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어렵지만 불가능하다곤 안했다, 영화 "롱샷"

글 입력 2019.08.05 0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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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가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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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난 프레드 저 점퍼 은근 괜찮아 보이지
 

로맨틱 코미디. 오랜만이다. 로코는 가볍게 보기 좋지만 뻔한 느낌이 들 때가 많다. 투닥거리다 정들고 사랑에 빠지거나, 첫눈에 사랑에 빠지거나 둘 중에 하나다. 끝은 해피엔딩이지. 그러니까 최애는 아니다. 그런데 <롱샷>은 왜 봤냐고? 샤를리즈 테론이 나오니까. 그리고 커플로 나오는 세스 로건과 '전형적인 선남선녀 커플'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선남선녀. 보기 좋은 커플이라는 말은 얼마나 슬픈 말인가. 남들 좋으라고 만나는 것도 아닌데 보이는 것만으로 미녀와 야수니, 이상한 커플이라느니, 오래 가지 못할 거라느니, 이러쿵저러쿵하는 이야기는 지겹다. 둘이 좋으면 그만이지. 안 그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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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살던 첫사랑이
대권주자가 될 확률은 얼마나 되게요?


<롱샷>의 다른 건 웃길지 몰라도 제목만은 웃기지 않다. 희박한 가능성 같은 걸 뜻하는 롱샷. 샬롯(샤를리즈 테론)과 프레드(세스 로건) 두 주인공 사이에 모든 가능성으로 놓여 있다. 샬롯이 꿈꾸는 미국 최초의 여자 대통령, 화려한 샬롯과 약간은 빈티지한 프레드의 연인 관계도, 프레드가 꿈꾸는 할 말 다 하고 사는 저널리스트도, 원하는 목표에는 타협하지 않고 싶은 마음도, 현명한 판단을 하는 정치인과 관료, 국민도. 모두가 롱샷이다.

그럼에도 이 영화의 결말은 해피엔딩이었다. 스캔들에 정면 승부하고, 꿈도 신념도, 커리어도 연인도 놓치지 않았다. 가장 복잡한 문제는 다행스럽게도 별다른 설명 없이 해결되었다. 로또가 당첨될 확률보다, 천둥번개를 맞을 확률보다 아마 낮은 가능성이 모두 모여 폭죽놀이를 한 셈이다. 애당초 옆집 살던 첫사랑이 대권주자가 될 확률은 얼마나 되게요? 이럴 땐 대리만족하는 셈 치고 편하게 즐기면 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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뷰티는 필력과 말빨에 있는 것인가


샤를리즈 테론은 샤를리즈 테론했고, 세스 로건은 세스 로건했다. 샬롯이 일을 할 때마다 똑부러진 모습에 치였고 멋있고 아름다운 모습에 반했다. 프레드가 샬럿의 연설문 담당이 되고 나서 왜 샬롯이 그를 좋아하게 됐는지 알 수 있었다. 사심이 없었던 건 아니겠지만 프레드가 연설문을 읽는 사람을 제대로 이해하고, 진솔함을 담으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좋았다. 완벽하긴 하지만 좀 유머감각이 부족한 이미지의 샬롯의 약점을 보완해주었다.

끊임없이 톡톡 튀는 대화를 나누고, 비슷한 취향에 열광하고, 자기 일을 할 때 빛나고, 약점을 드러낼 때 서로를 잘 어르고 달래는 둘을 보자니. 일부러 '뷰티 인사이드' 같은 은근한 메세지를 주는 기분도 든다. 샬롯이 잘생긴 수상과 만나면 비주얼도 잘 어울리고 동종 업계고 뭐 하나 빠질 것 없는데 더럽게 재미가 없다.

