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om A to X] episode 4.

글 입력 2019.08.07 2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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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A to X
episode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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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슨 매컬러스

『불안감에 시달리는 소년』

「예술과 청부업자 마호니 씨」

 

 

나는 꽤 그럴싸한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서 연습을 많이 한다.

 

대학교에 막 입학하고 별로 친하지 않은 동기에게 영어 발음이 ‘구리다’는 지적을 받은 후로는 영어로 말을 해야 하는 상황이 올 때마다 ‘내가 지금 구린지’를 열심히 점검하는 습관이 생겼다. 그때 나는 얼굴이 새빨개질 만큼 창피했고 마음이 몹시 아렸다. 겉으로는 그런 지적 따위 아무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인 척 굴었지만, 여전히 그때를 생각하면 그 친구가 얄밉다.


청바지와 어울리지 않는 흰 양말을 신었던 날은 하루 종일 양말이 거슬려서 집 밖을 돌아다니고 싶지 않았다. 서둘러 집에 돌아와서 검은색, 곤색, 아무튼 흰색은 아닌 것들을 꺼내 신으며, 그래 이걸 신고 나갔어야 했는데, 하고 한탄했다. 멍청한 흰 양말을 신은 내가 머릿속을 휘저으며 뚜벅뚜벅 사방으로 걸어 다녔다. 흰 양말은 유난히 더 눈부셨다.

 

어느 자리에서든 매끄럽게 상황을 이해하고 받아칠 수 있는 사람, TPO를 꼭 맞춘 옷차림과 센스 있는 유머로 주목받는 사람, 어떤 질문에도 척척 대답을 잘하는 사람. 그들의 (해)맑음에 대해 생각하다 보면 나는 도무지 그들을 따라잡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타고나길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식이었다. 어젯밤에는 컵으로 박자를 맞춰 노래를 부르는 장기를 연습했다. 언젠가 기회가 온다면 쑥스럽지만 마련해둔 장기를 즐겁게 꺼내 보이겠다는 다짐도 했다. 다짐을 끝내자마자 나는 아마 누구에게도 이 장기를 자랑하지 못할 것을 예감했지만.

 

마호니 씨는 피아노 연주회에서 연주가 채 끝나기 전에 환호와 박수를 보낸다. 마호니 씨가 열심히 티켓을 팔아준 연주회였다. 마호니 씨의 열렬한 환호! 그리고 커다란 홀. 홀로 손뼉을 치는 마호니 씨와 그를 감싸는 무거운 정적. 마호니 씨의 박수 소리를 무안하게 만들며 태연히 이어지는 연주. 마호니 씨의 아내는 남편이 몹시 창피하다. 교양 없는 마호니 씨. 눈치 없는 마호니 씨. 마호니 씨는 연주가 끝난 뒤풀이 자리에서 사람들과 어울릴 수 없다.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자연스럽고 여유롭게 있을 수가 없다.



마호니 씨는 방구석에 홀로 서서 하이볼을 여러 잔 들이켜고 있었다. 마침내 그의 곁으로 다가온 사람은 다름 아닌 팁 메이베리였다.


“그렇게 많은 티켓을 팔아주었으니 당신에겐 가외로 박수 한 번 더 칠 수 있는 자격이 충분하지 않겠어요?”


바로 그 순간 팁 메이베리 씨는 마호니 씨가 기꺼이 받아들이고 싶은 은밀한 형제애의 윙크를 마호니 씨를 향해 천천히 보내고 있었다.


 

나는 종종 마호니 씨가 된다. 그럴 때면 마음은 아찔하게 곤두박질치고 눈물이 빠르게 차오른다. 정말이지 투명 인간이 되어서 아주 영영 사라져버렸으면 싶다. 태연한 사람들이 태연하게 살아가는 이 세계에서 맥락을 짚지 못하는 사람이 된다는 건 무시무시한 일이다. 특히 예술이 갖는 그 특권적인 지위를 생각하면 마호니 씨가 자리를 박차고 연주회를 빠져나오지 않은 게 대단하다.


나는 비단 예술이고 뭐고를 떠나서 자주 마호니 씨가 된다. 모르는 게 너무 많고 어색한 게 너무 많고, 한 번도 내게 당연한 게 주어졌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그리고 나는 종종 마호니 씨의 아내가 된다. 무안해하는 마호니 씨를 따뜻하게 안아주기보다는 질책하거나 외면하는 게 더 편하기 때문이다. 그럴 때 나는 결코 마호니 씨가 될 리가 없는 사람처럼 매정하고 냉랭하다.

 

나는 메이베리를 생각한다. 마호니 씨와 마호니 씨의 아내를 오가며 수치와 모욕, 그리고 조소와 무시를 반복하는 나는 메이베리를 생각한다. 그가 마호니 씨에게 건넨 윙크, 그 따뜻한 형제애를 자꾸 생각한다. ‘자꾸 생각해야 한다’고도 생각한다. 내가 사는 이 세계는 서로에게 야박해지기에 얼마나 좋은 세계인지. 익명의 다수를 마음껏 놀릴 수 있는 세계, 어디에도 개입하지 않을 수 있는 세계, 발을 빼고 뒤로 숨어서 함부로 말하고 비웃음을 날리기에 안성맞춤인 이 세계. 사람을 바보로 만들기 너무나 쉬운 이 세계에서 나는 종종 바보를 비웃고 그러다가 바보가 되고 멍청한 일을 반복한다. 

 

그래서 나는 마호니 씨를 아주 많이 생각한다. 마호니 씨에게 윙크를 건네는 메이베리에 대해서도 많이 생각한다. 매정하게 구는 일은 너무 쉬워서 자꾸만 그러고 싶지만, 메이베리가 한 사람이 필요로 하는 바로 그 말을 건네는 순간, 이 세계는 더 이상 이 세계가 아닐 수 있다는 걸 감각한다. 그 너머로 향하는 비좁고 비밀스러운 통로가 열린다. 어떤 가능성이 있다. 메이베리의 윙크에는.


나는 메이베리의 윙크를 연습한다.




*사진은 친구 지원이 찍었습니다.

 

   

[양나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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