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당신을 모욕하는 건 재미있는 일이다. [사람]

글 입력 2019.08.04 1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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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기변환]비.jpg
 

비가 내리는 중이라 다들 처마 밑에 숨어 담배 피웠다. 연기가 처마 너머로 흩어졌다. 비에 묻히는지 내 쪽까지 냄새나 연기가 넘어오지 않았다. 칠 벗겨진 울타리를 아슬아슬하게 넘는 게 고작이었다.


그는 담배 피우며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처마 모퉁이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에 아이스크림이 맞지 않으려 움츠린 자세였다. 나는 숟가락을 뺏어 나도 한입 달라는 시늉을 지었다. 성가신 상대를 대하듯 먹고 얼른 수저나 돌려주라는 표정을 그에게서 본 나는 한 입 더 먹었다. 한 입 먹고 몇 입 더 먹었다.

 

그는 아이스크림에 담배를 털었다. 담뱃재 얹은 아이스크림을 내밀며 낄낄거렸다.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가 같이 낄낄댔다. 여전히 비가 내렸다. 그와 나는 비를 맞으며 취사장까지 걸어갔다. 휴가 출발 날짜를 같이 맞춰보자고 이야기했다.


동기가 이 광경을 본 모양이었다. 그의 아이스크림을 내 아이스크림으로 착각했다. 내가 먹는 아이스크림에 담뱃재를 털었다고 해석했다. 장난이랍시고 한 행동이었겠지만 지나치다는 게 그의 의견이었다. 장난의 수위를 스스로 가늠하지 못하는 그는 어리거나 싸가지 없는 이로 규정됐다. 모욕 수준의 장난에 똑같이 응수하지 못하는 나는 겁쟁이 혹은 무른 사람이 됐다. 동기의 복기에서 그는 심술궂고 경우 없는 이로, 나는 모욕을 그저 견디기만 할 줄 아는 동정의 대상 정도로 회자됐다.


옆에서 이를 들은 A선임병은 왜 화내지 않았냐며 되레 나에게 욕했다. 병신 같은 새끼. 그 정도 수준의 모욕에도 기분 나빠할 줄 모르니 물러 터졌다는 평가를 받는 거라는 식이었다. 내가 그렇게 당했으면 얼굴에 침을 뱉거나 먹던 걸 얼굴에 던졌을 거라 말했다. 화낼만한 상황에서 화내는 건 당연하다고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화낼만한 상황에서 화내는 건 당연한 이치인데 그가 말하니까 이상했다. 나를 가르침의 대상으로 보는 시선도 불편했다. 후임병을 교화시키는 좋은 선임병이라는 인장을 스스로에게 새기고 싶은 모양이었다. 나는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았다. 그의 말은 무시받지 않고 싶다면 위악적 태도를 취해야 한다는 맥락으로 해석됐다.


A선임병은 욕을 자주 했다. 시답잖은 일에도 씨발 하고 주석을 달았다. 더워도 씨발. 제설하는 와중에도 씨발. 근무에 들어갈 때도 씨발. 상급자와 하급자의 관계 구별이 분명하고 거기 그어진 빗금이 흐려지는 걸 용납하지 않는 집단이 군대란 걸 알고 있는 그는 자신이 아는 바를 잘 활용했다. 그는 후임병들에게 욕을 자주 했다. 선임병과 후임병의 관계는 군대가 공고히 지키는 상급자-하급자 관계의 전형이다. 후임병들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못함을 알고 있어서 더 자주 했다. 위악적인 언사로 후임병을 혼내면 그제 서야 교화된다고 믿는 건가. 그것보다도 그는 센 척하는 유형의 사내였다. 권위를 드러내기 좋아하기에, 자신이 얼마나 '센' 인간인지 증명하는 수단으로 욕을 하는 부류였다. 후임병을 "존나 털면" 어떻게 털었는지 어떻게 욕해줬는지 말했다. 나는 그래도 선임이니까,라고 되뇌며 그의 욕을 애써 체화했다. 듣고 있으면 정말 기분이 나빴기 때문에, 그의 욕은 특별했다.

