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도쿄에 대한 단상 [여행]

글 입력 2019.06.01 0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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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에 갔다 온 지 어느덧 3주 가량이 지났다. 도쿄는 내 첫 해외여행지이기도 하고, 최초로 친구와 해외여행을 떠난 곳이기도 해서 여러 모로 나에겐 특별한 의미가 있는 곳이다. 아무것도 모르던 중학생 시절 사촌언니가 데리고 다녔던 도쿄와 성인이 되어 방문한 도쿄가 사뭇 달랐던 것처럼, 일본어를 잘 하는 친구에게 모든 것을 맡겼던 여행과 혼자 떠난 이번 여행도 꽤 달랐다.


시부야의 붐비는 사거리, 쉴 새 없이 움직이는 신주쿠역의 기차들, 에스컬레이터에서 언제나 한 줄로 나란히 서 있는 사람들 등… 전체적인 그림은 비슷하지만 방문할 때마다 다른 것들을 보고, 다른 느낌을 받는다는 사실로부터 내가 변해 온 것을 느낀다. 아쉽게도 이전까지의 기록은 별로 남아 있지 않지만 스물 다섯 살의 도쿄는 꼭 기록으로 남기고 싶다. 몇 년 뒤의 내가 다시 도쿄를 방문하게 될 때를 대비해서.




도쿄의 정원



이번에 느낀 것은 도쿄에 초목이 정말 많다는 사실이다. 공원들도 일정한 간격으로 조성되어 있고, 길거리에서도 주택가에서도 항상 초록색이 보인다. 특히 도쿄의 정원은 올해 처음 방문해 봤는데, 이렇게 고즈넉하고 현실과 동떨어진듯한 공간이 도심에 존재할 수 있다는 것에 놀랐다.


기요스미 정원은 기요스미 시라카와역 근처에 위치한다. 기요스미에 사는 주민들은 마음만 먹으면 이런 아름다운 곳에 쉬러 올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어 조금 부러웠다. 들어갈 때마다 소정의 입장료를 내야 하는데, 연간이용권이 있다는 점도 신선했다. 내가 근처에 산다면 연간 이용권을 끊어서, 일주일에 한 번씩은 올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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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요스미 정원은 가운데 큰 호수를 둘러싸고 나무와 풀들이 우거져있는 형태이다. 들어가면 가장 처음 보이는 건물은 마을 회관처럼 생긴 전통식 건물인데, 이를 지나쳐 두루미와 자라가 유유자적하고 있는 호수의 징검다리를 건너면 Ryoutei House라는 찻집이 나온다.


원래는 예약을 해야지만 들어갈 수 있는데, 호기심 어린 눈으로 안쪽을 기웃거리는 우리가 안돼 보였는지 안으로 들어가서 구경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셨다. 호수를 마주보고 툇마루에 앉아 시간을 보냈다. 짧은 몇 분 동안이었지만 마음이 평안해지고 차분해지는 것을 느꼈다. 잔잔한 파동, 유유자적 움직이는 자라와 잉어들, 바람에 살랑이는 풀을 바라보며, 정원 너머로 보이는 기다란 건물들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나무가 이렇게 많음에도 전체적인 정원의 모습은 잘 정돈되어 보였는데, 둥글게 이어진 길을 걷다가 가지를 정리하는 정원사의 모습을 보고 이유를 깨달았다. 3대 이상으로 가업을 잇는 일이 빈번한 일본의 장인 정신이 이런 곳에도 깃들어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수고와 노력이 있어 이렇게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할 수 있는 것이리라. 특히 아름다웠던 풍경은 우거진 나무 사이로 보이는 나무 다리들과 그를 건너는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햇빛을 반사하며 빛나는 쨍한 초록의 색감이 마치 영화 언어의 정원 속 한 장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맑은 날의 풍경도 정말 아름다웠지만 비가 올 때, 눈이 올 때, 단풍이 지고 낙엽이 떨어질 때의 이 곳 풍경이 궁금해졌다.




도쿄의 축제




우연히 내가 도쿄에 머무르는 기간 중 일본 3대 축제 중 하나인 칸다 마츠리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원래는 사람이 지나치게 붐비는 것을 싫어해서 딱히 갈 생각이 없었는데, 이런 기회가 또 있을까 싶기도 하고 동선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기도 해서 보러 가기로 했다. 타국의 축제는 처음이었는데도 이상하게 설레는 마음이 별로 없었던 것 같다.


그러던 마음이 축제의 장면을 한 두개 씩 눈에 담으면서 서서히 바뀌었다. 신사 근처에 가니 사람들이 엄청 몰려있는 사이로 반짝거리는 것들이 왔다 갔다 하는 것이 보였다. 알고 보니 축제 날은 신사에 모셔진 신이 일 년에 한 번 외출하는 날이기도 해서, 사람들이 가마를 지고 신의 외출을 도와주는 중이었다. 가마가 꽤 무거운지 상당 수의 사람들이 함께 나르고 있었고, 그래서 멀리서 봤을 때 제자리에서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었다.


