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임 파인, 아트] 최후의 방문객 - 노맨스랜드展

노맨스랜드 - 통의동 보안여관
글 입력 2019.09.02 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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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ne art] 

: drawings, paintings, and sculptures that are admired

for their beauty and have nopractical use.


 

순수 미술은 순수한 아름다움을 구현하기 위한 예술적 의도로 창조된 미술을 뜻한다. 이것은 자율적이고 독립적이며 그 자체로의 실재를 추구하고 목적하는 미술 지상주의이다. 순수 미술은 영어로 파인 아트(Fine art)라고 표기한다.


아트면 아트지, 왜 앞에 ‘파인’이 붙는 걸까? 영어에서 ‘Fine’은 형용사로 ‘섬세하다’, ‘고상하다’, ‘좋다’, ‘훌륭하다’, ‘멋지다’라는 뜻을 지닌다. 초등학교에서 가장 먼저 배운 문장인 “하우알유? 아임 파인 땡큐. 앤유?”의 ‘파인’도 이것이다. 이 단어는 ‘아트’ 앞에 붙어 ‘고상하고 좋으며 훌륭하고 멋진’ 예술을 뜻하는 단어가 되었다. 단어의 정의처럼 파인 아트의 개념도 단순하고 명료하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미술의 발전만큼 그 역사는 길고 개념은 복잡하다.


중세시대엔 예술을 기술이라고 여겼다. 이때 인간이 할 수 있는 기술은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학문, 다른 하나는 노동이다. 학문은 정신적인 노동으로, 인문학으로 자율을 추구하는 기술이라는 뜻인 순수 미술(Fine-art)라고 불렀다. 반대로 신체 노동이 밑바탕인 기술은 실용적이고 범상한 장식 미술(Crafts)이라고 했다.


순수 미술이라는 명칭은 18세기에 생겼으나 개념은 19세기에 엄격히 구분되었다. 1747년 찰스 바퇴가 순수 미술의 개념을 회화, 조각, 음악, 시, 무용으로 구분 지은 것이 시작이다. 그 후 19세기에 음악과 무용이 분리되어 순수미술은 모든 예술과 구별된 독자적인 개념이 되었다. 그때서야 시각 미술인 회화와 조각이 파인 아트(Fine art)로 분류되고 미술이 독립성을 띠었다. 이 모든 과정을 거쳐 오늘날 회화, 조각, 설치, 영상을 포함한 미술을 순수 미술(Fine art)이라고 부른다.


오늘날 예술 장르의 구분은 무의미하다. 21세기 세계는 옛날처럼 순수한 미적 감각만을 추구하지 않을뿐더러 이미 혼재하는 예술을 일일이 떼어내 구별하는 것은 구시대적이다. 그저 순수미술의 어원을 거슬러 가자면 그러했다는 정도로 알아두자.


자, 그렇다면 오늘날 미술은 뭐라고 지칭할까. 바로 '동시대 미술'(contemporary art)이다. 동시대 미술은 1970년대 이후의 현대미술을 지칭하지만 명확한 구분이 어렵다. 다른 세대처럼 특정한 사조를 찾기 힘들고 한 장르로 치우치지 않기 때문이다. 즉 다양한 분야가 얽힌 미술을 '동시대 미술'이라고 부른다.


본 글에서는 동시대 미술에 관한 이야기를 진행할 것이다. 그에 앞서 일단 몇 가지 당부를 해둔다. 나는 이 글 속의 전시회를 두 가지 유형으로 분류할 것이다. 국립 미술관을 비롯한 상업성 짙은 흥행 위주의 대형전시를 메이저 전시로, 젊은 작가로 구성된 비교적 대중적이지 않은 전시를 마이너로. 전자는 국립현대미술관을 비롯한 각종 미술관과 예술의 전당이고, 후자는 서울의 대안공간과 신생공간 같은 비영리 전시기관이다. <아임 파인, 아트>는 마이너 전시를 우선으로 할 것이나 때에 따라서 메이저 전시회가 소재가 될 수 있음을 밝힌다.


생각해보면 나는 전시회에 가는 걸 좋아하고 현대미술을 전공했지만, 앞서 말한 마이너 전시를 부지런히 찾아다니는 타입은 아니다. 현대미술의 대중화를 바라는 나조차 그러한데 현대미술이 난해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은 얼마나 어렵고 생소할까. 그래서 본 글을 기획했다. 일년에 몇번씩이나 생겼다 사라지는 한국의 현대미술 전시를 어떻게 하면 쉽게 다가갈 수 있는지 생각했을 때,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글뿐이었다. 분명 현대 미술은 쉬운 분야가 아니고 때로는 무척 난해해서 바람대로 쉽게 다가는데 실패할 수도 있다. 그런 두려움과 포부를 안고 본 글의 첫 전시를 소개하련다.

