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어느 대학생의 유서 [사람]

If I were to die tomorrow
글 입력 2019.08.17 2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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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에디터의 가상 유서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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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마지막 밤이 찾아왔습니다.
해가 뜨기 전까지, 찬란했던 삶의 순간들을 애정을 담아 되돌아보려고 합니다.

*

처음 자전거를 탔던 순간을 기억합니다. 초등학교 옆 공원에서 엄마는 자전거를 밀어주었습니다. 두 발을 땅으로부터 떼어내는 건 무서운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익숙하게 페달을 밟을 때까지 절대로 손을 놓지 말라고 당부했습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바퀴가 가볍게 굴러가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이상하다 싶어 뒤를 돌아보니 엄마는 활짝 웃고 있었습니다.

엄마의 미소가 종종 아름답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습니다. 어느 날, 엄마는 새로 산 믹서기의 자잘한 기능까지 설명해주면서 신난 모습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그러고는 믹서기에 딸기와 바나나를 넣어 갈아주었는데, 맛있다고 하니 아이처럼 활짝 웃었습니다. 티 없이 맑은 미소를 짓는 엄마가 문득 소녀처럼 보였습니다. 조금은 낯설었지만, 기분 좋은 순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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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엄마가 풋사과를 좋아한다는 걸 처음 알게 됐습니다. 그리고 복숭아 알레르기가 있어서 먹지 못한다는 사실도 말이죠. 돌이켜 보면 친구들의 취향은 하나부터 열까지 기억하기 위해 애쓰면서도, 정작 가족에 대해서는 모르는 게 너무나도 많았습니다. 단지 엄마가 아니라 한 사람으로서의 그녀를 알아가지 못했던 시간 앞에 아쉬움이 남습니다.

당신에게 걷고, 말하는 법을 배우는 동안 팔과 다리가 자라났습니다. 시간이 흘러 어엿한 대학생이 되었습니다. 그동안 온 마음을 다해 키워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이제라도 부디 자식을 위한 삶이 아닌, 당신을 위한 삶을 살아가길 바랍니다. 마음 여린 당신을 언제나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사랑하겠습니다.

*
 
우리 남매가 어렸을 때, 아빠는 매일같이 슈퍼에 들러 과자나 아이스크림을 사 왔습니다. 그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팔을 뻗어 간식을 받는 꿈도 자주 꿨습니다. 겨울이면 양팔 벌려 코트 속으로 우리를 꼭 안아주었습니다. 겨울옷에 밴 아빠의 체취가 여전히 생생합니다.

다섯 식구 다 같이 거실에 이불을 깔고 자는 걸 좋아했습니다. 그때 아빠는 우리가 덮고 있는 이불을 접었다가 펼치는 놀이를 해주었습니다. 그걸 ‘이불 놀이’라고 이름 붙였죠. 여름 이불의 시원함과 겨울 이불의 포근한 감촉을 여전히 기억합니다. 특히 얼큰하게 술에 취해 늦게 들어온 날에도 자는 우리를 깨워 놀이해주었던 기억이 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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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는 죽은 고모와 제가 닮았다고 했습니다. 몸이 약했던 고모를 떠올릴 때면 제게 엄지손가락을 내밀곤 했습니다. 손가락을 있는 힘껏 꽉 잡아보라고 말이죠. 얼굴이 붉어질 때까지 힘을 주면 그제야 안심했습니다. 그건 단지 악력 테스트였을까요. 여전히 몸이 약한 딸이라고 생각하는지 요즘도 가끔 합니다. 그럴 때면 저는 최선을 다해 힘을 줍니다.

어떤 날은 아빠가 다친 비둘기를 데리고 동물 병원으로 뛰어갔다고 합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서 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빠, 그런다고 해서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 저의 삐뚤어진 마음을 향해 아빠는 진심으로 화를 냈습니다. 죽어가는 생명 앞에서 누가 알아주는 게 뭐가 중요하냐고 말이죠. 순간 부끄러운 마음이 들자 얼굴이 붉어졌습니다. 오늘따라 그날이 떠오릅니다.

당신은 저에게 별명을 지어줬습니다. 비록 어릴 때만큼 투정을 부리지 않지만, 이따금 ‘징징이’라고 불릴 때면 어리광을 피우고 싶습니다. 하지만 더는 그러지 못하겠지요. 그동안 애정을 담아 불러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가끔은 모진 말로 상처를 줘서, 당신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으려고 해서 미안했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이제라도 당신을 위해 닳은 몸을 돌보고 쉬게 해주세요. 마음 여린 당신을 언제나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사랑하겠습니다.

*

매일같이 꼬리를 흔들며 반겨주었던 우리 강아지들이 생각납니다. 울고 있을 때면 옆으로 다가와 볼을 핥아주고, 곁을 내내 지켜줬습니다. 그 마음이 고마운 줄 모르고 놀아 달라고 할 때면 귀찮아서 자주 모른 척했습니다. 언제나 사랑보다 동정과 연민이 앞섰던 것 같아 미안합니다. 너른 잔디밭에서 함께 구르고 뛰어다녔던 기억을 잊지 못할 겁니다.

*

속이 좁은 제가 그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의 배려를 먹고 자랐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이미 지나간 일, 일어나고 있는 일, 일어날 일들을 모두 모아 두 번씩 곱씹으면서 후회하고 또 후회했습니다. 받은 만큼 돌려주지 못해서 미안합니다. 

스쳐 지나간 사람들의 눈동자를 기억합니다. 당신은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저는 당신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몸이 떨어져 있더라도 서로를 기억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요.

덜 외롭게, 더 따뜻하게.


삶의 끝에서.
고은지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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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은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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