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살아가기 위한, 삶의 철학 [도서]

피에르 아도, 『고대 철학이란 무엇인가』를 읽은 소감의 '보충.'
글 입력 2019.06.21 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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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이 때가 작년 여름에,

체코에 막 도착했을 때 찍은 사진이었다.

나에게 프라하는 도피처다.

정확히는 프라하를 '찍은' 사진이 나에게 현실 도피처다.

사진은 그리운 찰나만 담으니까.




0. 사족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나는 이 글이 일전에 피에르 아도의 <고대 철학이란 무엇인가> 라는 책을 읽고 작성한 오피니언의 보충 버전임을 알리고자 한다. 해당 글을 보셨던 분들은 황당하실 수도 있겠다. 아니, 저번에 올렸던 글을 고쳐서 올린다고? 날로 먹으려는 건가. 어떻게 생각하시든 그건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일 같으니 나는 단지 구질한 변명을 내놓을 뿐이다. 글을 기고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혹평에 가까운 평을 들었던 기억이 있다.


물론 모두가 내 글을 읽고 만족하지 못함은 당연하다. 호평이 있다면 혹평도 있는 법이다. 다만 나는 혹평에 담긴 '나쁘다'라는 평과 함께, 내 글의 어떤 점이 미흡했고 아쉬웠는지 아주 자세하게 남겨주셨던 코멘트를 기억한다. 그 코멘트를 읽고 나는 스스로의 오만함을 자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분적인 사고방식으로 조망한 책의 내용, 그 결과 탄생한 단순하기 짝이 없는 글.


나는 한 번도 완성된 글을 고쳐본 적이 없다. (대입 자소서는 예외) 하찮아보일 수 있겠지만 '한 번 완성한 글은 다시 수정하지 않는다.' 가 글을 쓸 때 항상 되뇌이곤 했던 내 나름의 신념이었다. 스스로의 필력이 뛰어나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으나, 그렇다고 해서 스스로가 글의 'ㄱ'자도 쓸 줄 모르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하지만 그 피드백을 읽고 처음으로 내 글을 읽기가 두려워졌다. 그래서 한동안 큰 충격에 빠져 있었다.


꽤 긴 시간이 흐르고, 나는 다시금 글을 수정하고 보충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자기소개서가 아닌 글을 고쳐보기란 난생 처음이었다. 혹평을 건넸던 그 분에게 제가 이렇게 글을 고쳤습니다, 를 보여주기 위함이라기보단 '나를 위해서'라는 목적이 더 컸다. 오만하고 부족했던 스스로가 반성할 수 있도록, 자신이 내놓은 결과물에 최소한의 책임을 놓지 않도록. 나를 위해서 글을 보완해야만 했고, 그럼으로써 글을 대하는 태도를 바꾸어야 했다. 이 글은 그러한 시도의 일환이다. 그러니 이번 한 번만 너그러이 이해해주셨으면 하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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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철학을 한다는 것


    


“오늘날 철학 선생의 일에서 상당 부분은 또 다른 공무원을 양성하는 것이다. 고대에 그러했듯이 인간 구실을 하게끔 사람들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사무원이나 선생 같은 직업적 전문가, 이론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어떤 비법과 관련된 특정 지식의 보유자를 만들어 낸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런 유의 지식은 결코 전 생애를 좌우할 수 없다.”


- 책의 422쪽 중에서.


 

통상적으로 철학은 구체적인 내용이 무엇이든 근본적으로 사유의 영역과 연관된다. 인간이 스스로 어떤 사물이나 현상을 파악하고 의미를 부여하거나, 대상의 존재 자체를 의심하는 등이 그 예시다. 소위 철학적 문제라 불리는 수많은 사태와 인간의 사유는 분리될 수 없다. 무엇인가에 대해 사유할 때 그 방향은, 사유 대상의 전반으로도 향할 수 있지만 사유 주체 본인의 내면으로도 향할 수 있다. 아도는 후자에 주목한다.


