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SS] 줄리엣을 사랑한 줄리엣 - '줄리엣과 줄리엣' 리뷰 [공연]

고전이 이렇게나 매력적일 수 있다니
글 입력 2019.06.27 1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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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이 두 글자에 담긴 시간과 힘은 어마어마하다. 현대적 감성을 세련된 언어로 충분하게 담아낸 작품도 많건만, 우리는 몇 백 년이 지나도록 같은 작품을 향유한다. 사실 그다지 재미있지는 않더라도 고전이라는 이유 하나로 꾸역꾸역 페이지를 넘기기도 한다. 이게 왜 그렇게 유명한 거야? 라고 묻고 싶더라도 꾹 참는다. 왜? 고전이니까.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새로움에 대한 갈망이 있다. 어제까지 참 맛있게 먹던 마카롱인데 오늘 또 먹으려니 조금 물리는 것 같고, 그래도 디저트로 마카롱만한 게 없으니 오늘은 산딸기 마카롱 말고 블루베리 마카롱을 먹어볼까, 하는 게 사람의 마음이다. 블루베리든 산딸기든, 마카롱이니 기본은 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돈을 낸다. 오랜 시간 나와 나의 주변 사람들에게 검증을 마친 음식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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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토이스토리4'가 개봉했다. 사실 나는 '토이스토리3'으로 충분히 완벽한 결말을 만들어냈다고 생각해서 4는 볼 생각이 없었다. 사족일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뿐 아니라 많은 '토이스토리' 팬들이 이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픽사 역시 이런 걱정을 예견하기라도 한 듯, 이전까지의 '토이스토리'와는 조금 다른 이야기로 관객들을 놀라게 했다.


풍성한 드레스를 입고 친절한 말투로 이야기했던 보 핍은 드레스 대신 바지를 입었고, 이제껏 어린이를 만족시키는 게 장난감의 최종 사명이라 생각하던 '토이'들은 자신의 삶에 대해 사유하기 시작했다. 동시대성과 기존 이야기의 감각을 동시에 챙기면서 재미까지 창출할 수 있다는 것, 이게 픽사가 보여준 '토이스토리4'였다.


그러니 고전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고전의 감각과 동시대성은 양극단에 위치한 개념이 아니다. 고전을 새로운 시각으로 비틀어 해석하는 것은 고전을 해체하는 작업이 아니라 소화하는 과정이다.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가치, 세기가 지나도 여전히 유효한 주제, 이런 것들이 고전을 고전답게 만든다. 그렇다면 고전의 '고전성'은 그 서사가 가진 핵심 메시지와 특징만 가져간다면 충분히 변용해도 유지될 게 아닌가.




묵직하지만 유쾌하게



연극 '줄리엣과 줄리엣'이 고전을 비트는 방법은 너무나 유쾌하고 발랄하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 극 속 줄리엣은 로미오와 사랑에 빠지지 않는다. 로미오는 줄리엣 몬테규의 친동생이며, 줄리엣 캐플릿과 사랑에 빠지는 사람은 로미오 몬테규가 아니라 줄리엣 몬테규다.


기본적인 줄거리는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과 유사하지만, 이 극 속에서 몬테규 가(家)와 캐플릿 가는 원한의 골이 전혀 없다. 이들의 갈등은 캐플릿 가에서 줄리엣의 동성연애를 거부하면서 촉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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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의 무대와 의상은 심플하다. 한 점 얼룩도 없는 순백색. 마치 하나의 차이도 용인할 수 없다는 듯 온통 자랑스럽게 희다. 숨 막히는 백색의 세상에서 유일하게 색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 바로 줄리엣 캐플릿과 줄리엣 몬테규다.


두 줄리엣이 사랑에 빠지는 순간도, 연애를 하는 순간도 모두 발랄하고 사랑스러워, 이들을 묘사하는 데 적합한 색은 백색보다는 무지개 색에 가깝다. 더불어 셰익스피어의 작품답게 사랑을 묘사하는 언어들은 한 줄 한 줄 정말 아름다워서 하룻밤 사이에 운명적 사랑에 빠지는 주인공들이 전혀 어색하지 않다.