 

못 견디겠는 건 그가 장난이랍시고 욕할 때였다. 차라리 몇 대 쥐어박는 게 나았다. 적어도 그건 지속되지 않는다. 혼낼 때 욕하는 것도 괜찮았다. 내 잘못이라 치부하고 인과응보라 생각하면 그만이니까. 볼품없다고 비웃고, 할 줄 아는 게 없다고 말하고, 왜 이렇게 말없이 있냐고 욕했다. 들을 때마다 기분 나빴다. 그는 웃었다. 기분이 상했다는 걸 표현할 수 없어서 나도 웃었다. 장난일 뿐인데 예민하게 반응하냐는 욕이 돌아올 게 분명했다. 그는 웃으면서 모독했고 웃음 섞인 모독은 장난이라는 이름으로 희석됐다. 내 마음은 희석되지 않아서 그의 모독이 여전히 고여 있다. 하지만 나는 정색하지 않았다. A를 무서워하여, 그만하라고 하지 않았다. 그가 전역할 때까지 웃었다.

 

그래서 나는 위화감을 느꼈다. 나는 취사병의 장난이 그의 모욕보다 더 높은 수위였다고 느끼지 않았다. 동기가 오해한 상황이 실상이었다 해도 마찬가지다. 한 번쯤은 자신이 뱉었던 말들을 가름하며 지나쳤다고 성찰하는 순간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말의 여파가 대상에게 오래 지속될 수도 있겠다는 반성의 순간 또한 있을 거라 생각했다. 스쳐 지나가는 시간일지라도 한번 정도는.


그는 하지 않았던 거다. 단 한 번도 하지 않았으니 화낼만한 상황에선 화를 내야 한다는 교화를 아무렇지 않게, 욕을 동원해가며 할 수 있는 거다. 그는 타인의 장난에 곧바로 반응하면서 스스로의 모욕이 얼마나 기분 나쁜지는 자각하지 못하는 셈이었다. 모욕적인 상황을 초래했다는 자각이 있다면 화를 내야 했다는 말 전후에 미안하다는 사과 정도 할 법하다. 내가 이런 말 해서 미안하지만. 내가 할 말은 아닌데. 지나가는 말이어도 그의 입에서 미안하다, 비슷한 문장이 나오는 걸 듣고 싶었다. 그는 가르침을 가장한 욕을 할 뿐이었다. 그의 가르침대로라면 나는 당장 그의 얼굴에부터 침을 뱉었어야 했다. 똑같이 돼지 새끼라고 응수하며 시퍼런 서슬을 보여줬어야 했다. 매번 웃어 보였지만 어쩔 수 없이 새어 나오는 수치심이 표정에 반영됐을 거였다. 그도 봤을 테다. 모른 체했거나 금방 드리우는 웃음이 장난에 응전하는 일종의 태도라 치부했거나. 그에게 있어 그가 뱉은 욕이나 모욕은 오롯이 장난이었다. 그는 그렇게 받아들였다. 상대방도 똑같이 받아들일 거라 의심하지 않았다. 


모욕은 문화이자 체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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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기 B는 날 보며 자신이 자살하기 직전까지 괴롭혔던 고등학교 동급생과 닮았다고 말했다. 그는 웃고 있었다. 양 입꼬리가 올라가고 눈자위는 반달 모양으로 일그러졌다. 그는 웃었다.


B의 말을 들은 생활관 선임들도 웃었다. 흥미진진한 표정을 지으면서 들을 준비가 됐다는 반응이었다. 어떻게 때렸고 어떻게 놀렸는지 점점 구체적이 돼 갔다. 나는 밖으로 나갔다. 화장실 안에 들어가 변기에 앉았다. B가 밖으로 나가는 걸 확인한 다음 생활관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B는 사람들과 금방 친밀해지는 부류였다. 10분 안에 낯선 타인과 금방 킬킬 거리며 웃고 떠들 수 있는 사람이었다. 불편함과 어색함을 몰랐다. 시스템에 적응하기도 벅찼던 나는 선임병들과 금방 농담을 주고받는 그가 부러웠다.


B의 농담은 재미있었다. 농담의 대상은 주로 그와 동반 입대한 동기 C였다. 모든 선임들이 B의 농담에 킬킬거렸다. C는 키가 작다, 키가 작아 여자들이 좋아하지 않는다, 자신은 키가 크고 남자답다, C가 고백받은 적은 한번뿐이다, 자신이 고백받은 적은. 기억하는 것만 수차례다, C는 무식하다, 히틀러가 누군지도 모른다, 상식 수준의 역사도 모를 만큼 C가 무식한데 반해 자신은 적어도 역사만큼은 열심히 공부했다, 못 믿겠다면 아무 문제나 물어보라.

