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연대, 그 속에 숨은 힘 - 연극 '마음의 범죄' [공연]

제2회 페미니즘 연극제 참가작 '마음의 범죄'
글 입력 2019.07.03 11:38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포스터.jpg
 

평화롭던 집안에 총성이 울려 퍼진다. 총알은 밀도 높은 공기를 가르고 가장의 복부에 선명히 박힌다. 분노와 배신감이 뒤엉킨 눈빛의 도달점은 다름 아닌, 그의 아내다.

강렬한 추리소설의 도입부로 흠잡을 데 없는 사건이다. 심지어 아내의 불륜과 남편의 가정폭력, 연락이 두절된 처형과 장모의 자살까지, 콩가루도 이런 콩가루가 없다. 드라마로 만든다면 요즘 시대에 이런 막장이 어디 있느냐며 지탄을 받을 만큼 자극적이다. 나와 연고 없는 타인의 이야기라면 사실적일수록 비현실적인 법이니까.

하지만 연극 '마음의 범죄'는 소재에 주목하지 않는다는 게 흥미롭다. 문학적 수사법으로 잔인성을 증폭시키거나 신파를 불러일으키지 않고, 오로지 이들의 지극히 사적인 이야기에만 집중한다. 세 자매가 꽁꽁 봉인했던 마음속 범죄, 마음속 상처를 조금씩 해제하며 손을 잡는 과정은 이번 페미니즘 연극제의 키워드인 연대와 맞물려 더욱 큰 시너지를 발산한다.



순진, 가진, 그리고 유아


이 작품의 독특한 특징 중 하나는 바로 작명에 있다. 개인적인 콤플렉스 탓에 연애를 거의 하지 않았던 순진한 큰 언니 유순진, 그리고 순진과 달리 적극적인 행동과 매력적인 성격으로 어릴 때부터 할아버지의 사랑을 '가졌던' 작은 언니 유가진, 마지막으로 언니들에게 마냥 사랑스러운 어린아이와 같은 유아진까지. 이처럼 이름에 숨은 캐릭터 별 특징을 찾아내는 재미도 있다.


DSC_0677.jpg
 

그러나 극이 진행될수록 이들은 자신들에게 부여되었던 명칭과 전도된 삶을 전개해 나간다. 가장 순진했던 순진은 콤플렉스를 극복하고 적극적으로 사랑을 찾아나가고, 조금은 이기적으로 비춰졌던 가진은 남성과 유성애적 관계에서 탈피한 인간적 관계를 형성하며 성장을 이룩한다. 그리고 사랑스러운 막내 아진은 남편을 총으로 쏜 후 자신의 상처와 내밀한 이야기를 조금씩 풀어나간다.

그렇다면 이들을 이름 속에 묶어둔 주체는 누구일까. 아이를 갖지 못하는 몸이라며 질타한 것, 가정폭력에 질려 스스로 목숨을 내던진 엄마의 시체를 마주하게 한 것, 그리고 남편의 고압적 태도와 폭력에 방아쇠를 당기게 한 것은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우린 이미 답을 알고 있다. 인류의 탄생과 함께 쌍둥이처럼 등장한, 질기고 질긴 생명력을 가진 '가부장제'가 바로 그 주체다.


DSC_0719.jpg
 

사실 가부장제가 나의 숨통을 죄어오고 있다는 답답함을 느끼는 것조차 쉽지 않다. 내가 태어났을 때부터, 아니, 나의 엄마와 할머니, 그리고 할머니의 할머니가 태어났을 때부터 가부장제는 존재했기 때문에 이 자체가 인류의 집이 되어버렸다. 마치 순진과 가진, 아진에게 부여된 이름처럼 익숙하고 편안할 수 있는 제도가 바로 가부장제다.

하지만 여성들은 꽤 오래 전부터 답답함과 상처를 호소했고, 그 목소리가 모여 페미니즘이라는 담론과 인권운동을 만들어냈다. 어쩌면 방 안의 아름답고 조신한 화초로 살아가는 게 길거리에서 여성인권을 목 터져라 외치는 것보다 편한 길일 터다. 여성 문제를 외면한 채 가부장제가 부여한 여성성에 충실히 자신을 맞추는 편이 더 쉬울지 모른다. 화초가 시간이 지나 시들면 버려지는 것이 당연한 이치라는 점은 잠시 잊은 채로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점점 더 불편해져야 한다. 자유롭기 위해서, 그리고 종내에는 지금보다 더욱 편안하고 넓은 집에서 살기 위해서 말이다. 작품 속 세 자매의 할아버지가 쓰러진 후, 자매들은 일순간 큰 비애에 빠지지만 동시에 해방감에 젖은 웃음을 터뜨린다. 잠깐의 불편함, 그리고 오랜 해방감, 우리는 이 해방감을 더 짙게 맛보기 위해서 갈등과 불편을 감내하는 것이다.



페미니즘의 원동력, 연대


이번 페미니즘 연극제에서 내세운 키워드는 '연대'다. 불편함을 함께 견디며 더 자유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여성들은 손을 잡는다. 메갈리아, 강남역 살인사건, '82년생 김지영'과 같은 단편적 사건들이 현재의 페미니즘 시류를 만들어낸 것처럼, 여성들은 하나둘 몸을 일으켜 서로 연대하고 있다. 페미니즘의 원동력이자 본질인 셈이다.


