없었다. 나는 당연하다고 생각한 일을 부정당하니 말문이 막혔다. 착하다거나 좋다는 언어가 바보나 미련한 인간쯤으로 규정되는 시대니. 타인에게 해를 가하지 않는 범주 내에서 내 욕심대로 사는 게 가장 자신에게 이로운 처사 아니냐는 맥락이었다.


지난 21일에 서울시 NPO 센터에서 주최하는 비영리스타트업 포럼에 참석했다. 약자, 소수자 등으로 호명된 당사자들이 모여 자기 사위의 사회 문제를 지적하기 위해 비영리 단체를 만들었다. 그들이 동일하게 언급한 건 당사자 의식이었다. 변화가 더디거나 일어나지 않는 건 자기 문제라고 느끼는 사람들이 적기 때문이다. 정치의 최전선에 서서 변화를 실천할 수 있는 이들 역시 소수자와 약자가 발화하는 문제들을 구체적으로 실감해본 일이 없다. 개인에겐 각 개인의 인생이 더 중요하다. 당신들이, 우리가, 좀 더 내 문제라고 자각하고 공감하여 언성을 높인다면 변화는 일어날 수 있다. 현상과 문제의 당사자라는 감각을 가져보자.

 

반드시 좋은 사람이 될 필요는 없다. ‘좋다’는 기준도 제각각이다. 그럼 나쁜 건 어떤 거냐고 질문할 수 있다. ‘나쁘다’를 정의 내려 본다. 타인의 고통에 둔감한 사람. 그 고통에 공감하지 못하고 고통에 위계를 매기는 사람. 마치 나는 아닌 양 썼지만 지금 나는 나쁜 인간에 가깝다. 여전해 내 안위가 중요하고 이기적이다. 그래도 그런 사람의 대척점에 서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게 ‘좋은 사람’ 이라면 그래서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


어쩐지 동어반복 같다. 이렇게 말하면 희경이 납득할지는 모르겠다.

 

글을 쓰고 현상을 보도한다고 하여 사람들이 갑자기 당사자의식을 가질 리 없다. 세상이 금방 바뀌지도 않을 거다. 그래도 나는 바뀔 수 있다. 그렇게 쓰는 순간만큼은 ‘당사자’가 되는 경험을 할 수 있다. 박준 시인은 말했다. “쓴다고 달라지지 않잖아요. 쓴다고 해서 내 주변, 나를 둘러싸고 있는 상황이나 현실이 바뀌는 것은 전혀 아닌데, 그래도 쓰면 주변을 바라보는 시각이 조금 바뀌는 것 같아요. 왜 여전히 쓰고 있느냐 생각하면, 외부를 바꾸지는 못하지만 내부에서 외부를 보는 시각이 바뀌기 때문인 거죠.”(김필균, <문학 하는 마음>, 제철소, 2019, p99) 문학하고 예술하는 이들의 감수성을 내 멋대로 재단할 수는 없을 거다. 다만 그들 역시 어느 구석에 나와 비슷한 체감을 하고 있다고 느낀다. 글이, 기사가, 문학이, 예술이 세상을 구원할 수 없다. 그러나 그 주체는 구원할 수 있다.

 


[박성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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