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너는 귀찮게 왜 다이어리를 써? [사람]

지극히 사적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 재미난
글 입력 2019.08.26 1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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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들이 캠퍼스에서 새내기 생활을 하고 있을 때, 나는 학원 자습실에 있었다. 당시 나의 신분은 '죄수생' 으로도 불리는 '재수생' 으로, 대입에 한번 실패한 상황이었다. 수능 공부를 고3이 돼서야 시작했기 때문에 수능을 거하게 망쳤고, 그 해 지원한 대학은 최저 등급을 맞추지 못해 주르륵 낙방했다. 다시 공부를 시작하는데, 해야 할게 너무 많았다. 개념도 제대로 완성하지 못한 상태로 시작한 재수생활은 매일이 바쁜 나날이었다.

 

그때 처음 다이어리를 쓰게 되었다. 말이 다이어리지, 지금 다시 생각해보면 스터디 플래너였다. 공부할 것들을 쭉 쓰고, 체크하는 용도로 사용했다. 처음 한두 달은 그렇게만 쓰다가 어느 날부터 하루의 기록을 짤막하게 쓰기 시작했다. '오늘은 단어 시험을 통과하지 못했다. 재시험을 두 번이나 봐야 했다. 단어가 너무 안 외워진다' 등과 같이 나름의 사건을 기록했다.

 

지금은 재수할 때 썼던 다이어리를 찾아보려고 해도 어디 있는지 잘 모르겠다. 아마 그 해 말 대학에 합격한 내가 신나서 춤을 추며 내  키 만치 쌓인 문제집을 몽땅 버릴 때 같이 사라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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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사용하고 있는 한달 다이어리


1년 동안 매일 쓰던 다이어리는 어느새 습관이 돼서, 대학에 입학하고도 계속 썼다. 나는 같이 다니던 친구들에게 다이어리를 주기도 했는데, 친구들은 마침 과제를 기록할 수첩이 필요했다며 냉큼 받아 갔다. 몇 달 뒤 다이어리를 준 친구들에게 잘 쓰고 있냐고 물어봤다. 친구들은 멋쩍게 웃으며 사실 안 쓴지 꽤 되었다고 대답했다. 사실 친구들이 다이어리를 오래 쓸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휴대폰 메모장 어플에 일정을 기록하는 것을 보기도 했고, 가방도 없이 맨몸으로 수업을 다니는 친구들에게 귀찮게 다이어리와 펜을 들고 다니길 바라는 것은 무리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친구들에게 다이어리를 준 이유는 그냥 문득 떠오른 생각 때문이었다. 내가 강의실에서 다 꾸깃꾸깃해진 영수증을 확인하며 다이어리에 지출 내역을 적을 때마다 옆에서 신기하게 바라보는 친구들이 어색했기 때문에. 같이 다이어리를 쓴다면 안 그러지 않을까? 라는 생각. 내가 봐도 다이어리를 쓰는 것은 나처럼 습관이 아닌 이상 퍽 귀찮은 일이긴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내가 다이어리를 쓰는 이유는 간단하다. 나에게 다이어리는 사진첩이다. 책상 정리를 할 때마다, 혹은 이따금 번뜩 떠올라서 과거에 썼던 다이어리를 다시 읽어 보곤 한다. 내가 쓴 다이어리만큼 재미있고 우스운 것도 없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게으른 완벽주의 기질이 있어서, 밤마다 다음날의 기록을 세울 때 ‘꼭 다 하고 말겠어!’ 라는 마음으로 계획을 무리하게 세운다. 당연히 다 해내지 못한다. 그러면 일정이 그 다음날로 넘어간다. 그다음, 그다음, 심할 때는 일주일 내내 하겠다고 다짐만 하다가 결국에는 안 하는 것도 있다. 그러고 있는 과거의 나를 보면 정말 웃기다. 정말 의지가 없구나 싶기도 하고, 반대로 ‘포기를 모르는 아가씨네’ 라고 생각하며 마치 남의 다이어리를 읽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

 

