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도시에서 별을 따라 걷기 – 소공녀 [영화]

“집이 없는 게 아니라, 여행 중인 거야.”
글 입력 2019.07.14 2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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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붙박이와 떠돌이. 다른 말로는 정주민과 유목민, 또는 농경민과 장돌뱅이. 이 진부하고 유서 깊은 분류법은 서로 다른 수많은 사람들을 두 가지 상자 속으로 순식간에 정리해버린다는 점에서 ‘붙박이’의 잣대이다.


글을 시작하기 어려울 때마다 첫 문장으로 이분법을 들이미는 것이 습관인 나는 어쩔 수 없는 붙박이다. 그래서 영화 <소공녀>를 보는 내내 주인공 ‘미소’가 이해되지 않았고, 영화가 끝나고 나서는 오랫동안 남아있는 찝찝하고 따뜻한 여운에 어쩔 줄을 몰랐다.




평범한 게 뭐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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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소공녀>는 위스키와 담배와 남자친구를 너무나 사랑하는 프로 가사도우미인 주인공 ‘미소’가 집세와 물가가 오르자 과감하게 집을 포기하면서 시작되는 방랑기를 담은 영화이다. 거리로 나선 미소는 대학 시절 밴드 동아리를 했던 친구들을 한 명씩 찾아가게 되고, 뜨겁게 빛나던 추억을 간직하고 있는 친구들의 삶을 들여다 보게 된다.


미소가 찾아간 친구들은 저마다 다르지만 나름의 평범한 삶을 이어나가고 있다. 직장생활에 바쁜 친구 ‘문영’부터 시작해 시집살이에 힘겨운 ‘현정’, 결혼한지 얼마 되지 않아 이혼을 당하고 밤마다 우울에 빠지는 ‘대용’, 가족과 결혼이라는 족쇄를 갈구하는 ‘록이’, 부자 남편과 결혼해 전혀 다른 생활을 하고 있는 ‘정미’까지.


평범이라는 틀 안에 매몰되어 있는 붙박이들의 삶에 찾아온 떠돌이 미소는 즐거운 추억과의 연결고리인 동시에 비현실적인 새로운 삶의 방식과의 조우이다. 그들은 미소에게 위로를 받기도 하고 경멸을 느끼기도 하며 저마다 다른 반응을 내비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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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영화를 보면 주인공인 미소보다 미소가 만나는 친구들의 삶에 더 공감이 가고 이입이 된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모든 것이 다 비싸지는 세상에서 담배나 술이 아닌 집을 포기하는 결정이 흔한 결정은 아니니까. 흔치 않은 정도가 아니라 비현실적인 결정이다.


반면 미소가 만나는 친구들의 삶은 하나하나 나의 모습과 너무 많이 닮아 있다. ‘평범’을 위해 무리하고 애쓰고 눈물 흘리고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삶은 얼마 살아 보지도 않은 내 인생을 빼곡하게 구성하고 있는 장면들이다. 물론 현재의 나는 젊음과 예능 프로그램이 심어준 헛된 용기로 재미있지만 쓸모 없는 일을 마음껏 저지를 수 있는 시절을 보내고 있다.


하지만 언젠가는 ‘평범’해지기 위해 발버둥치는 시간이 올 것이고, 나는 괴로워하고 무뎌지면서 ‘평범’에 가까워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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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내가 원하는 것은 안정적이고 예측할 수 있는 삶이다. 대용이 울면서 말했던 바로 그 ‘월급이 190일지언정 매달 100만원씩 꼬박 2년이면 가질 수 있는 낡은 나의 집’ 같은 것. 나는 그런 걸 갈망할 것이다. 앉아서 계산기를 두드리면 그려지는, 떠돌아다니지 않아도 되는 엉덩이가 무거운 나의 미래. 그래서 헌혈까지 하며 남자친구와 데이트를 하는 미소보다 그런 미소에게 모진 말을 내뱉는 정미가 더 공감 갔다.


하지만 내가 느꼈던 따뜻한 여운은 미소의 ‘평범한’ 친구들의 삶에 대한 공감 때문이 아니었다. 내가 위로를 받은 부분은 영화 내내 친구들을 가만히 지켜보는 미소의 다정한 눈빛이다. 떠돌이 미소는 잠시 머무는 동안 그들의 이야기를 조용히 들어주고 어질러진 공간을 보살핀다. 그리고 대학 시절 찍은 사진 뒤에 짧은 인사를 남기고 홀연히 사라진다. 미소는 미소의 방식으로 방랑할 뿐이지만, 그가 스쳐간 친구들은 그로 인해 잠시나마 행복해진다.