가마 행렬에 가까이 가니 초록 옷을 입은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가마를 나르는 사람들 외에 기합 소리를 내며 박수를 치고 절을 하는 등 의식에 참여하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군데 군데 완전히 서양인처럼 생긴 사람들도 참여하고 있었다. 판이하게 다른 문화권의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전통의 매력이 참 뚜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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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마 행렬을 구경하던 중 북 소리가 크게 나서 가 보니 어떤 단체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북과 장구를 연주하고 있었다. 중간 중간 큰 소리로 고함을 치는 방식이 처음에는 약간 적응되지 않았는데, 계속 보니 연주자들의 표정과 동작이 너무 즐겁고 뿌듯해 보여서 즐거운 마음으로 보게 되었다. 땀을 뚝뚝 흘리면서도 열심히 채를 휘두르는 모습에서 정성을 다한다는 표현이 생각 났다. 공연을 보며 눈물을 훔치는 사람까지 있었는데, 그 만큼 와 닿지는 않았지만 즐겁게, 열심히 하는 마음만큼은 모두에게 전해지지 않았을까.


몇 시간 동안이나 이어지는 퍼레이드도 같은 점에서 감동적이었다. 일본 전통 설화를 바탕으로 해서 이야기를 기획하고, 소품을 만들고, 퍼포먼스를 하는 행렬이 여러 개 이어졌는데 전통 설화를 잘 알지 못하는 입장이라 아쉽긴 했지만 생기 있는 표정으로 각자의 할 일을 열심히 하는 모습들이 참 아름다웠다. 환호하는 관객들에게서도, 자신들의 뿌리를 잘 알고 자랑스러워 하는 에너지를 느낄 수 있는 순간이었다.




도쿄의 바다



엄밀히 말하면 도쿄는 아니고, 도쿄 근교의 Hayama라는 지역이다. 도쿄에 올 때마다 바다가 있는 곳은 빠지지 않고 갔던 것 같다. 저번에는 <바닷마을 다이어리>의 배경으로 유명한 에노시마에 갔었기에, 이번에는 조금 다른 곳으로 향하고 싶었다.


마침 별로 유명하지 않은 근교 바닷가를 추천받아 기차를 타고 갔다. Hayama는 버스 하나로 한 두시간이면 다 돌 수 있을 정도로 작은 마을이었다. 관광지로 유명한 곳은 아니라서 북적거리지 않는 점이 좋았다. 자연스러운 일상을 지속하는 주민들 사이에서, 그 분위기를 망치지 않고 이방인으로서 최대한 녹아들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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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착하자마자 마을 버스를 타고 향한 바다에는 사람들이 꽤 모여 있었다. 접이식 의자에 앉아 파도가 겨우 닿지 않을 정도로 해변 가까이에 앉아서 볕을 쬐던 노부부, 서핑 보트를 나르는 대학 동호회원들, 우리와 같은 여행객들, 바다를 보러 나온 동네 주민들... 안개가 많이 낀 하늘이 흐릿해서 바다의 색과 거의 차이가 없었는데, 하늘과 지상의 경계가 그토록 흐려진 풍경을 본 적이 없어 마치 세상 끝에 온 것 같은 기묘한 기분이 들었다.


해변을 걷고 걸어 낚싯배들이 모여 있는 작은 부두에 다다랐다. 그 위에서 작은 조개들로 가득 찬 유리병을 발견했는데, 소유주가 누구일지 상상하며 사진을 찍고 있으니, 다른 노부부 한 쌍이 그 모습을 보고 웃음을 건넸다. 마주 웃을 수밖에 없었던, 기분 좋은 웃음이었다.


마을은 온통 작고 아기자기한 가게들로 가득한 것 같았다. 드라마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머리 두건을 한 주방장이 있는 전통 있는 해물덮밥 집도 있었고, 먼지 쌓인 오래된 도자기들로 가득한 잡화점도 있었다. 바다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는 신사를 방문했는데, "기침을 멎게 해주는 신"이 모셔져 있었다.


이렇게 사소하고 일상적인 부분을 관장하는 신이 있다니. 종교를 별로 믿는 편은 아닌데, 정말 기침의 신이 모셔져 있다면 이런 작은 바닷마을에서 기도하러 오는 사람들의 기침 문제 만큼은 정말로 신경 써 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을을 거의 한 바퀴 돌고 나니 해가 질 때가 되어 걸어서 돌아가기로 했다. 곧 해가 떨어질 것 같은 어둑한 분위기가 전혀 무섭지 않고 오히려 평화로운 느낌이 드는 아름다운 마을이었다.




