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혐오 사회에 놓는 예방주사 - 레라미 프로젝트 [공연]

연극 <레라미 프로젝트> 후기
글 입력 2019.07.25 0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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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8일 목요일, 드디어 <레라미 프로젝트>를 관람하게 되었다. 프리뷰를 작성할 때 보았던 몇 장의 사진들, 단편적인 풍경들이 합쳐져 무대는 묘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정면으로 눈에 먼저 들어온 것은 ‘HATE IS NOT A LARAMIE VALUE’라고 빨간 글씨로 적힌 흰색 간판이었다. 그리고 막이 오르기 전까지 방송에서 송출되고 있는 듯한 앵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별 것 아닌 소품들로 꽉 찬 무대는 여백이 크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왜인지 쓸쓸해 보였다. 새벽 어스름처럼 빛나는 조명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소품들이 대개 낡아 보여서? 혹은 드문드문 영어 문장 사이로 들려오는 ‘매튜 셰퍼드’의 이름 때문이었을까. 프리뷰를 작성했던 탓인지 무대에서 포착되는 모든 것들이 작품에 대한 힌트인 것 같았다.


힌트들로 머릿속이 긴장된 채로 막은 올랐고, 굉장히 짧은 두 시간이 흐르고 난 후 막이 내렸다. 그 두 시간 동안에는 눈가가 젖기도 하고, 심장은 빠르게, 천천히 뛰기를 반복하였다. 누군가는 극단원들이 올리는 마지막 인사에 기립하여 갈채를 보내기도 하였다. 정신없이 지나가는 순간들에 나는 기립할 타이밍을 놓쳤지만, 박수의 무게는 같았다고 본다. 나는 기립 박수 대신 나의 조악한 글로써 다시 한 번 감상을 전해보고자 한다.

 

 


연극 속의 연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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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입부에 헷갈렸었던 부분이다. 극단원들은 전부 흰 셔츠에 청바지를 입고 나와 ‘극단원’을 연기한다. 우리가 현실에서 구사하는 말에 가까운 말투에 나는 그것이 실제인지 연기인지 혼동했고, 내가 프리뷰를 잘못 이해하고 작성했던걸까 걱정하기 까지 하였다. 다시 한 번 확실히 해둬야 할 점, 극단 실한은 과거 ‘레라미 주민들을 직접 취재했던 극단원’과 ‘레라미 주민들’을 동시에 연기한다.


이는 연극만이 가질 수 있는 흥미로운 부분이다. 영화에서는 다른 캐릭터를 연기하기 위해 CG를 입힌다든지, 반전된 느낌의 배경음악과 구도를 사용하는 등 기술과 연출이 중심이 되는 장르이지만 연극은 이에 비해 사람중심적인 작업에 속한다. 공간적인 제약이 있는 만큼 ‘상징’이 더 큰 힘을 가지며, 이를 통해 연극은 간단한 방법으로 ‘차이’를 생산해낸다.


<레라미 프로젝트>에서 흰 셔츠와 청바지 복장은 ‘극단원’의 신분을 상징하는 복장인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무언가를 덧입음으로써 극단원은 ‘주민’의 신분을 갖게 되고, 의상을 교체하고 어조를 다르게 꾸며가며 다른 역할으로의 변신을 이루어낸다. 한 사람이 중년과 청년을 동시에 연기하고, 각 잡힌 바텐더와 후줄근한 운전수를 동시에 소화해내는 모습은 극단의 탄탄한 내공을 쉬이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어떤 혐오인가



내용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실화를 다룬 작품에다 피해자와 가해자가 명확한 살인 사건이다 보니 프리뷰에 요약한 줄거리 외에 부가적으로 설명할만한 내용은 아니다. 대학생 매튜 셰퍼드가 청년 두 명으로부터 무차별 폭행을 당해 죽음에 이르렀다. 이것이 사건의 전부이다.

 

다만, 사건이 발생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극단원들이 레라미 주민들을 대상으로 인터뷰를 행한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연극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것은 평소 주민들이 매튜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었는지, 마을 사람들이 자신의 마을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는지 등이다. 대체로 마을 사람들은 보수적인 성향을 띠고 있으며, 그들은 일관되게 이렇게 대답한다.

 

“우리 마을의 원칙은 철저한 불간섭이다.”

 

누가 어떤 짓을 하든지 간에 일절 간섭하지 않는다고 그들은 자부한다. 그러나 이 말이 내포하는 뜻은 이러하다. 첫 번째는 자신들의 정의에 따르면 레라미 사람들은 간섭을 하지 않는 사람들이니 사건의 가해자들은 자신들과는 관련이 없는 예외적인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즉, 자신들과 엮지 말아달라는 말이다.

 

두 번째는 피해자가 원인을 제공했을 것이라는 뜻이다. 이는 전자보다 조금 더 ‘혐오’와 직접적으로 닿아있는 말이다. 매튜는 동성애자니까 동성인 그들을 꼬셔냈으리라는 혐오적 발상이 표면에 드러난 것이다. 그러나 이는 평소 매튜를 긍정적으로 보고 있던 그의 친구들이나, 그가 자주 방문하던 바 직원의 증언을 통해 쉽게 반박된다. 매튜는 분명히 진중하고 매너를 지키는 사람이었다.

 

사건을 관망하고 있는 우리의 입장에서 더 경계해야 할 것은 첫 번째와 같이 ‘관용의 탈을 쓴 혐오’이다. 잔혹한 범죄자와 거리두기를 하며 자신들은 멀쩡한 사람이라고 자부하고 있는 마을 사람들은 사실 전혀 그렇지 않다. 그들이 간섭하지 않는 것은 ‘선심’을 베푸는 것과 같다. 동성애자들 이상한 존재이지만 자신들은 선한 마음으로 관용을 베푼다, 이런 차원의 것이다.

