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너도 나처럼 울면 좋겠어 [영화]

기괴한 파라다이스, 영화 <미드소마>
글 입력 2019.07.18 2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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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오피니언은

영화 <미드소마>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공포 영화란 무엇인가. 무엇이 장르를 공포로 정의하게 할까. 겁에 질린 사람들? 쉼 없이 어두컴컴한 배경이나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긴장감? 시체의 훼손을 잔인하게 보여주는 고어 장면? 아니면 귀신이나 살인마의 존재?


겁에 질린 사람은 어느 영화에나 나온다. 테러에 관한 영화, 히어로물, 하다못해 로맨스물에서도 절정에 이르러선 겁에 질린 사람이 나올 수 있다. 쉼 없이 어두컴컴한 배경 역시 공포 영화가 아니어도 자주 나온다. 주로 어디 갇혀 빠져나가야 하는 스릴러물이나 어두운 곳이 배경인 히어로물에서.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긴장감이 없는 영화를 잘 만든 영화라고 할 수 있을까? 같은 종류의 긴장감은 아니겠지만, 병의 치유를 이야기하는 감동 실화 영화 같은 경우도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긴장감은 존재한다. 그렇다면 역시 시체의 훼손을 잔인하게 보여주는 고어 장면일까. 따지고 보면 드라마 ‘한니발’이나 ‘왕좌의 게임’에서도 장기가 튀어나오거나 뜯기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나 사람들이 ‘한니발’이나 ‘왕좌의 게임’을 공포물, 공포 드라마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역시 귀신이나 살인마의 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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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샘에선 공포 영화를 “두렵고 무서운 느낌이 드는 영화. 주로 귀신이나 유령 등을 소재로 한다”라고 정의한다. “주로” 귀신이나 유령 등을 소재로 하므로 비현실적 존재가 등장하지 않아도, 두렵고 무서운 느낌이 든다면 그 어떤 장르도 공포 영화가 될 수 있다는 뜻이다. 이 정의를 바탕으로 생각해본다면, 영화 ‘미드소마’는 내게 결코 공포 영화가 될 수 없다. 역하고 징그럽거나 짜증 날지언정 무섭거나 두려운 느낌이 들지 않기 때문이다.


영화에 나오는 캐릭터 중 겁에 질린 사람은 4명 정도다. 백야현상이 일어나는 스웨덴 야외를 배경으로 하는 탓에 어두운 장면도 그리 많이 나오지 않는다.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긴장감은 말했듯 모든 영화의 필수품이다. 시체의 훼손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고어 장면만이 이 영화를 ‘공포 영화’의 언저리에 가져다 두지만 타 영화처럼 탈주자나 실종자의 죽음을 끊임없이 보여주지 않는다.


물론 어디까지나 내 기준이다. 많은 사람이 이 영화를 공포 영화로 정의내렸다면 반드시 그 이유가 존재한다. 누군가가 보기에 이 영화는 굉장히 불쾌하고 스트레스받는 공포 영화가 될 수 있다. 이 윗부분만 읽고 안일하게 영화를 보는 사람이 없길 바란다. 객관적으로, 누가 이 영화 진짜 별로라고 한다면 나도 그럴 수 있다고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속을 필요는 없다.


어찌 되었건, 나는 이 영화를 치료 영화로 정의하고 싶다. 비록 호르가 마을이 어딘가 비정상적이고, 21세기 윤리관에서 많이 벗어난 문화와 종교를 이야기하고 있긴 하지만, 주인공은 자신이 살던 미국보다 스웨덴의 작은 마을 호르가에서 더 큰 충족과 행복을 느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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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 호르가 마을은 여전히 고대 토착 신앙을 신봉한다. 결혼이라는 풍습이 없어 아이는 모두 같이 키우고 잠도, 식사도 모든 인원이 같은 장소에서 한다. 작은 마을의 전원이 한 가족이다. 18세까지는 봄으로, 18세부터 36세까지는 순례를 떠나는 여름으로, 36세부터 54세까지는 일하는 가을로, 54세부터 72세까지는 삶의 멘토가 되는 겨울로 생각한다. 72세가 지난 노인은 절벽에서 뛰어내려 명예롭게 죽고, 그즈음 태어난 아이가 노인의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는 풍습이 있다. 노인의 영혼이 아이에게 가 윤회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 영혼의 존재를 믿기에 죽은 나무를 ‘영혼의 나무’라고 부르며 신성하게 여긴다.