도시의 방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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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미는 미소에게 ‘염치 없고 한심하다’고 말했지만 미소는 결코 염치 없고 한심한 사람이 아니다. 미소는 그저 도시 속에서 별을 따라 걸으며 방랑할 뿐이다. 미소는 정미의 집에서 나와 코인빨래방에서 밤을 지새기도 하며 커다란 캐리어를 가지고 끝없이 떠돌아다니지만 그 상황이 미소를 불행하게 만들지는 않는다.


미소의 처지는 영화 초반에서부터 끊임 없이 변화한다. 단칸방에서 친구의 집으로, 친구의 집에서 거리로. 이러한 변화는 정주민의 눈으로 보았을 때 악화되고 내몰리는 상황이다. 미소도 자발적으로 거리에 나온 것은 아니므로 떠돌이 신세가 모두 미소가 온전히 선택한 결과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상황 속에서 떠돌아 다니는 미소는 자신을 향한 걱정스런 눈빛을 마주 보며 이렇게 말한다.


"집이 없는 게 아니라 여행 중인 거야. 난 지금이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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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사회학자 마페졸리는 '방랑이란 어두운 밤 사막에서 걷는 것’이라고 표현했다. 마페졸리에 따르면 한밤 중에 사막을 걸을 때 방향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아무리 먼 곳을 바라보아도 목적지가 어디인지 알 수 없다. 단지 하늘에 뜬 수많은 별에 의지해 걸을 뿐이다.

그러나 ‘별을 따라 걷는 것’은 끝내 별에 다다르겠다는 뜻이 아니다. 별은 그저 끝없이 펼쳐진 땅을 딛고 걷는 방랑자들이 나아갈 수 있도록 하는 방랑의 지침이 되어줄 뿐, ‘어디로 가야하는가?’라는 질문에는 아무런 해답도 주지 않는다.


대신 별을 따라 걷는 동안 방랑자는 어떤 길로도 갈 수 있다. 그 길은 어제보다 나은 길도 아니고 못한 길도 아니다. 그냥 어제와 다른 오늘의 길이다. 미소 역시 단칸방을 떠나 한강변 작은 텐트에 도착했지만 정주민의 시선에서는 마냥 안타깝기만한 이 상황이 미소에게는 이 순간, 이 장소의 ‘여행’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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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시선으로 미소를 바라본다면 남자친구 ‘한솔’이 해외파견을 결정했을 때 ‘배신자’라고 그를 비난했던 미소의 심정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다. 그렇게 많다는 별들이 자취를 감춘 도시의 밤하늘, 그 아래에서 함께 걷고 있다고 생각했던 유일한 사람이 사실은 이미 오래전에 주저앉아 지친 목소리로 ‘이제 그만 우리도 평범한 곳으로 돌아가자’라고 울먹이고 있었다니.


미소와 한솔은 연애하는 내내 사랑과 행복감을 느꼈고 우스워 보일 만큼 서로에게 다정했다. 하지만 방랑하는 동안 누리는 즐거움은 잠시일 뿐 아무것도 보장되지 않은 미래가 주는 불안 속에서 관계는 외줄타기처럼 아슬아슬하게 이어진다. 예측 가능하고 흔들리지 않는 삶을 향한 욕망. 긴 역사 동안 인간이 정착지를 찾기 위해 수많은 세월을 헤맬 수 있었던 원동력은 아마 거기에 있었을 것이다.


뻔하고 지루하고 그다지 낭만적이지 않은 삶, 그러나 그런 삶만이 비로소 채워줄 수 있는 공허함이 있다. 그리고 미소는 한솔의 눈을 마주한 순간 끝내 방랑의 비극을 이해해야 하는 때가 왔음을 직감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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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씩 높게 솟은 빌딩 사이를 비집고 내려앉은 밤하늘에서 희미하게 반짝이는 하얀 점을 발견하게 된다. 그 작고 창백한 점을 바라보며 휘청휘청 걸을 때마다 나는 ‘저건 인공위성일까, 별일까’ 하는 생각에 잠긴다. 종종 친구와 작고 창백한 점의 정체를 가지고 내기를 하기도 한다.


내가 기대를 거는 쪽은 언제나 같다. 아니, 도시에서 하늘을 올려다 보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데, 나는 매일 땅만 보고 걷는데. 그런 내가 어쩌다 한 번 우러러보는 하늘에 떠있는 조용히 눈맞춰주는 작고 창백한, 저 다정한 점이 별이 아닐 리가.



참고논문

최항섭, 노마디즘의 이해

Understanding the Nomadism: Deleuze and Maffesol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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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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