그날 만난 친구, 그날 한 과제들, 그날 쓴 돈, 그날 기록한 나의 생각을 보면 내가 보낸 하루가 머릿속에 영상으로 나타나 재생된다. 지금은 연락하지 않지만 정말 잘 맞았던 친구, 그 친구는 지금 뭐 할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그렇게 제출하지 말고 조금 더 작업해서 완성할 걸 하는 후회가 들기도 한다. 흘린 글씨로 일정과 지출만 쓰인 페이지를 읽을 때는 바쁜 날이었구나 라는 생각을 하며 안 봐도 다크서클이 턱 밑까지 내려가 있을 그때의 나를 떠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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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어리에는 무엇이든 쓴다, 오피니언 개요도

 

‘너는 귀찮게 왜 다이어리를 써?’


가끔 나에게 이런 질문을 하는 친구가 있다. 보통 그런 질문에 내가 하는 첫 번째 대답은 ‘습관이야’ 다. 사실 이제는 내가 뭘 했는지 기록하지 않으면 불안하다. 다이어리를 쓰려고 펜을 들어 하루를 되돌아보니, 하루 종일 한 거라고는 침대에 누워서 강아지랑 뒹굴 거린 것 밖에 없는 날이면 기분이 안 좋다. 그럴 땐 급하게 영화라도 본다. 휴대폰을 꺼내서 내가 언젠가 보리라 ‘보고 싶어요’ 를 눌러둔 영화를 튼다. 재미가 있으면 쭉 보고, 재미가 없으면 끈다. 그리고 다이어리에 쓴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유명한 영화라고 해서 봤는데 도저히 끝까지 다 볼 수가 없다. 재미없다. 영화관이면 모르겠지만, 언제든 뒤로 가기를 누를 수 있는 휴대폰으로는 힘들다. 결말은 궁금해서 검색해봤는데 잘 모르겠다. 나에게 너무 어려운 영화다. 언젠가 정말 심심할 때 다시 도전하겠다.’


그럼 그날은 영화를 본 날이 된다. 나중에 미래의 내가 다이어리를 다시 읽다가 보면 생각할 것이다. 음,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다시 볼까?

 

그리고 그 질문을 한 친구가 친하다면 이런 대답도 한다. ‘너도 다이어리 쓰잖아’.


‘Diary’를 사전적 의미로 보면 두 가지 뜻이 있다. (앞으로 할 일을 적어 넣는) 수첩과 일기. 사람은 어떤 형식으로든 자신만의 수첩을 가지고 있다. 요즘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휴대폰 메모장 어플이나 다이어리 어플을 사용한다. 나는 그저 종이로 만들어진 다이어리를 쓸 뿐이다. 나도 캘린더 위젯이나 편리하다는 다이어리 어플을 사용해 봤지만 오래 사용하지 못하고 모두 삭제했다. 내가 직접 영수증을 일일이 확인하고, 손으로 꾹꾹 눌러쓰는 방식이 아니면 손이 잘 안 간다. 사용을 안 하면 어플을 설치한 본래의 이유가 무색해지니 결국 삭제해 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그냥 요즘은 이렇게 생각한다. 사람마다 각자 자기에게 맞는 기록의 방식이 있고, 나는 펜으로 종이에 쓰는 것을 선호하는 것뿐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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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함께한 다이어리들.
대학일기를 완성하는게 지금의 목표다.


 

다이어리를 쓰면 부지런해진다거나, 꼼꼼한 사람이 된다는 식의 대단한 말은 하지 않겠다. 그런 효과가 있다면 벌써 너도나도 다이어리를 쓰고 있을 것이다.


나는 그저 하루하루를 기록할 뿐이다. 매일 밤 돌이켜 봤을 때 생각나는 일과 느낌을 쓴다. 분명히 어제와는 다른 하루다. 동시에 다이어리는 내가 이렇게 살아왔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도구라는 것이 사진과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이 오피니언을 기고하고, 나는 다이어리에 ‘다이어리’에 대한 오피니언을 기고한 오늘의 에피소드를 쓸 것이다. 사진첩 마냥 먼 훗날 도란도란 둘러앉아 다 같이 읽기에는 지극히 사적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 재밌다. 오늘 기록한 일상을 다시 읽을 미래의 내 생각이 궁금하다.



[김혜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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