모두 한 가족이기 때문에 메시아, ‘눈이 뜨여진 자’의 윤회가 필요할 때를 제외하곤 근친상간을 금지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아이를 낳느냐. 여름의 사람이 순례의 길을 떠났다가 돌아올 때 외부인을 데려온다. 호르가 사람은 자신이 정한 외부인과 교미한다. 이러한 교미는 19금 영화 타이틀에 맞게 준비한 자극적인 정사 장면이라기보다 개체를 늘리기 위한 행위처럼 느껴진다. 성행위를 할 때 가을의 여성이 모두 지켜본다. 호르가 여성이 두려워하면 달래주고 응원해준다. 외부인 남성이 힘을 제대로 못 쓰는 거 같으면 뒤에서 도움을 주기도 한다.


불편하고 거리감이 느껴지는 문화다. 하지만 익숙하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아마존 족은 모계사회이기 때문에 정기적으로 타국을 침략했다. 그 후 호르가 마을 사람처럼 교미한 뒤 외지인은 모두 죽이는 식으로 개체를 유지했다고 알려진다. 살아있는 사람을 매장해 죽이던 고대의 순장 풍습은 호르가 마을에서 72세가 지난 사람을 절벽에서 떨어지게 해 죽이는 풍습과 비슷한 면이 있다. 씨족 사회를 이루는 것도 고대의 풍습과 똑같다.


과거에 비슷한 풍습이나 전설이 있었다고 해서 호르가 문화의 살인 풍습을 합리화하고자 하는 마음은 없다. 문화라는 이유로 비도덕적인 부분도 이해하게 된다면 사회 약자층을 보호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만 이러한 호르가의 문화를 완전히 이상한 것으로 배척하기에는 이미 오랜 세월 세상 곳곳에서 실재했다는 말을 먼저 하고 싶다. 이 영화는, 비현실적으로 보이지만 모든 것이 현실적인 상황과 배경 아래 진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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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대니는 현재 정신과에서 진료받는 중이다. 그는 남자친구인 크리스티안에게 감정적으로 많이 의지하는 한편 그런 자신이 지겨워져서 크리스티안이 떠날까 봐 항상 불안해한다. 힘들 때 돕는 게 연인 관계라는 친구의 말도 불안에 집어 삼켜져 들리지 않는다. 한편 크리스티안은 자신에게 지나치게 의존하는 대니가 부담스러워 1년 정도 헤어지는 걸 고민했으나 우유부단하며 합리화를 잘하는 성격 때문에 여전히 헤어지지 못한다.


어느 날 대니의 가족이 전부 자살한다. 대니는 그 사건 이후 트라우마로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한다. 그러던 도중 크리스티안이 친구와 1달 반 동안 스웨덴으로 여행을 가려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여행에 합류한다.


영화 초반에 대니는 항상 두 손을 맞잡고 있거나 남의 눈치를 본다. 모두 자기를 비웃는다는 과한 생각을 하기도 한다. 자기 때문에 분위기를 망치고 싶지 않아 그다지 원하지 않는 행동에 동참하거나, 슬픔을 참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겨우 눈물을 터뜨린다.


