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프린지페스티벌에서의 월요일 저녁

독립 예술가들의 축제, 2019 서울 프린지페스티벌
글 입력 2019.08.26 0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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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월요일, 올여름 처음이자 마지막 페스티벌을 즐기기 위해 서울 프린지페스티벌이 열리는 마포 문화비축기지로 향했다. 이 페스티벌에 가게 된 건 순전히 예술가들의 ‘선별 과정이 없는 자유 참가’라는 축제의 원칙이 마음에 와닿았기 때문이다. 하나의 기획자가 고심해서 선정한 프로그램이 아니라, 예술을 하는 개인, 팀이라면 누구나 관객 앞에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축제라는 사실이 굉장히 신선하게 다가왔던 것 같다.

 

예술이라는 장르는 순위를 매기고 가치를 비교하는 것이 ‘가능한지’에서부터 ‘정당한지’까지 수많은 논쟁이 있는 것이나, 우리 사회는 어쩔 수 없이 주로 ‘공모’와 ‘선정’이라는 제도를 통해 예술을 대중 앞에 선보여왔다. 그 과정에서 선택받지 못한 예술가들은 자존감에 타격을 입는 것은 물론이고, 심한 경우 생계를 위협받기도 한다. 요즘 젊은 예술가들의 이러한 문제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기 시작하면서 프린지페스티벌의 모토가 더 설득력 있게 다가왔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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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적 일탈을 상상하다! 예술아지트: 프린지”



올해의 슬로건도 이러한 프린지페스티벌의 정체성을 잘 드러낸 것 같다. 특히, 문화비축기지라는 공간적 특성도 축제의 이미지와 참 잘 맞아떨어진다고 생각했다.


문화비축기지는 박정희 정권 시절 유류비축기지로 사용되었던 곳으로, 사용이 중단된 이후 시민의 제안으로 공연, 전시, 세미나 등이 자유롭게 열리는 문화예술 공간으로 탈바꿈한 곳이다. 버려진 공간의 창의적 재활용, 시민의 아이디어로 탄생한 민주적 공간, 이러한 문화비축기지의 역사와 프린지페스티벌의 자유롭고 신선한 분위기가 잘 어울린다.


그러나 막상 페스티벌 방문 날짜가 가까워지자 은근히 걱정이 되기도 했다. 사전에 홈페이지 등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정보는 대부분 페스티벌 자체에 대한 것이었고, 공연 각각에 대한 설명은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시간을 쪼개 가는 행사인데, 혹시나 실망하게 되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문화비축기지’라는 공간 자체에 대한 호기심이 있었기 때문에, 걱정반 기대반 마음을 안고 페스티벌로 향했다.




p.m. 7:00 유산균 프로젝트_봉투 20원인데, 필요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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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시간대에 예정된 여러 공연 중 그저 ‘유산균 프로젝트’라는 귀여운 이름에 이끌려 무작정 들어가게 된 공연장. 여섯 명의 연주자들 앞에 비닐봉지가 어지러이 흩어져있었다. 쓰레기를 덜 치운 것인가? 궁금해하던 찰나 연주자가 힘차게 공연 시작을 알렸다.


공연은 피아노를 제외하고 모두 해금, 피리, 가야금, 장구, 꽹과리, 징 등 국악기로 구성되었다. 참 오랜만에 들어보는 국악 선율이었는데 역시나 참 좋았다. 해금과 피리의 소리는 듣는이의 마음을 동하게 하는 힘이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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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은 3부로 나뉘어 진행되었는데, 중간중간 연주자들이 나와 곡을 소개해주었다. 20원이면 거래되는 값싼 비닐봉지의 가벼움과 덧없음에 우리네 인생을 은유한 곡이라 했다. 그래서인지 곡은 슬프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바람에 둥실 떠오르는 비닐봉지처럼 위로, 위로 고조되는 희망을 노래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했다.