 

그리고 ‘간섭하지 않는다’는 명목으로, 주민들은 마치 살인사건의 가해자와 자신들 사이에 바리게이트를 쳤던 것처럼 동성애자들에게도 똑같은 벽을 친다. 간섭하지 않을 것이니, 너네도 선을 지켜라. 그들의 관점에서 동성애자들은 결코 동등한 위치에 설 수 없다. 그래서 많은 동성애자들이 마을에 살기를 체념하고 떠났고, 남아 있는 사람들은 불안감에 시달려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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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 장황하게 늘어놓았지만 결국 이것은 앞서 언급했던 사진의 간판이 함의하고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우리는 혐오를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떳떳하게 혐오를 부정하는 그들의 마을에서는 아래와 같은 말이 망설임 없이 내뱉어진다. “글쎄요, 저도 동성애는 좀 그런데, 살인은 나쁜 거잖아요.” 전혀 악의가 없었던 한 대학생의 말이다.




잔인한 묘사에 대하여



매튜의 죽음은 사건을 전담했던 형사와 목격자 등의 진술로 인하여 구체적 정황을 띤 채 우리에게 전달된다. 매튜가 입은 외상에 대한 묘사는 너무나 끔찍해서 비가시적임에도 불구하고 오감으로 느껴질 정도이다. 이를 전달받은 우리는 몇 줄의 글로 요약됐던 매튜의 희생을 접했을 때와는 비교할 수 없는 크기의 분노와 허망함을 느끼게 된다.

 

사람은 잔인한 폭력을 당한 것에 대해 자신의 일처럼 분노하게 마련이다. 최근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지난 감이 있지만, ‘강서구 피시방 살인사건’이 그런 점을 선명하게 느낄 수 있는 사건이었다.

 

사건의 기사를 보기 전, 지인으로부터 피시방 알바가 살해당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그것이 여느 살인 사건에 지나지 않는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우연히 유튜브에서 사건을 총정리한 영상을 보게 되며 피해자를 담당했던 의사의 매우 구체적인 증언을 접하게 되었고, 비로소 공포심과 분개심이 마음 속에서 피어오르게 되었다.

 

많은 국민이 분노를 느끼며 사건은 청원에도 오르는 등 여타의 살인 사건들과는 다른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이것을 보며 많은 이들이 관심을 갖게 되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이정도의 처참한 사건이 이전에도 존재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살인의 역사는 길고, 미친 놈은 언제나 세상에 존재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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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의 마땅한 분노가 언제든지 억제되고 조작될 수 있다는 것이다. 프리뷰만 보았을 때와 연극을 보았을 때 분노의 크기를 비교할 수나 있겠는가. 우리는 많은 사건들의 ‘프리뷰’만을 접하는 경우가 많다. 분노해야 할 사건을 그저 잠깐 측은하고 지나쳤을 수도 있다.

 

물론, 이에 대해서 반대의 의견도 나옴직하다. 감정이 억제될 수 있다면, 반대로 사방으로 분출되게끔 선동하는 조작도 있지 않냐는 의견 말이다. 나는 오히려 후자의 경우를 조심하는 편이었다. 그렇기에 연극을 볼 때도 작품에 선동적인 면이 있지 않은지 경계하며 지켜보았다. 실제로 작품 내에도 정부가 이 사건에 주목하는 상황을 동성애자들의 선동으로 주장하는 인물이 등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이것만큼은 자신 있게 주장할 수 있다. 작품은 편향적이지 않다. 도의를 위해 본능을 억압하자고 하지도 않고, 주민들의 다양한 의견은 곡해 없이 전달되고 있다. 그리고, 나의 진정한 반성은 분노만을 통해서 이루어지지도 않았다. 내 마음을 가장 크게 울렸던 부분은 연극의 후반부에 등장하는 사건을 맡았던 한 형사의 말이었다.

 

“그들이 안고 살아가는 불안감이, 정말이지 말도 안 되는 거더라고. 인간이 매일 두려워하며 살 순 없는 거야. 그건 사는 게 아니라고.”

 

받아 적거나 녹음한 게 아니기에 원래의 대사와는 다를 테지만, 극 중 형사는 동성애자들이 일상처럼 겪는 불안감에 대해 깨닫고 나서 자신을 깊게 반성하고 심경의 변화를 겪은 인물이다. 그들이 평소 그만큼의 불안감을 살아갔다는 형사의 진술이 나에게는 매튜의 희생만큼이나 불편한 진실이었다.


*

  

레라미의 동성애자들이 일상 같은 두려움을 안고 살아간 것은 과연 몇 년에 한 번 일어날까 말까한 극악무도한 살인 사건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관용을 가장한 주민들의 멸시 때문이었을까. 살인자 연기는 인정해주면서 동성애자 연기는 죄악이라며 반대하는 부모들의 마을에서, 매튜를 살해한 청년들이 태어난 것은 정말로 예외적인 일이었을까.

 

작품은 우리가 진정으로 경계해야 할 혐오를 알리고 있다. 증상이 나타나야만 병이 있는 것이 아니듯이 혐오는 잠복해있는 균처럼 사회 곳곳에 숨어들어 있다. 우리가 평화로 착각하고 있는 시기가 실은 잠복기가 아닌지 우리는 예의주시해야 할 필요가 있다. <레라미 프로젝트>는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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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소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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