현대 사회에서 감정의 표출이 줄어드는 까닭은 남의 시선을 의식하기 때문일 테다. 다 큰 어른이 울 거나 소리를 지르면 이상한 사람처럼 생각하고 피하기 일쑤다. 또 회사나 학교 등의 사회생활에선 마음껏 원하는 대로 감정을 표출할 수도 없다. 종국에는 자신이 현재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도 모르고 산다. 그러나 감정은 억눌러진다고 사라지지 않고 다른 방식으로 표출된다. 사소한 것으로 눈물이 나거나, 아무 일도 없는데 계속 우울하거나, 사소한 것에 쉽게 짜증을 내는 식으로. 초반의 대니가 이런 상태였다.


가족이 모두 죽은 그를 지탱해주는 건 누구도 없다. 남자친구인 크리스티안이 위로해주기는 하지만 의지할 대상은 못 된다. 여행 날과 겹친 생일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시선은 때때로 다른 여성에게 가 있다. 대니는 많은 사람 사이에 있으면서도 꼭 혼자 있는 기분이 든다. 그런 대니를 보듬어준 건 마을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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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은 72세가 지난 노인의 죽음이었다. 72세가 지난 노인이 스스로 목숨을 끊고, 제대로 죽지 않아 고통스러워하자 다른 사람들이 대신 죽여준다. 대니는 밤에도 자신의 가족 시체와 노인의 시체를 동일시하는 꿈을 꿀 정도로 큰 충격을 받는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죽음으로 얻는 인생의 순회가 자연스러운 것, 명예로운 것이라는 해명과 합리화를 들으면서 가족의 죽음 때문에 느낀 죄책감이나 슬픔을 덜어졌을 것이다.


대니는 호르가의 축제 중 5월의 여왕을 뽑기 위한 자리에서 다른 여성들처럼 마약이 함유된 물을 마시고 춤을 춘다. 약의 힘인지 스웨덴 언어를 거의 할 줄 모르는데도 스웨덴 사람들과 말이 통한다. 언어와 관계없이 말이 통한다는 것은 마음의 교류라고 볼 수도 있다. 가족의 죽음 이후 첫 번째 감정적 교류다.


그는 얼떨결에 혼자 마지막까지 살아남아 5월의 여왕이 된다. 사람들은 대니를 높은 마차에 태워 모시고, 가장 크고 화려한 의자에서 앉힌다. 그가 먼저 숟가락과 포크를 들어 움직여야 다른 사람들도 식사한다. 모든 것이 5월의 여왕 중심으로 움직인다. 낯선 스웨덴 사람은 4년여간 사귄 남자친구나 남자친구의 친구들보다 더 그를 존중한다. 거기다 밝은 햇살 아래 신나는 음악을 들으며 축제를 즐기는 사람들과 함께 춤을 추고 뛰고, 또 성공을 쟁취하는 순간이 부정적인 감정을 없애는 일에 많은 도움이 된다.


후에 크리스티안이 다른 여성과 성관계를 하는 크리스티안을 보고 굉장히 충격에 빠진다. 토를 하고 침대에 누워 운다. 호르가의 다른 여인은 그를 혼자 놔두지 않고 호흡을 나눈다. 같이 울부짖고, 진정된 기색을 따라 하고, 그러다 분노를 섞어 함께 울부짖는다. 대니의 감정을 온전히 느끼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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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은 나누면 반이 되고 기쁨은 나누면 배가 된다는 말이 있다. 누구든 자신의 감정을 상대와 공유하면 부정적인 감정은 해소되고 긍정적인 감정은 증가한다. 대니는 자신과 같이 울고 화를 내는 사람들을 보면서 슬픔을 토해내고, 분노도 드러낸다. 처음으로 할 수 있는 끝까지 감정을 표출한다. 늘 무언가 속으로 억누르고 걱정하던 사람에게 감정을 마음껏 표출하게 도와주고 그 감정에 공감하는 것만큼 위로 되는 일이 있을까.