프레드와는 어떤가. 더 일찍 만나지 않은 게 이상할 정도다. 하다 못해 샬롯이 일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 인사치레를 하는 와중에도 프레드가 휴지에 끄적인 메모 한 장만으로도 기분 좋아질 수 있다면. 말 다한 건 아닌가. 말이 잘 통하는 것 만큼 어려운 조건이 없다. 가끔 우리는 말이 잘 통한다며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음, 저 둘 정도는 되어야 말이 잘 통하는 거라고 말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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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중간 키득거리기도 했고 빵 터지지는 부분도 많았다. 이 중에 당신이 좋아하는 게 하나쯤은 있겠지 싶게 코미디를 넣어놨다. 몸개그도 있고, 웃긴 소리나 표정도 있고, 적당히 약도 빨았고, 15금 유머에 온갖 드립이 많다. 다들 웃고 있지만 주변에 경건한 친구나 남사친/여사친, 부모님과 함께 볼 생각이라면 재고를 해보는 게 좋겠다. 혼자 웃고 있고 옆자리에서 쟨 뭐지 싶은 눈으로 쳐다보면 안되니까.

특히 영화 말미의 스캔들 영상이 좀 그렇다. 나는 일단 부모님이랑은 못 볼 것 같다. 분명 무슨 이런 영화가 있냐고 취향이 아니라고 하실 게 분명하다. 사랑하는 만큼 소중한 분들의 영화 취향을 미리 알고 즐거운 영화 관람을 하시길. 같이 본 친구와는 아주 편하게 보고 왔다. 친구는 다만 근데 리뷰를 뭐라고 쓸거냐고 걱정을 해줬다. 잔뜩 웃고 나니까 영화는 끝났는데 진짜 뭐라고 쓸지 멍한 게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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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가 내가 스크린에서 성공할 상인가
(뭘해도 걱정인 상)


개인적으로는 정치나 종교 얘기를 무겁지 않게 다룬 게 인상적이었다. 봤을 땐 웃겼는데 생각해보니 웃을 일만도 아니긴 했다. 드라마에서 대통령을 한 연기력과 훤칠한 외모 덕에 당선된 현직 대통령. 나라의 안위보다는 자신의 스크린 데뷔가 더 중요한 걸 보니 사실상 무능한 대통령이다.

그런 사람을 좋다고 뽑았으니 사람들이 바보가 아닌가 싶지만 그렇게 따지면 많은 나라 사람들이 바보다. 아니, 어쩌면 그는 머리 좋은 대통령일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원하고 관심있는 것을 잘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당연한 거 아닌가? 졸업 무도회를 2번 하는 게 환경을 지키자는 것보다 훨씬 당장 누릴 수 있는 혜택인데. 영화에서 나온 고등학교 선거나 우리 선거나 큰 틀에선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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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드사이언티스트 같은데
연락에 집착하는 언론사 사장 양반


또 좋은 일을 하자고 모여 놓고 이해관계 때문에 결국 흐지부지 되는 수많은 계획을 보고 샬롯의 계획도 그럴까봐 화를 내던 프레드 모습도 생각난다. 여러 사람이 들어간 모든 일이 그렇기도 하고 사실상 '정치'라고 하면 욕을 먹는 가장 큰 이유기도 하다. 나는 그럴 때 '현실' 정치와 '이상(이론)' 정치를 구분해야 한다고 궁시렁거리긴 한다.

좋은 의미는 다 흐려지고 물타기, 결탁, 뒷거래, 권모술수 등 부정적인 의미로 정치를 쓰는 건 '현실'의 정치지 그게 어째 처음부터 정치를 하게 된 이유였겠는가. 바르게 하려던 게 아니었다면 진작에 정치의 정자는 바뀌고도 남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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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협할 수 없는 걸 몰랐거나,
알고도 빠지게 되긴 한다


흥 넘치는 친구 랜스 목의 십자가가 그저 패션 아이템인 줄 알았던 프레드의 엄청난 착각. 샬롯과의 사이를 적극 응원해주었던 그의 긍정적인 자세와 말이 공화당의 정신에서 비롯되었다는 고백 장면이 재밌었다. 그런 충격적인 고백과 대화를 한 것 치고는 둘은 잘 지낸다. 하다 못해 밥 먹고 술 마실 때도 제일 많이 다투는 게 정치와 종교 얘기다. 그게 분명 그 사람의 전부는 아닌데 그렇게들 싸운다.