    



NO MAN’S ROMANCE

; 생각하는 자연과 움직이는 사물들



서울시 종로구 효자로에 있는 통의동 보안여관. 2007년부터 운영된 통의동 보안여관은 1942년부터 2002년까지 약 60년 동안 여관으로 운영되어 수많은 여객을 맞이했다. 그러다 기능을 멈춘 이곳을 2017년에 새로 단장했다. 벽돌로 된 건물 지하 1층은 아트 스페이스, 1층은 카페, 2층은 책방, 3층은 보안스테이라는 임시 거주지이다. 지난 8월 16일, 이곳에서 장종완 개인전 <노맨스랜드>가 열렸다. 이 전시는 서울문화재단이 후원하고 장준호와의 협업으로 이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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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장 입구부터 강렬한 인상을 주는 기다란 막대기. 언뜻 손 같기도 하고 낙엽처럼 보이기도 한다. 가까이 다가가니 그 안을 채운 그림은 시원한 폭포와 아득한 절벽이 절경을 이룬 지상낙원을 연상시킨다. 장준호의 조각에 장종완의 회화가 만난 결과물이다.


이번 전시는 그림과 조각이 취하는 가장 밀접한 방식으로 협업했다. 대부분의 작품은 조각과 회화가 조합된 구성이다. 특이한 것은 장종완이 단 한 점의 회화를 빼고 모두 과슈 물감을 썼다는 것이다. 과슈는 불투명한 수채물감으로 물에 엷게 녹이면 수채화식, 두껍게 바르면 유화식으로 사용할 수 있다. 그는 나무 조각 위에 과슈를 써서 수채화의 맑은 색상과 유채화의 강렬한 색감을 동시에 연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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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더 걸어 들어가니 뚜렷한 구분 없이 배치된 작품들이 시야에 들어온다. 이런 큰 공간에 널브러진 작업들을 만나면 무엇을 먼저 보아야 할지 막막해진다. 그럴 때는 순서대로 보는 것이 좋다. 나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전시를 관람하기로 했다.


그래도 막막하다면 전시장 속 텍스트를 찾는 것도 나쁘지 않다. 대부분 약간의 설명을 위한 글이 존재하기 마련이기에. 운이 좋게도 오른편에는 글 하나가 걸려있다. 이 소설 형식의 텍스트는 작품은 아니지만, 작업의 일부이다. 그 내용을 내 멋대로 해석해봤다.

 


종말이 왔다. 인간이 사라졌다. 예상해본 적 없는 일들이 연속적으로 벌어지고 환상의 세계가 펼쳐지지만, 그것은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다. 관람객은 노맨스랜드에 초대된 최후의 인간이다. 이 땅에 도착한 자들은 곧 익숙하지만 낯선 생명을 마주한다. 나무 조각에 부엉이의 형상이 들어있고 사슴의 얼굴은 풀더미로 덮였다. 인간의 형상을 한 홍삼은 꽈리를 틀고 부처 흉내를 낸다. 몰아치는 파도는 아찔한 부엉이의 부리를 가졌다. 원숭인지 너구린지 모호한 동물들이 모여 무언가를 발견한듯하고 공룡의 발톱 같은 의자는 앉으면 잡아먹힐 듯 위협적이다.

 

그러나 그것은 '동물’, ‘식물’이 아니다. 인간이 멋대로 갖다 붙인 명칭은 이 땅에선 무례일 뿐이다. 우리가 인지하는 것은 전혀 다른 체계로 새롭게 조직되었다. 멋대로 부르지 말고 판단하지 말라. 여기서 우리의 앎이란 불필요한 흔적이나 먼 옛날 잊힌 신화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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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처음 조각을 보고 뗀석기나 호미, 낫과 같은 농작 기구를 연상했다. 하지만 위아래로 길기만 하지 뚜렷한 용도를 모르겠다. 사실 이 오브제를 어떻게 이름 짓느냐는 의미 없다. 더는 인간이 살지 않는 땅에 농작이 무슨 소용이랴. 쓸모가 있고 없고를 정하는 기준이 없기에 용도는 필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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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곳곳에 그려진 부엉이 얼굴은 의문을 남긴다. 어째서 부엉이인가. 하고 많은 조류 중에 독수리도, 참새도 아닌 하필 부엉인가. 그 대답은 부엉이에 얽힌 동서양의 신화에 있다. 오래전 부엉이는 불길한 새로 여겨졌다. 문학 작품 속에서 암울한 사건의 복선으로 부엉이 울음소리를 배치하기도 한다. 먼 옛날 사랑하는 임과 이별한 뒤 혼자 지새우는 밤에는 꼭 부엉이의 사무친 울음소리가 들리며, 적막한 밤의 공기는 더욱 스산해진다. 특히 조선시대에는 부엉이를 매우 불길하게 여겨서 태조 이성계는 부엉이 울음소리가 들려 거처를 옮기기도 했다.