피에르 아도의 견해에 따르면 철학은 개개인이 자신의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사유의 방향을 인도해주는 ‘양식’이다. 철학을 단순히 이론화하기만 한다면 소위 말하는 탁상공론에 지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아도는 사유하는 주체 본인의 삶을 위한 실천철학의 뿌리를 고대에서 찾으며, 고대철학이 보여주는 철학적 정신에 주목한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철학을 한다’는 것의 참된 의미가 무엇인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이러한 의미를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는지 살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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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달리 사진 보정이 잘 된다, 오늘은.
레포트 쓰는 것 빼고 다 재미있고 즐겁다.


 

2. 실천으로서의 철학


 

1부에서 철학한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 논의하면서 아도가 얻어내고자 했던 결론은 말 그대로, 끊임없이 자기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며 자신이 올바르게 살아가고 있는지 의문시하고 타인과 소통하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일지 모른다. 아도는 2부를 통해서도 플라톤, 아카데메이아, 아리스토텔레스, 헬레니즘학파, 제국시대에 이르기까지 여전히 생활양식으로서의 철학에 주목한다. 동시에 앞서 언급한 다양한 학자들과 학파들 역시도, 궁극적으로는 자신들의 철학적 담론과 살아가기 위한 철학이라는 생활양식을 긴밀히 연결시키고 있다는 점을 발견한다.


기원전 5세기경에서 ‘철학(philosophia)’이란 어휘가 처음으로 도래했다고 여겨지는데, 아도는 이것이 ‘소피아(sophia)’에 대한 기호이자 취미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인간이 무언가에 몰입함으로써 삶을 살아갈 명분을 찾는다고 할 때, 그 무언가는 소피아를 향한 개개인의 취미적 기준이다. 어떤 행동을 하기 위함이라는 당위성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특정한 종류의 앎이 선행되어야 한다. 삶을 구체적으로 영위하는 것과 지식은 분리할 수 없는 관계다. 어떻게 살 것인가는 곧 어떤 것들을 배워 삶의 신념에 적용할 것인가에 직결되기 때문이다.


아도는 둘 사이의 연관 관계에서 지식의 측면이 실천적 작업에 선행되어서는 안 된다고 보았다. 지식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닌, 실천을 가능하게 할 토대로 기능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런 맥락에서 고대철학의 정신적 특징은 삶을 살아갈 토대를 마련해주는 것이다. 무언가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실천하고자 하는 방법론이 무엇인지 먼저 알아야 한다. 이런 점에서 아도는 삶 전체를 조망하는 정초 작업으로 고대철학을 이해하였다. 자신이 어떠한 철학적 견해를 수용해서 어떠한 생활양식으로 삶을 살아나갈 것인지 일차적으로 결정하는 작업을 거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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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부는 이러한 정초 작업을 이행하기 위한 준비 단계라고 볼 수 있다. 아도는 철학이라는 단어가 등장하기 이전부터 본격적으로 철학이라는 단어가 대두되고, 그 이후에 이르기까지 ‘철학한다’의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파악하고자 했다. 이 가운데에서 아도가 주목한 철학자는 소크라테스다. 1,2부를 통틀어 삶의 형태에서 철학을 실현하고자 했던 수많은 고대철학자들과 철학 사조들이 등장했음에도 내가 소크라테스를 본 서평에서 인용하는 이유는, 아도의 서술로부터 그러한 ‘삶에서 철학하기’라는 정신의 뿌리가 소크라테스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캐묻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높은 강단 위에서 가르침을 늘어놓거나 텍스트를 바탕으로 강의를 하는 것이 철학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이 완전히 놓치고 있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일상생활에서 부단히 실천되는 철학으로, 그것이 실천되는 방식은 그 철학 자체와 동일하다. (……) 소크라테스는 연단에 올라가 청중들에게 설교하지 않았다. 그는 스승의 자리에 앉지도 않았다. 그는 토론 시간이나 제자들과의 산책 시간을 정해 놓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때때로 제자들과 농담을 하면서 철학을 했다. 술을 마시면서, 전쟁터에서, 아고라에서 제자들과 어울리면서, 나아가 감옥에 끌려가고 독배를 들이키면서도 그는 철학을 했다. 소크라테스는 어떠한 시공간에서든 우리에게 닥치는 모든 일,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을 통하여 일상의 삶이 철학의 기회를 제공한다는 것을 보여준 최초의 인물이다.”