누군가에겐 가장 우선적인 것이고, 세계관이나 가치관의 척도가 된다. 친구와 프레드의 대화를 들으니 새삼 만약 샬롯과 프레드가 정치와 종교에 대한 입장이 달랐으면 어땠을까 싶다. 애당초 말이 잘 통한다고 생각하지도 못했겠지. 현실은 그렇다. 일에서는 샬롯처럼 원하는 것 3개 중에 2개를 얻었다면 1개 쯤은 타협할 수 있다고 하지만 인간관계에선 모두가 프레드 같다. 아무리 많은 것을 얻어도 그 타협할 수 없는 한 가지 때문에 어그러지고 끝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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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드가 맨날 점퍼만 입는 건 아니다


샬롯과 프레드 이 둘이 참사랑이라고 생각하게 된 시점은 그 타협할 수 없는 한 가지를 내려놓기로 했기 때문이다. 프레드는 자식같은 글을 그 안에 담긴 자신의 생각을 버린다 해도 그녀의 곁에 한 걸음 뒤에서 숨어 있기로 했다.

그녀가 원하는 꿈을 이룰 수 있도록. 샬롯은 오래 꿈꾸던 여자 대통령이란 꿈을 그를 위해서 내려 놓았다. 선거에는 이미지가 중요하니 그런 영상이 돌면 그녀에겐 치명타가 될 가능성이 크지만 그를 부정하기도, 이대로 멀어지기도 싫었으니까. 그녀는 이미지를 내려놨고 그는 초상권을 내려놨다.

모르겠다. 꼭 뭔가를 내려놓는 것만이 답이었을까? 둘 중 한 명이 뭔가를 포기하지 않으면 안됐던 것일까.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벽한 샬롯이 대인배처럼 포기까지 하니까 좀 기분이 이상하긴 했다. 게다가 그렇게 중요한 대통령 출마 선언에서. 드라마나 영화를 많이 봐서 그런가. 매드사이언티스트 같이 생긴 언론사 양반이 약점을 물고 늘어지면 왠지 나도 약점을 물고 건전한 협박을 해보고 싶은데 말이다. 저 양반도 털면 적잖이 놀랄만한 건수가 있을 것 같다.

여튼간 그럼 둘 사이에 갈등의 요소가 없었을 거라고 합리화를 해보자. 만약 그들이 내려놓지 않았다고 서로를 그 정도밖에 사랑하지 않아서라곤 말하고 싶진 않다. 기자에게 신념이 담긴 글과 정치인에게 최정점인 대권의 꿈은 쉽사리 내려놓기는 어려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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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과 사랑이 공존하지 못하는 건 자주 봤다. 죽고 못살 것 같던 사이도 지나보면 언제 그랬냐 싶고, 사랑인지 뭔지도 잘 모르며서 꿈을 포기하기엔 어리석은 것도 맞다. <라라랜드>에서 마지막 5분이 너무나 아름답고 슬픈 건 '만약 우리가 꿈보다 사랑을 좇았더라면' 놓치지 않았을 소중한 시간이 가득 담겨 있기 때문이다.

<롱샷>의 마지막 5분은 아름답지도, 슬프지도 않다. 재밌고 유쾌하다. 그들은 사랑을 선택했고, 다행스럽게 꿈도 따라왔다. 수많은 역대 영부인 초상화 사이에 있는 부군의 초상화라니. 지금은 프레드가 샬롯의 남편으로만 보이겠지만 모르는 소리다. 당장은 그가 신념대로 글을 쓰기는 좀 힘들더라도 샬롯이 대통령 퇴임하고 나면 프레드가 대통령 부부 합동 자서전만 써도 엄청 잘나갈 것 같다. 이만한 글 소재가 또 어딨을까. 최초 부군에, 남들은 못하는 경험과 극진한 사랑을 담은 필력으로 착착 쓰면.

어휴, 세상이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물으시면 한번 더 반복해보겠다. 자, 이 영화의 장르와 제목을 다시 한 번 짚어드리겠다. 장르는 해피엔딩 전문 로맨틱 코미디요, 제목은 롱샷이다. 저 포스터 문구도 보일거다. Unlikely But Not Impossible. (저기선 둘의 조합만 갖고 말한 것도 같지만) 여기서 중요한 건 현실성의 문제가 아니라 가능성의 문제다. 영화도 인정하는 부분. 그리고 우리도 인정하게 되는 부분. 어렵지만 꼭 불가능한 것만도 아니라잖나.


[장지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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