 

그의 농담은 매번 C와의 비교로 귀결됐다. C의 응답을 큰 목소리의 구체적 예시나 비웃음으로 차단하여 자신의 비교는 타당한 논리에 의거하여 만들어진 것이라도 되는 양 말했다. C가 발끈하면 이 발끈함마저 장난스럽게 받아들이며 더 짓궂은 농담으로 자리에 있던 다른 이들을 웃겼다. C는 웃고 떠드는 자리에서 진지해질 수 없는 셈이었다. B는 자신의 모욕 비슷한 장난에 타인이 가담하게끔 잘 유도했다. 일단 웃으면 농담에 동조하는 거였다. 나를 포함해 부대 대부분의 병사가 B의 비교가 줄곧 이어질 수 있게 웃었던 적이 있었다.


자살 직전까지 괴롭혔다는 말은, 짓궂은 장난을 표현하는 과장된 수사인가 아니면 누군가를 자살로 내몰 수 있을 만큼의 '힘'에 대한 증명인가. 과시하는 기색이 전무했다고 말할 수 없지만 그는 그저 평소처럼 농담을 하는 거였다. C와의 비교를 말할 때처럼, 재미있는 주제가 등장하고 거기 걸맞은 자신의 서사를 풀어나갈 때처럼, 그는 자신의 이야기에 도취해 있었다. 듣는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B는 짓궂은 장난 정도를 넘은 폭력적 수위의 언어를 발화하고 나면 더 친해지기 위해 구사하는 장난이라거나 이미 친한 이니까 할 수 있는 거 아니겠냐고 말했다. 정당화가 아니었다. 그는 진심이었다. 여전히 그는 웃었다.

 

거기서 모멸감은 유희 거리였다. 대상을 세워두고 모여서 혀로 헐뜯으며 킬킬 거리는 풍경이 익숙하다. 그 풍경을 친밀감 도모의 과정이라 치부하니 미안하다는 말이나 죄의식은 친밀감 형성을 지연하는 요소일 뿐이다. 거기서 장난을 장난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모멸감을 느끼면 별걸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유별난 새끼'다. 그럴 필요 없다.


어느 것이나 유희 거리가 될 수 있다. 그리하여 후임병, 선임병뿐 아니라 어느 것이나 모멸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선임병 D는 동성애는 정체성이 아니라 질병이라 말했다. 그것이 질병이 아니라 성 정체성으로 규정될 수 있었던 건 상위계층에 동성애자들이 있어서고, 그들의 공모가 질병을 성 정체성으로 정의 내릴 수 있을 만큼의 권위를 갖춰서 그렇다는 맥락이었다. 그 맥락을 설명할 때 D는 재미있어 보였다. 후임병 E는 아 그런 겁니까, 라며 이해했다는 반응이었다. 이어서 그는 왜 동성애가 '좆'같은지 장황하게 늘어놨다. 자신이 아는 동성애자의 기행을 흥분해서 쏟아냈다.

 

장애인이 등장하는 프로그램이었다. "저렇게 살 거면 왜 살아, 죽고 말지. 나 같으면 자살할 거야" 선임병 E는 킬킬거렸다. "인성 쓰레기"라고 맞받아치는 선임병 F도 킬킬거렸다.


저렇게 생긴 년들은 집구석에 처박혀 썩어야 되는데. 남성은 여성의 외모를 검열하고 평가해야 할 의무가 있는가. 그것보다도 그저 웃기 위해서다. 나를 포함하여 이 집단의 유희를 위해, 재미있어하기 위해 내뱉은 말들이다. 저 말을 필두로 '덜' 생긴 여성들이 TV에 등장할 때마다 그들의 외모를 비하하는 수사는 더 과격해진다. 낄낄거림이 이어진다.