반면에 로마 신화 속 부엉이는 지혜의 상징이다. 로마 신화의 여신 ‘미네르바’의 부엉이가 그것이다. 전쟁과 지혜, 의술, 상업, 기술, 음악의 여신인 미네르바는 부엉이를 데리고 다녔다. 이 신화에 대해 독일의 철학자 헤겔은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이 저물어야 그 날개를 편다”라는 유명한 경구를 남겼다. 이처럼 부엉이는 인간이 만든 신화적인 동물이다. 작가는 아마도 신화라는 소재를 생각하다 부엉이를 떠올린 것이 아닐까.




전시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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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브제를 전시하는 방식이 마치 고대 유물을 전시하는 것 같다. 탈신화를 위한 공간을 다시 신화적 방법으로 재현한 것이 모순된다. 나란히 눕혀진 모양새가 꼭 박물관에 있어야 할 유품 같다. 처음 작품을 보고 농작 기구를 연상한 것도 그런 의도하에 있던 것이 아닐까. 작가와 전시 기획자가 과연 이 부분을 계산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묘하게 풍자적이다. 이처럼 작업의 내용도 중요하지만 전시를 구성하는 방식이 적합해야 관람의 몰입이 높아진다.




미술 전시 역사의 재탕인가?



1970년 미국과 유럽 중심의 제도비판 미술은 미술 제도를 이루는 과정과 기득권을 비판하는 전시를 진행했다. 기존 권력층이 미술계를 지배하고 그들이 만든 미술 제도가 현실까지 은폐해왔음을 만천하에 드러냈다. 이는 결과적으로 제도를 비판하는 담론을 형성했고 제도로부터 배제된 다양한 주체를 수용하고 탐구했다.


나는 <노맨스랜드>전을 보며 70년대의 제도비판 미술을 떠올렸다. 물론 제도비판 미술처럼 뚜렷한 목적을 지닌 노골적인 방식은 아니지만, 현대미술이 지향해야 할 점은 공통된다. 눈 감고 있던 현실을 재고하도록 유도할 것. 이번 전시는 겉보기와 같이 작가의 판타지를 나열한 것이 아니라 치밀하게 기획된 사회 비판이다. 다만 대놓고 지적하는 것은 신선하지 않으니 은유로 재해석하여 표현했을뿐.


하나의 신화를 위한 욕망은 한국의 현대미술 저변에 깔려있다. 서구의 미술사조를 신화로 여기며 그것을 선망하는 풍조는 오랜 세월 축적되어 왔다. 해외에서 인정받은 한국 작가라는 신화와 서구화풍의 영향을 받은 신화. 누군가는 영웅이 되고 애국자가 되며 권력을 쥐고 한국 미술의 역사를 창조한다. 그러나 오늘날 현대 미술은 ‘신화’를 거부한다. 과거를 차용하고 일부러 모방하며 미술의 역사를 풍자한다. 동시대 미술 속에서 신화란 얼마나 하찮고 무의미한 것인가.


신화. 이 전시의 화두는 ‘신화’이다. 과학과 논리가 일상을 이룬 현대인조차도 ‘신화’에 대해선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인다. 단군과 예수, 성모마리아와 부처. 가치관까지 섭렵한 신화는 인간의 역사에서 빠뜨릴 수 없다. 비로소 인간이 그것에서 벗어나고자 근대화라는 혁명을 일으켰으나 이것 또한 ‘탈 신화화’라는 하나의 신화가 되었다.


노맨스랜드. 인간이 사라진 세계는 자연과 사물만이 존재한다. 이곳에 들린 현대인의 눈앞에서 문명이 야만으로 퇴보하여도 인간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인간이 바꿀 수 있는 것은 무엇도 없다. 이쯤에서 한번 생각해보기로 한다. 내가 인간인 탓에 문명이 회귀하는 것을 손 쓸새 없이 지켜봐야 한다면 무슨 생각이 드는가? 한낱 인간은 자연 앞에서 이토록 무력한데 저 사라져가는 문명은 누구의 손에 만들어졌나. 내가 믿고 있는 것, 이미 체계화되어 당연하게 여겼던 것들은 왜 그러했지?


“왜?” 당연함을 되짚자. 세계가 어떤 방식으로 조직되어 있는지, 그것을 정한 이는 누구인지를. 과연 신화를 비롯한 세계를 이룬 것은 누구의 지휘 아래 이뤄졌는가. 우리를 이루는 것은 때로는 우리를 지배하지만 쉽게 알아채지 못한다. 대부분은 그런 것엔 관심이 없어서. 자연과 사물만이 존재하는 무인 無人의 세계에서 최후의 방문객은 그때서야 생각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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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재이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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