도쿄의 서점



이번 여행은 거의 하루를 서점 방문하는데 써야 할 정도로 가고 싶은 서점이 많았는데, 대다수는 일정이 맞지 않아 결국 가지 못하게 되었다. 그래도 츠타야 서점 다이칸야마점에서 시간을 보낼 수 있어 정말 좋았다. 시부야역에서 걸어가는 여정이 꽤나 길었는데, 덥고 지친 와중에 식물들에 둘러싸인 츠타야 서점을 발견했을 때 오아시스를 발견한 것마냥 갑자기 마음 속에서 청량함을 느꼈던 기억이 난다. 거의 감동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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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은 네 개의 섹션으로 나뉘어 있었고 각 건물의 2층이 다리로 이어진 특이한 구조였는데, 그 다리에서 유리창 너머로 푸릇푸릇한 잎사귀들이 보이는 풍경이 너무 좋아서 다리 위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까막눈이라 읽을 수 있는 책은 없었지만, 공간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올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햇빛이 잘 드는 통유리 창 앞에 나란히 놓인 책상들에서 공부를 하거나 책을 읽는 사람들의 일상이 부러웠다.


사진집과 잡지 구경을 하다가, 음반 섹션으로 이동했다. 직원 없는 카운터에서는 재즈 앨범이 잔잔하게 흘러 나오고 있었고, 바닥에 깔린 부드러운 카펫이 나머지 소음을 흡수하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조용했다. 반가운 이름들을 몇 개 발견했는데 거의 대여용이어서 구매할 수 없었다. 스트리밍을 이용하지 않고, 음악을 듣고 싶을 때마다 츠타야에서 앨범을 빌리는 일상은 어떨지 궁금해졌다.


츠타야에서 나와 서점은 아니지만 도쿄에 가면 꼭 들르고 싶은 타워 레코드에서, 츠타야에서 듣지 못했던 음악을 실컷 들었다. 해가 져서 어둑할 무렵이었는데, 매장 한 켠에 요새 핫한 Top3 시티팝을 들을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그곳에 서서 유리창에 비치는 붉은 색 네온사인을 보며 Taeko Ohnuki의 <Sunshower> 앨범을 듣고 있으니 도쿄라는 도시에 잘 어울리는 장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분위기와 음악이 너무 잘 어우러져서, 거의 십 분을 서서 노래를 들었는데 참 길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도쿄의 커피



올해는 최대한 저번에 가 보지 않았던 곳을 가자! 라는 여행의 모토가 있었지만, 재작년 도쿄에서 먹었던 후글렌 커피의 라테 맛을 잊을 수 없어 재방문 하게 되었다. 그 땐 따뜻한 카페 라테를 시켰는데 스팀밀크의 부드러움에 정말 깜짝 놀랐던 기억이 있다. 살면서 먹었던 라테 중 가장 부드러웠다고 단언할 수 있는 맛이었다. 이번엔 날씨가 더워 아이스 라테를 시켰다. 따뜻하든 차갑든 분명 놀랄 만한 맛일 거라는 확신이 있었는데 과연 얼음이 녹아도 맛있는 커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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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수기가 아니라서 그런지, 이번에 방문한 후글렌 커피는 빈 자리도 꽤 있었고 일상을 보내는 듯한 사람들로 차 있었다. 차분한 분위기 덕분에 나도 카메라를 내려 놓고 여행을 기록하게 되었다. 종종 밖에서 사진을 찍는 관광객들도 있긴 했는데, 내가 앉아 있던 자리 맞은편이 가게의 정면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스팟이라 계속해서 공책을 보고 있어야 했다.


그 자리에서 여행객으로서 주민들과 관광객의 온도 차이에 대해 생각했다. 누구에게는 아주 익숙한 공간이 다른 어떤 이에게는 경이롭고 신비한 공간일 수도, 평생 한 번 오는 공간일 수도 있다는 괴리감. 아무리 일상을 여행처럼 살려고 해도 결국 진짜 여행과는 다르게 되는 이유가 있지 않을까.


그것이 여행의 특별함이겠지만, 사실 이번에는 "여긴 다시 못 올 거야"같은 생각은 하지 않기로 했다. 특히 유럽에 다녀오고 나서, 어디든 다시 올 수 있다는 생각을 할 수 있게 된 것 같다. 예전에는 일본도 머나먼 해외라는 생각이 들어 좀 어렵게 생각했었는데, 덕분에 이번 여행은 별 고민 없이 쉽게 결정할 수 있었다. 충분히 다시 올 수 있다는 마음가짐은, 그렇지 않을 때보다 여행을 더 여유롭고, 덜 아쉽게 만들어 주는 듯 하다.


여행 후 일상에 적응하는 일도 더 쉽다. 여행은 언제든지 가능하지만, 나의 일상을 지키며 할 수 있는 일을 해야지만 여행도 마음 편히 떠날 테니까. 앞으로 당분간은 이렇게 설레는 일도 별로 없을 거고, 미세먼지도 가득하지만, 그래도 여기가 내 집인걸.



[임예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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