- 책의 75쪽과 79쪽 중에서.


 

소크라테스는 자기 자신을 문제시하며 계속해서 엄격하게 캐묻는 것이 철학을 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동시에, 그는 자기 자신에 국한에서만 논의를 행할 것이 아니라 자신이 선택한 철학을 타인과 공유하며 ‘열려 있는’ 삶을 살아내길 요구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철학자 혹은 철학하는 사람을 떠올릴 때 무언가 어려운 것을 공부하는 사람, 혹은 현실적인 생각과 괴리가 먼 사람이라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아도는 1부에서 소크라테스를 필두로 일상을 영위하며 철학하는 것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이는 앞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철학적 담론만을 진정한 철학이라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철학은 지금 내가 살아가는 이 순간을 위한 것이지, 단지 언어로 구성되는 퍼즐놀이를 하기 위함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주고자 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자명해보이지 않은 철학적 명제를 자명하게 만들어내기 위한 담론적인 작업들은, 이론과 학문으로서의 철학을 체계적으로 수립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하지만 이것만을 위해서 정작 그렇게 자명하게 만들어낸 철학적 진리나 규범들을 개개인의 삶에 녹이지 못한다면, 결국 그러한 과정들이 단지 말을 어렵게 만들어 내고 무의미한 논의를 생산할 뿐이라는 비판을 면치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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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사회의 사람들은 철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을 보며 대부분 자신이 생각했던 철학과 거리가 먼 것을 공부한다고 생각한다. 온갖 현학적인 말들과 한 번에 받아들이기 어려운 ‘전문 용어’들로 점철된 글들을 보며, 보통의 사람들이 공부할 것은 아니라며 거리감을 느낀다. 그렇다면 이들이 생각하고 있는, ‘자신이 생각했던’ 철학이란 무엇인가. 이것의 뿌리가 소크라테스로 대표될 수 있는 고대의 철학적 정신이 아니던가. 어려운 용어들로 가득 차서 뜬 구름을 잡는 듯한 느낌만 준다는, 소위 철학 ‘이론’들을 공부하는 것보다—삶의 주체로서 나 자신이 무엇을 선호하는지, 어떤 가치를 추구해야 하는지, 내적 반성에서 얻어진 성찰의 결과를 구체적인 삶에 어떠한 형태로 적용해야 하는지 등을 고민하는 것.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자신의 철학적 견해를 타인에게 이야기하며, 타인과 대화를 나눔으로써 일상적인 삶을 영위해나가는 것이 우리가 보편적으로 동의하는 ‘철학을 한다’는 것의 의미가 아닐까.



 

3. 실천이라는 빛이 잠시 약화된 시기


 

아도는 고대 철학의 실천적 성격이 약화된 배경을 그리스도교가 대두한 중세에서 찾는다. 하지만 무작정 그리스도교 철학을 비판하지 않으며, 오히려 초기의 이 철학은 ‘담론인 동시에 삶의 양식’이었음을 밝힌다. 초월적인 실재인 하느님의 품으로 돌아가기 위해 현세의 자신을 주의 깊게 살피고, 끊임없이 자신의 내면을 성찰함으로써 영혼의 평정을 찾고 근심을 덜어내는 등의 행동들은 고대에서 그토록 강조하던, 삶으로서의 철학에 해당하는 정신적인, 실천적 양식들이라 볼 수 있다.

 


“고대 철학이 철학적 담론과 삶의 형태를 그토록 긴밀하게 연결지었던 데 반해, 어째서 오늘날의 철학 교육—일반적으로 철학사를 가르치는 형태로 이루어지는—에서는 철학이 주로 담론으로서 제시되고 있을까? 그것도 이론적, 체계적 담론 혹은 비판적 담론, 어쨌든 철학자의 삶의 방식과는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는 담론으로서 말이다.”


