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view] 불편한 프레이밍, 하지만 벗어날 수 없는. - 메이크업 투 웨이크업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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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예쁘게 생기셨네요? 좋으시겠어요.
(1) "너 좀 예쁘게 생겼다."
(2) “너 꽤 예쁘게 생겼다.”
(3) “너 정말 예쁘게 생겼다.”
무엇이, 혹은 누군가가 예쁘고 예쁘지 않은지 평가를 내리기 위해서는 사전에 기준을 마련해 놓아야 한다. 쉽게 말하자면 이상적인 모델을 하나 정해놓는 것이다. 특정한 무언가를 예쁨의 보편적인 기준으로 정해 놓은 상황에서, 그 기준을 상대방에게 들이미는 것. 이것이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예쁘다는 말이나, 예쁘지 않다는 말을 쓰기 위해 동원되는 일련의 과정이다.
프레이밍이 시작되는 과정이라고도 볼 수 있다. 사람마다 선택하는 미의 모델이 제각기 다른 만큼 아름다움의 기준을 정하기 위한 과정도 가지각색이겠지만, 자신이 정한 기준으로 타인에게 지극히 결과론적인 평을 내린다는 것은 비슷하다. 그리고 제각기의 기준에 예쁘다는 평을 비교적 좋게, 예쁘지 않다는 평을 좋지 않게 여긴다는 경향성이 들어간다는 점도 비슷하다.
보통 상대방으로부터 예쁘다, 혹은 잘생겼다는 말을 들으면 칭찬으로 받아들인다. 이 문장이 함의하고 있는 바는 굉장히 많다. 우선 첫 번째로 “보통”이라는 단어가 쓰인다는 점에서, 예쁘다는 평가가 보편적인 좋음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두 번째로 사람에게 예쁘다, 예쁘지 않다와 같은 외관에 대한 평가가 사람들 사이에 만연하다는 것. (1), (2), (3)의 평가가 모두가 “예쁘다”라는 주술어를 사용하고 있다고 해서, 무작정 듣기 좋은 말들인 건 아니다. 외관에 대한 평가로 쓰일 때, “예쁘다”는 말은 사람에게 긍정적인 영향만을 주지 않는다.
거듭 강조하겠다. 절대 자뻑이 아니다. 그렇지만 여태껏 살아오며 저런 비슷한 말들을 꽤 들었던 건 사실이다. 지금보다 몇 년은 어렸을 때, 그러니까 대충 중학교 시절 즈음에. 모두가 외모에 대한 관심을 본격적으로 가지기 시작하는 나이에, 나 또한 아름다움을 추구하려는 시류에 서서히 편승하고 있었다.
그 때 당시로는 저런 말을 들었을 때 마냥 기분이 신났다. 남들이 보기에 내 얼굴이 못 봐줄 정도는 아니구나, 나 좀 괜찮은 편이구나라고 내심 좋아했었다. 그 후로도 고등학교 시절을 거쳐 지금, 대학생이 되어서까지 내 외모에 대한 전반적인 평가는 위의 세 가지 틀을 벗어나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지금의 나도 어렸을 적 내가 그랬던 것처럼 평가를 들으면서 즐거워하고 기뻐할까? 아니, 좋다고 기뻐했던 그 시절에도 마냥 기뻐하기만 했을까.
분명 그렇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더 예뻐지기 위해 안간 힘을 쓸 때나, 얼굴에 뾰루지가 나는 등 평소의 얼굴 상태를 유지할 수 없는 시기에 직면할 때. 굉장한 스트레스를 받았다. 더 이상 내가 예쁘다는 소리를 듣지 못하면 어쩌나, 나의 가치가 떨어지는 게 아닌가. 타인의 평가에 의해 그날의 기분이 좌지우지되었고, 거울을 바라볼 때는 나의 신체 뿐 아니라 내 몸, 얼굴에 딸려오는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들도 함께 비추어지곤 했다.
나를 향해 쏟아지는 수만 가지의 프레임들로부터 나는 자유로울 수 없었다. 여전히 누군가는 글을 읽으면서 잘난 체 하는 게 아니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애초에 내가 절세미인도 아니지만, 예쁘다는 평가로 인해서 괴로워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들이 배부른 소리로 치부되는 현실이 참 안타깝다. 절대 그런 것이 아닌데도.
2. 좋죠. 그런데, 마냥 좋지만은 않은데요.