DSC_0837.jpg
 

연극 '마음의 범죄'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루는 키워드 역시 '연대'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과연 이들의 연대가 얼마나 부각되었는가, 어떤 결과를 초래했는가에 관한 초점이 흐릿한 점은 아쉽다. 세 여성의 이야기를 같은 차원에서 다루다보니 자연스레 주제와 전개가 모호해진 것 또한 아쉬움이 남는다. 개별적 서사들은 모두 매력적이고 충분히 의식적이지만, 이를 모두 '연대'로 묶어내다 보니 세 자매의 이야기가 모두 흐려졌다는 게 문제다.

특히 극 초반, 관객들의 집중력을 한껏 높였던 아진의 서사는 시간이 갈수록 힘이 약해져 결말 자체가 부재했다는 점이 가장 아쉽다. 엄마를 따라 숨을 끊으려고 시도했던 극단의 끝에서 자매들의 연대로 다시 한 번 힘을 낸다는 것이 가정폭력의 결말이라면 조금 힘이 빠진다. 아진의 이야기에는 위로와 손잡음으로 해결할 수 없는 거대한 폭력성이 있고, 연대가 이 폭력성을 해체할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면 더욱 힘 있는 서사가 되지 않았을까.

여성들의 연대 그 자체가 억압과 폭력을 봉인하는 기제로 작용한다는 문제의식은 충분히 설득력 있다. 그러나 가부장제의 상단에 위치한 남성, 그리고 남성과의 사랑으로 해제되는 갈등과 회복되는 자존감 서사는 조금 아쉬웠다. 강한 남성성에서 비롯되는 폭력으로 고통 받는 아진의 큰 언니 순진은 자신의 여성성이 부재한 까닭에 남성과 깊은 관계를 맺지 못해 고민한다. 이 과정에서 순진은 여성성과 남성성을 무화하여 결혼과 사랑, 출산의 맥락을 탈피하지 않고 다시 남성과의 사랑으로 되돌아갔다. 이 역설적 이야기가 우리의 현실이라고 하기에는 비혼, 비연애 등 이미 남성에서 벗어난 페미니즘이 활발히 논의 중이다.

물론 순진의 연애에는 다른 맥락이 있다. 여성은 아이를 낳아야 한다는 가부장적 여성성이 그간 순진의 욕망을 억압해왔기에, 여기에서 탈선하여 자신의 욕망을 주체적으로 좇기 시작했다는 것 자체로 의미가 있다. 하지만 여기서 아쉬운 점은 '순진이 연애를 했다'가 아니다. 가부장제가 양산한 가정폭력에 고통 받던 엄마와 동생 서사, 그리고 가부장적 여성성의 억압에서 벗어나 연애를 시작하게 된 순진의 서사가 같은 선상에서 연대로 빛을 보았고, 순진은 연애라는 구체적 방법으로 상처를 극복해냈지만 아진에게는 그러한 해결책이 부재했다는 점이 아쉽다. 아울러 폭력성은 조금 더 면밀한 차원에서 해결을 보아야 하는 것이 아닌지, 이 점 역시 고려해봐야 한다.


DSC_0863.jpg
 

하지만 '마음의 범죄'는 세 여성들의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로 무대 전체를 꽉 채웠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여성학적 맥락을 생산했다. 여성들의 상처가 '마음'의 범죄로 남지 않기를, 이들의 고통이 명료하게 치유되는 세상이 오기를, 그리고 언젠가 이 불편함이 해방을 이끌어낼 날이 오기를.


시놉시스

내 사랑스러운 막내 동생이 남편에게 총을 쐈다!

제주시 노형동의 오래되고 큰 양옥집. 세 자매 중 첫째인 순진은 할아버지 병간호를 하며 일상을 보내고 있다. 둘째 가진은 가수가 되려고 서울로 떠나 연락이 두절되었고, 막내 아진은 유망한 시의원과 결혼해 살고 있다.

그러던 어느날, 막내 동생 아진이 남편을 총으로 쐈다는 소식이 들린다. 이 소식을 듣고 가진이 집으로 돌아오고, 아진은 구치소에서 보석으로 풀려난다. 오랜만에 모인 세 자매는 아빠의 가출, 엄마의 자살, 할아버지에 대한 애증, 불행한 결혼 생활 등 잊고 싶었던 과거와 대면하게 된다.

누구도 기억하지 못하는 순진의 생일,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아진의 사건. 이 혼란 속에 늦게라도 순진의 생일 파티를 계획하지만 모든 상황은 꼬여만 간다. 과연 이들은 무사히 생일파티를 할 수 있을까?


공연 정보

공연일: 6/27(목) - 6/30(일) 평일 8시 / 토 3시, 8시 / 일 3시
공연 장소: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
작: 베스 헨리
각색, 번안: 진주
연출: 황세원
출연: 이도연, 곽정화, 이승현, 백지선, 양어진
조명: 도상민
분장: 임영희
무대감독: 이범석
조연출: 배현아



PRESS 이름표.jpg
 

[정지은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3.28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