- 책의 411쪽 중에서.



하지만 아도는 3부의 11장부터 삶의 형태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던 철학이 점차 담론으로 제시되기 시작한 배경을 살피며, 그것이 삶의 방식이라는 성격에서 벗어나기 시작했음을 지적한다. 이때의 배경은 중세에 신학으로서의 그리스도교가 급격히 부상한 것에 해당한다. 신학을 보조하기 위한 방법론에 철학을 가져옴으로써 삶의 양식과 담론이 단절되기 시작했다.


아도는 이때의 철학을 두고 신학의 시녀라는, 다소 자극적인 문구를 붙이기도 한다. 동시에 오늘날 철학이 철학적 지식이라는 측면으로 부각되고 삶의 양식으로서 조명 받지 못하게 된 배경을 중세에서 찾기도 한다. 특히 13세기부터 대학들이 출현하고 아리스토텔레스의 번역서가 폭넓게 출간되면서, 지식의 습득이라는 목적에 맞추어 철학이 수단적인 방법론으로 편입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때 대학은 수도사들이 성직에 종사할 수 있게 교육을 제공하는 장소였고, 대량으로 보급된 아리스토텔레스 번역서들은 교양을 쌓고 신학을 공부하기 위한 교과서로 쓰였다. 학(學)을 위한 철학이 담론의 형태로 이때부터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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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소 창문 너머로 촬영한 사진이다.
이건 좀 잘 찍은 것 같다고,
조금 생색을 많이 내보기도 했던.


이러한 상황은 당장 오늘의 우리가 철학 강의를 들을 때 가장 익숙한 수업 방식 중 하나기도 하다. 역사의 특정한 순간에 존재했던 철학자의 원서를 읽고 해독하고, 그의 철학적 논변은 어떠했는지 학습하는 것 말이다. 아도가 주장한, 삶의 양식에서 너무나도 멀어진 철학적 담론은 바로 오늘의 철학 수업을 일컫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비록 그가 고대철학의 실천적 정신이 ‘실종’ 되었다는 등, 철학이 단지 ‘시녀’로 전락했다는 등 비판적인 어조를 취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그는 여전히 삶의 형태와 연결시키는 의미로서의 철학이 완전히 없어지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11장의 제목이 ‘고대 철학 개념의 실종과 <재출현>’인 이유도 이러한 그의 생각에서 기인했을 것이다. 실제로 그는 후반부에 이르러 고대 철학의 개념이 서양 철학사 전반을 통틀어봤을 때 아직 남아있다고 이야기한다. 문제점이 발견되기 시작했던 중세에서는 물론이고 중세 이후의 근대에 이르기까지 상당한 철학자들이 여전히 삶과 철학 사이의 끈을 놓지 않고,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활동으로 지각하고자 하였음을 역설한다.


본 장의 제목을 실천이라는 빛이 ‘잠시’ 약화된 시기라 지은 이유는, 아도가 3부 전반에 걸쳐 철학적 담론이 격상한 중세부터 현대까지를 비판하고 있음에도 여전히 고대의 실천적 정신을 이어나갈 희망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추측건대 아도가 제3부를 통해 전달하고자 했던 건, 중세에서부터 철학이 완전히 타락하기 시작했다는 이분적인 사고방식이 아니었을 것이다. 담론으로서의 철학이 대두되면서 삶으로서 철학한다는 의미가 ‘잠시’ 감추어진 상황을 살피며—다시금 생활양식으로서의 철학으로 회귀하자는 주장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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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삶으로서 철학함을 ‘환기’시키는 것


 


“정신 수련. 시간의 지속에서 벗어나기. 고유한 정념들, 허영, 그대의 이름을 둘러싼 억누를 수 없는 소문들(때때로 그대는 이것이 가렵기 짝이 없는 고질병처럼 느껴질 것이다)을 떨치기 위해 노력할 것. 뒤에서 수군대는 험담을 피할 것. 자유로운 모든 인간들을 사랑하기. 스스로를 초월함으로써 영원해질 것.”