어쩌면 나는 그동안 많은 사람들로부터, 그리고 사회에서 정해진 보편적인 미의 틀로부터 굉장한 고통을 받아왔을지 모르겠다. 코르셋이라는 이름으로 은유적으로 드러나곤 하는, 그간의 사회에서 통용되어 왔던 미의 기준들. 머리는 최대한 길어야 하고, 하늘하늘한 블라우스와 치마를 입어야 하고, 진한 화장보다는 청순한 느낌을 연상시키는 화장을 해야 하고. 조신하게, 조심스럽게 걸음걸이를 유지해야 하고. 사회적으로 탈코르셋 운동이 회자되기 시작한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개인마다 예쁘다는 기준을 세우는 것 자체는 비난의 화살을 던지기 어렵다.
고대의 철학자들이 활동한 시점부터 인간은 아름다운 것을 추구해왔고, 아름다움이란 무엇인지 끊임없이 질문을 던져왔다. 즉, 똑같은 두 개의 사물이 있을 때 조금이라도 더 아름다운 것을 가지고자 하는 건 본능에 가깝다는 거다. (위대한 철학자인 소크라테스도 생전에 자신의 얼굴이 추하다며 괴로워했다.) 무엇이 아름다운지 고민하는 과정에서, 무엇을 아름답다고 칭하겠다는 기준은 자연스럽게 딸려온다. 이 기준을 가지고 사물이나 자연현상, 또는 인간을 평가하는 것 자체는 통제할 수 없는 본능과도 같다. 당장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만 해도, 상대의 첫인상이 어떠한지 판단할 때 결정적으로 관여하는 요소는 그 사람의 외관이 아닌가.
문제는 외관의 아름다움을 판별하는 기준으로 상대방의 모든 것을 평가할 때 발생한다. 그 사람의 됨됨이가 어떠한지, 어떤 능력을 보유하고 있으며 종합적으로 어떠한 사람인지와 같은 판단이 외모라는 요소로 인해 왜곡되는 경우. 아름다운 사람과 아름답지 않은 사람이라는 일차적이면서 이분적인 평가로 그 사람을 특정한 프레임 안에 가두는 것. 코르셋은 이러한 습관에서 생겨난다.
<메이크업 투 웨이크업 2>는 이렇듯 사람이 사람에게 씌우는 코르셋을 이야기하는 작품이다. 아름다움에 관심이 없거나 최신의 메이크업 트렌드를 좇지 못하는 사람들이 도시에서 실종되는 이야기. 생존할 수 있을 만큼 아름답냐는, 연극의 캐치 프레이즈는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문제를 제기하는 외모지상주의의 병폐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3. 그렇지만 어쩌겠어요. 저도 남들한테 똑같이 그런 말 하는데요.
아직 연극을 관람하기 전이라, 이 작품이 정확히 어떤 주제의식을 공유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외모지상주의나 객관화된 아름다움이 만연한 사회의 문제점을 지적한 일련의 작품들이 그러하듯, 이 작품 역시도 결과적으로는 비슷한 교훈을 던지지 않을까. 하나의 아름다움을 프레임화해서 그 프레임에 사람을 가두지 말아야 한다는. 그 기준에 따라 사람의 가치를 독단적으로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는. 예전에는 이런 분위기의 공연들을 보거나 책을 읽으며 외모지상주의가 만연한 주변의 현실에 절망하기도, 분노하기도 했다. 너무나도 당연한 이야기다. 단순히 외관만으로 사람의 모든 것을 확정할 순 없지 않는가.
그런데 요즘은 내가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있나, 하는 생각도 든다. 예쁘다는 말은 단순히 칭찬만이 아니다, 외모 평가는 사람을 병들게 한다, 외모지상주의가 판을 치는 사회가 통탄스럽다는 등. 나는 부조리함을 불평할 만큼 충분히 자격이 있는 사람인가? 당장 나부터도 타인의 외모를 보고 나의 기준에 따라 그 혹은 그녀의 첫인상을 평가한다. 굉장히 아름답다, 정말 잘생겼다. 평범하구나, 개성 있게 생겼구나. 외모지상주의의 부조리를 체감하는 와중에도 나 역시, 그러한 사회의 풍토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나도 남들한테 똑같이 나만의 기준을 들이미는데.
그래서 나는 이번 연극을 관람하며, 사회의 부조리에서 파생되는 문제점들을 인식하고 이를 비판하는 데에 그치지 않을 것이다. 과연 우리 사회가 이러한 부조리를 완전히 해소시킬 수 있는지—어쩌면 우리가 뫼비우스의 띠처럼 벗어날 수 없는 굴레를 돌고 있는 게 아닐지, 다소 체념적인(?) 관점에서 분석할 것이다. 이제는 그래야만 할 것 같다.
메이크업 투 웨이크업 2- Makeup to Wakeup 2 -일자 : 2019.07.26 ~ 2019.08.11시간평일 8시주말 4시월 쉼장소 : 홍익대 대학로 아트센터 소극장티켓가격전석 30,000원제작사막별의 오로라후원한국문화예술위원회관람연령만 13세이상공연시간80분
[이소현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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