'줄리엣과 줄리엣'이 명작인 이유는 고전의 진수를 그대로 남겨둠과 동시에 새로운 감각을 너무나 발랄하게 추가했다는 것이다. 비극적 결말을 가진 아름다운 청춘의 사랑 이야기, 너무 고전적이기에 뻔할 수 있는 서사 속 '청춘'을 뒤틀어 남녀에서 여여(女女)로 전환했다.


이 과정에서 퀴어를 타자화하거나 갈등을 인위적으로 뽑아내지 않고 다분히 현실적인 스토리를 그려내어 더욱 세련된 리메이크가 탄생한 것이다. 가볍지도, 그렇다고 너무 무겁지도 않게, 묵직하지만 발랄하게.




줄리엣을 사랑한 사람은 나예요



2019년 현재, 한국 문학 흐름에서 가장 눈에 띄는 소설은 퀴어 소설이 아닐까 짐작한다. 최은영 작가의 단편 '그 여름', 황정은 작가의 연작소설 '디디의 우산' 등 퀴어를 소재로 한 작품은 꾸준히 창작되고 있다. 단순히 '성적 퀴어이기에 겪을 수밖에 없는 비극'을 넘어, 이들의 소수자성과 타자성을 적나라하게 고발하고 있기에 우리 사회에 절대 빠져선 안 될 중요한 서사로 자리 잡았다.


이처럼 퀴어 문학, 퀴어 창작물이 가지는 맥락은 절대 단순하지 않다. 여성 서사가 중요성과 힘을 가지는 배경도 이와 비슷한데, '여성 퀴어'의 이야기라면 더더욱 메시지가 강렬해진다. 이야기의 주제가 날카로워진다는 말은 아니다. '여성 퀴어 서사'만으로 일종의 의의가 생긴다는 뜻이다.



나치는 게이에게 핑크 트라이앵글 배지를 달고 다니도록 강요해 낙인을 찍었는데 레즈비언의 경우에는 그들만을 지칭하는 낙인이 따로 없었고, 비사교적/반사회적인 인물이나, 부정한 성적 관계, 즉 '유대인과 섹스한' 아리아인의 낙인인 블랙 트라이앵글이 지급되었다는 점은 우리를 많이 생각하게 했지. 레즈비언의 낙인/상징이 따로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 그들이 남성 동성애자보다 적었다는 뜻일까? 아니면 덜 보였다는 뜻일까?


- 황정은, '디디의 우산', 창비



가시화, 퀴어 퍼레이드가 몇 년째 지속되는 이유도 이와 같지 않을까. 퍼레이드 날만 되면 전국의 퀴어들이 한 자리에 모여 무지개 깃발을 흔든다. 혐오세력의 수보다 훨씬 더 큰 규모의 무지개 파도가 서울 광장을 메울 때, 우리는 생각해야 한다. 소수자를 소수자로 명명하는 것은 그들 자신이 아니라 다수자라는 것, 그리고 소수자성은 숫자로 부여되는 게 아니라 권력으로 규정된다는 것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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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줄리엣과 줄리엣'은 그 묵직하고 커다란 권력 장벽을 무너뜨린다. 줄리엣과 줄리엣의 운명은 비극적이지만 이들의 사랑은 충분히 희극적이었다. 이들이 죽음을 맞이한 까닭은 퀴어였기 때문이 아니라 서로를 너무나 사랑했기 때문이었다. 한 마디로, 이들은 자신들을 소수자라 규정짓는 권력에 무릎 꿇지 않고 끝까지 서로에 대한 애정을 지켜냈다. 고전을 이렇게나 매력적으로 비틀 수 있다니, 잠자던 셰익스피어가 놀라서 깨어날지도 모르겠다.


*


사실 이 작품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은 마지막 장면이지만, 두 눈으로 봐야 그 매력이 배가 되기 때문에 적지 않았다. 꼭 보세요, 후회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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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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