'이데올로기'는 인간과 세계에 대해 한 집단이나 다수가 공유하는 체계화된 생각들을 통칭하는 언어다. '모멸' 혹은 '혐오'는 이데올로기다. 내가 속한 집단뿐 아니라 대다수가 혐오의 가치관을 공유한다. 대상의 약점을 파고들어 혐오하고 모욕할 당위를 만들어내는 체계가 공유된다. 일간베스트를 기원으로 혐오 발화를 발언하는 커뮤니티의 접속자 숫자는 포털사이트의 그것에 육박한다.


‘왜’를 다루는 담론이 여럿 등장했다. 피라미드의 하부에 위치하는 군상이 스스로가 시달렸던 통제와 억압을 혐오 발화로 배설하여 해소하는 것임을 언급한 담론이 주류다. 배설의 욕망이라는 결론을 내포한 셈인데, 온당한 이해는 아니다. 거기서 자기의 사회적 신분을 밝히는 글이 지속적으로 게재된다. ‘주작’이라는 조롱을 차단하기 위해 조작할 수 없는 형태로 자기 신분을 발언한다. 의사, 교수, 명문대학생, 등 일정 이상의 권위나 지위를 갖춘 소속이라고 규정되는 군상도 거기서 혐오 발화를 즐긴다. ‘ㅋㅋㅋ’ 따위의 웃음소리가 첨부된다.


혐오는 이데올로기인 동시에 놀이문화의 일종이 됐다. ‘왜’인지는 자명하다. 재미있으니까. 우리는 재미있어서 당신을 놀리고 모욕하고 조롱하며 사회적 약자에게 수치심을 유발한다. 일베에서 통용되던 ‘-충’이란 언어가 주류 언어로 부상함이 이를 증언한다. ‘맘충’, ‘진지충’ 등의 언어를 구사하며 문제의식을 느끼는 이는 아무도 없다. 진지한 문제 제기는 ‘진지충’이나 ‘씹선비’로 폄하돼 집단에서 밀려난다.

 

군대에서 혐오 언어를 발화한 대부분도 보통의 인간이었다. 절대적 악인이 아니다. 재미있어서, 그것을 집단의 유희를 위한 수단쯤으로 여긴 이들이 대다수다. 억울하고 모욕당해 기분 나쁜 순간도 있었지만, 그들이 어울릴 수 없는 인간은 아니었다. 나는 그들과 같이 노동했고, 비합리성에 마냥 굴복하기 싫어 연대했고, 애도의 순간에 함께 울었다. 그렇다고 그들을 변호할 마음은 추호도 없다.


나는 선임병이나 동기의 혐오 발화에 같이 웃었다. 배가 침몰하고 ‘세월이 가면’ 노래를 세월호 가면이란 가사로 개사해 불렀다는 동기의 말에 웃은 적 있다. 전 여자 친구를 강간하고 싶다는 말에 웃음으로 동조한 적 있다. 집단 중심부로 편입되고 싶어 그랬다는 변명은 역겨운 변명이다. 생존하기 위해 어쩔 수 없다는 변명도 역겹기는 마찬가지다. 어쩔 수 없다는 의식 이외에 거기서 웃음을 발견한 거다. 나는 스스로를 미화하고 싶은지 모르겠다. 자기 고백을 통해 자기 윤리성을 입증하려는 시도로 이 글을 쓰는 셈이다. 그러나 스스로를 변호하지 않으려면 일단 나도 같은 인간임을 말해야 한다. 나는 웃음에 동조하지 않았다는 뉘앙스를 내포하여 다른 인물과 ‘나’를 구별하는 건 위선이라 생각했다. 나는 분명 아주 즐겁게 웃었다.


재미있어서. 웃겨서. 당신을 놀리고 조롱하고 모욕하는 게 그저 이 시시한 구석에 난장 같은 재미를 부여하기 위해서가 됐다. 시시콜콜 대화를 이어가기 위해. 재미를 위해. 모멸감은 소비의 대상 정도로 격하됐다. 문제의식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다.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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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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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
  •  
  • 노을
    • 쉽게 남을 가르침에 대상으로 여기지 않아야겠어요. 왜 이렇게 혀ㅁ오 즐거워하는 사람이 많을까요. 이러는 저도 조언이라는 핑계로, 무리에 끼고 싶다는 안일함으로 누군가를 모욕하진 않았는지 반성합니다. 모두가 조금 더 예민해지는 사회가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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