사람은 공감과 인정 속에서 경계심이 늦춰진다. 호감이나 그 이상을 품은 상대에게는 도덕적 잣대도 온화해지기 마련이다. 한국에서는 주로 ‘콩깍지’라는 단어로 이를 설명한다. 말하자면, 대니는 자신을 가족으로 받아들이고 자매라고 말하는 호르가 사람들에게 콩깍지가 씐다. 계속해서 그들의 문화에 거리감을 두거나 그 마을을 벗어나려고 애쓰는 대신, 그들의 방식을 따라 꽃에 파묻힌 채로 희생양이 될 사람을 정한다. 그렇게 대니는 간접적으로 살인을 저지르며, 마을 사람들과의 유대감을 쌓는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호르가 사람들은 희생양이 되어 불타는 사람의 고통을 함께 느끼며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른다. 물론 대니도 함께 소리를 친다. 절규하던 대니는 어느 순간 고개를 들어 불타는 신전을 정면으로 바라본다. 그리고 웃는다. 가족의 죽음 때문에 생긴 트라우마가 사라진다. 그들 문화권의 시선으로 보자면, 대니와 마을 사람들은 그저 명예로운 죽음의 순회를 목격했을 뿐이다. 고통스러운 죽음을 목격한 것이 아니라 숭고한 윤회를 지켜보는데 슬플 이유는 없다. 더군다나 주변에는 온통 함께 고통받는 사람들이 있다. 앞으로 대니는 어떤 고통이 있어도 덜 두려울 것이다. 감정을 나누는 사람이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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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러한 감정적 동화는 모두 거짓이다. 애초에 남의 고통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느낄 수 없을뿐더러, 마을 안에서 대니가 괴로워한 일은 모두 마을 사람들이 원인이다. 남자친구가 불륜을 저지른 건 내부인이 음료에 미약을 넣었기 때문이다. 크리스티안이 호르가 여성과 성관계를 할 수 있도록 그를 다른 곳으로 유인한 것도 마을 사람들이었다. 외부인과 크리스티안의 친구가 실종된 일도 마을 사람 짓이다. 그렇지만 이 상황에서 주인공이 호르가 마을을 벗어나기란 쉽지 않다. 만일 마을 사람들이 마음껏 작별 인사를 해주고 직접 비행기를 끊어 밖으로 내보내 준다 해도 대니는 망설일 것이다.


예전에 인공지능 로봇을 가지고 한 실험이 있었다. 조종자는 탑을 쌓게 시킨 뒤 탑을 부수라는 명령을 한다. 인공지능 로봇은 열심히 쌓은 탑을 무너뜨리라는 조종자의 말에 시무룩한 표정을 짓는다. 사람 대부분은 인공지능 로봇이 불쌍하다고 말하고 나아가 조종자가 너무했다고 답한다. 로봇은 실제 어떤 감정을 가지지도 못하며, 그저 인간이 설정한 대로, 빅 데이터를 바탕으로 움직이는 걸 알면서도 사람들은 로봇이 표현하는 가짜 감정에 반응한다. 감정이란 그런 것이다. 그러니 비록 감정적 동화가 모두 거짓이라 해도, 의지하고 위로받고 공감받고 싶던 대니에게 모든 것을 완벽하게 제공해주는 이 마을은 편안한 안식처가 된다.


덧붙여서 대니는 이미 마을의 종교 행위에 참여했다. 외부에서 살인이라 일컫는 행위다. 나쁜 짓은 공범이라는 이름 아래 사람을 결속시킨다. 배신하면 나 자신까지 위험해지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은 나 자신에게 그 무엇보다 강렬한 콩깍지를 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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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읽다 보면 이해하겠지만 호르가 마을을 파라다이스로 이해할 수는 없다. 사람의 목숨은 어떤 종교적 미신보다도 위에 있어야 한다. 비록 72세 이후의 어른들은 죽음은 종교적 문화적 차이로 어떻게든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르나, 대니와 크리스티안을 제외한 외부인의 죽음은 명백한 살인 행위다. 다만 심신이 지친 대니가 이 마을과 종교를 자신의 안식처로 삼는다면, 누가 그를 욕할 수 있을까. 그와 같이 소리쳐주고, 울어주지 않은 우리가 과연 그럴 자격이 있을까.