 

“실천에 관한 한 나는 다양한 도덕적 학파를 실험실로 여긴다. 이 실험실에서 삶의 기술에 대한 여러 처방들이 철저하게 실천되고 그 극단까지 사유된다. 모든 학파들이 실험을 통해 얻은 결과들은 모두 다 우리에게 적법한 소유로서 속해 있다. 그러므로 이전까지 에피쿠로스주의의 처방에서 유익을 구했다 하여 스토아주의의 처방을 채택하면서 양심의 가책을 느낄 필요는 전혀 없다.”


- 책의 423쪽 중에서.


 

결국 실천의 문제다. 어떤 철학적 입장을 공부한다고 함은 단지 그것을 공부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그러한 배움을 구체적인 삶의 형태로 실천해야 한다는 것. 다소 투박하고 단순명료한 표현일 수 있겠으나 마지막 장을 넘기면서 내내 들었던 생각이다. 동시에 아도가 우리에게 전달하고자 했던 메시지라고 느끼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메시지는 철학을 바라보는 완전히 새로운 관점을 제공하지 않는다. 삶의 형태와 철학적 담론을 결부시키는 시도는 이미 오래 전부터 행해져 왔기 때문이다.


다만 어느 순간부터 담론으로서의 철학이 삶에서 떨어져 나가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했을 뿐이다. 그러한 와중에도 그것이 완전히 분리되지는 않았고, 여전히 양자는 이어져 있기에 언제든 그 끈을 서로가 잡아당긴다면 다시금 상호가 하나로 합쳐질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그리고 아도에 따르면 양자를 합치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이를 위해 아주 거창하고, 비범한 능력이 필요하지는 않다. 니체가 스토아주의의 모델과 에피쿠로스주의의 철학적 모델을 선택적으로 받아들여 자신의 삶에 적용시키고, 살아가기 위한 작업에 몰입했던 것처럼 우리도 마찬가지의 태도를 취하면 되지 않을까. 그래서 우리에겐 새로운 깨달음을 인식하는 게 아니라 환기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무엇을 위해 살아갈 것인가, 나는 잘 살아가고 있는가와 같은 고민들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맞닥뜨리는 고민들이다. 이것에 관한 해답을 구하기 위해서 담론의 형태로 남겨진 철학적 사유들을 검토하며 스스로의 삶을 되돌아본다면, 프리드만과 니체가 당부했던 실천적 작업을 우리는 충분히 이행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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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아직 고대 철학적 사유는 현행적이며, 언제든 다시 현행화될 수 있다는 것이 아도의 소견이다. 삶을 살아가는 와중에 철학적 논변들을 실천하며 “철학할” 희망이 아직 남아있다는 뜻이다. 특정 시대의 철학자들이 어떤 견해를 피력했는지, 그 시대에 유행했던 철학적 논의들은 무엇인지를 역사적 사실로서, 혹은 하나의 이론으로서만 배우고 끝나는 것은 우리에게 충분하지 않은 과정일 수 있다. 진정으로 철학을 공부했다고 말하기 위해서는, 비록 철학 사상들을 많이 공부하지 못했을 지라도 배운 것만큼은 자신의 삶에서 소화해보아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단지 철학적 사실을 단편적으로 습득하는 게 아니라, 그것들을 일종의 실험실로 간주하며 삶 속에서 끊임없이 실험하고 우리의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살아가기 위해서, 삶의 형태로 철학하는 시도는 아직도 유효하다. 따라서『고대 철학이란 무엇인가』는 이처럼 개인의 삶과 담론을 하나로 이어 총체적인 삶으로서의 철학, 그 자체를 만들기 위한 아도의 정초 작업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한 토대를 먼 옛날의 고대에서 찾아보며 다시금 우리에게 고대의 정신을 일깨워주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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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매일, 비행을 할 것."


- 책의 423쪽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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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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