연주자들의 이야기를 들은 후 음악을 감상하니 그 감상이 평소와는 달랐던 것 같다. 또래인 이들의 고민에 많이 공감되면서도 그 고민의 깊이가 느껴져 더욱 인상적이었다. 베테랑 연주자와 지휘자들의 웅장한 클래식 공연에서도 감동은 느꼈지만, 나와 같은 눈높이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이들의 음악과 공연은 또 다른 결의 감동을 선사했다.


*

  

공연과 공연 사이 문화비축기지 공원을 돌아보았다. 유류보관창고로 지어진 탱크들인데도 산업화 시기의 칙칙함은 온데간데없이 알록달록하고 생기 넘치는 모습이었다. 겉에서 보는 외관 모습도 독특했지만, 공연장 내부의 둥그런 돔과 콘크리트의 두툼한 벽이 신선하고 재미있는 분위기를 자아냈다.


유산균프로젝트의 공연이 열린 곳도 마치 정원 내 온실 속에 들어온 것 같은 특이한 공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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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는 프린지페스티벌을 월드컵경기장에서 진행했다고 하는데, 그곳이 더 넓고 접근성은 좋을지 모르나 내게는 문화비축기지에서 축제를 연 것이 더 좋은 결정이라고 느껴졌다. 공원 내에 띄엄띄엄 위치한 서로 다르게 생긴 탱크들을 찾아다니며 공연을 보는 재미가 있는, 공간 자체만으로도 즐거운 경험이 된 축제였다.




p.m. 8:00 샥티댄스무브먼트_신화, 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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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장에 들어서자 향 냄새가 진동했다. 그 향 때문에 공연장으로 들어서자마자 공연이 시작된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기둥이 여러 개 놓인 공연장의 내부도 특이했다. 검은 옷, 붉은 옷을 입은 무용수가 차례로 등장해 춤을 추다, 마지막에는 세 명이 흰 옷을 입고 모여 무아지경으로 춤을 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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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무용 공연을 제대로 본 건 이번이 처음인 것 같다. 춤의 동작이나 몸짓은 생소했지만 신기하게도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 본능적으로 이해가 되었다. 흰 옷을 입은 세 명의 무용수가 빙글빙글 돌며 공연장을 누비는 모습이 마녀들처럼 섬뜩하게도, 순수한 소녀들처럼 아름답게도 보였다. 처음부터 끝까지 몰입에서 빠져나올 수 없었던 강렬한 경험이었다.


샥티댄스무브먼트의 공연을 보며 이런 생각을 했다. 프린지페스티벌이 아니었다면 이 공연을 볼 기회가 있었을까? 최근에 보았던 그 어떤 공연보다도 강렬한 인상을 남긴 수준급의 공연이었는데도, 축제라는 장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작은 독립 무용단이 여는 공연을 찾아가거나 이 공연에 대해 알게 될 기회조차 희박했을 것이라는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 그래서 축제를 통해 이런 예술가들도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개인적으로 굉장히 감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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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장을 나오자 어느새 산뜻해진 여름밤의 공기가 반겼다. 처음의 걱정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시간 여유가 부족해 공연을 더 보지 못하는 것에 아쉬움만 남았다. 무엇을 보게 될지 모르고, 무엇을 느끼게 될지 예측하지 못한 채 공연장과 공연장을 건너다니는 기분은 생경하지만 자유로웠다. 그래서인지 공연 하나하나에 더욱 집중하게 되었던 것 같다.


또 무엇보다 독립 예술가들을 위한 이런 페스티벌이 꾸준하게 열리고 있다는 사실에 조금은 안도하게 되었던 시간이었다. 페스티벌이 끝나도 여전히 그들의 삶은 버겁고 고단하겠지만, 탱크 안에서 관객들과 함께 호흡했던 순간이 그들에게 조금이나마 기쁨과 용기를 주었기를. 또 더 많은 사람들이 오늘의 나와 같이 작지만 훌륭한 독립 예술가들의 존재를 발견하게 되었기를. 그런 생각을 하며 축제장을 나섰다.

 


2019 서울 프린지페스티벌

2019.08.15.(목)~2019.08.24(토)

문화비축기지

총 84개 문화예술단체/ 개인 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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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현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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