살면서 나는 언제나 나를 봐주는 관계를 원했다. 꼭 연인 관계가 아니더라도 셜록 홈즈와 존 왓슨처럼, 오성과 한음처럼, 백아와 종자기처럼 온전하게 나를 이해해주고 충족시켜주는 존재가 있으면 했다. 나보다 날 더 잘 알아서 슬플 때 같이 슬퍼하고 기쁠 때 같이 기뻐하는 사람이 있다면 삶은 분명 지금보다 더 평화로울 것만 같았다. 그래서인지 영화에서 마을 사람들이 대니와 함께 오열할 때, 나는 알 수 없는 희열을 느꼈다. 가슴이 뭉클해졌다. 모두가 같은 감정을 느끼고 이해하고 다독여주는 기분이었다. 대니처럼 내 감정도 정화되는 기분이었다.


영화는 내내 관객을 일부러 불편하게 만든다. 밤에 끊임없이 아이의 울음소리를 깔아 신경을 거슬리게 하고, 대니가 약에 취해있을 때 계속해서 화관의 꽃 한 송이가 이상하게 계속 커지고 작아진다. 대니의 정신 상태가 좋지 않을 때면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멀리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세상이 혼란스럽게 뒤틀리기도 한다. 모든 것이 대니의 시점으로 보이고 들리기 때문에 관객들은 그처럼 예민해지고 스트레스를 받고 고통스러워하다가, 이내 주인공이 웃을 때 함께 웃으며 비슷한 감정적 동화를 느낀다.


대니와 비슷한 경험이 있던 나는 더욱 그랬다. 별일 아닌데도 괜히 내가 분위기를 망치는 것 같고, 날 비웃는 것 같아 불안했다. 내가 필요로 하는 사람이 떠날까 봐 겁을 먹었다. 크리스티안이 대니의 생일을 까먹을 땐 괜히 내가 속상하고, 다른 사람을 바라볼 땐 내가 먼저 화가 났다. 그리고, 영화가 끝나는 순간, 꼭 내가 대니가 된 것처럼 기분이 편안해졌다. 이러니 마지막에 어색하게나마 웃는 대니를 이해하지 못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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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알 수 없는 사이비 종교에서 호르가 마을 사람처럼 함께 울어주고 함께 웃어준다면 나는 그 단체를 벗어날 수 있을까? 물론 그전에 사이비 종교에 들어가지 않을 것이다. 살인이나 폭행, 갈취하는 사이비 종교에 귀의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앞서 말했듯, 비윤리적인 문화나 전통을 미화하면 안 된다. 하지만 대니만큼은 아니어도 가끔 마음 의지할 곳이 없어 방황하는 내게 누군가 호르가 마을 사람들처럼 다가온다면 그 손을 놓지 못할 것이다. 대니가 느낀 감정의 표출과 정화를 나도 느껴보고 싶다. 어딘가 아무도 없는 곳에서 소리를 꽥꽥 지르고 싶은 기분이다. 그리하여 구원받는다면.


결국 나는 대니를 옹호할 수밖에 없다. 대니는 어느샌가 나 자신이 되었기 때문이다. 내가 나를 볼 때 씐 것과 같은 콩깍지를 대니 볼 때도 씐다.


그러나 나는 호르가 마을에 도달하지도 살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내가 사는 곳은 호르가 마을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대니를 그곳에 놔둔 채로, 혼자 스웨덴을 빠져나온다. 비록 완벽한 유토피아는 아닐지라도, 대니에게 그 세상이 행복하기를 간절히 바라며, 누군가 나처럼 울길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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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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