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여성을 향한 폭력 없이는 예술을 완성할 수 없나요? [문화 전반]

'걸작'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폭력들
글 입력 2019.05.30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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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영화 ‘토탈 이클립스’를 보았다. 그 영화를 선택하게 된 동기는 가벼웠다. 랭보를 연기하는 전성기 시절의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를 감상하고 싶은 마음, 오직 그뿐이었다. 과연 영화 속의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내가 기대했던 것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반짝반짝 빛났다. 그의 미모는 눈부셨고 그의 연기력은 랭보의 불안한 내면을 완벽하게 표현해냈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눈부신 미모도, 빛나는 연기력도 다 보았으니 내가 영화를 본 목적은 모두 달성한 셈이었다. 그런데 감상을 마친 뒤의 내 마음은 전혀 개운하지 않았다. 머릿속에서 맴도는 건 디카프리오가 아니라 베를렌느의 아내 마틸드였다.

 

영화는 두 시인 랭보와 베를렌느의 열정적인 사랑을 다뤘다. 예술적인 교류에서 시작해 긴 시간 동안 애증의 파도를 넘나드는 두 남자의 사랑은 애절했지만 마틸드를 떠올리면 그 사랑에 대해 마냥 고개를 끄덕일 수 없었다. 남성 퀴어 영화에서 여자 캐릭터들이 상처받는 것을 숱하게 봐왔었다. 하지만 마틸드가 받아야 했을 상처는 여태 봐왔던 것들 중에서 유독 그 깊이가 심각했다. 베를렌느는 랭보와 외도하는 것으로 모자라 랭보를 내보냈으면 좋겠다는 마틸드의 말에 (심지어 그곳은 마틸드 부모님의 집이다.) 윽박 지르고, 만삭인 그녀를 던지고 구타한다. 내가 가장 경악했던 장면은 만취한 상태로 들어와 마틸드에게 후광을 만들어주겠다면서 그녀의 머리카락에 불을 붙이는 장면이었다.

 

그럼 그 폭력이 제대로 심판되었느냐고 묻는다면 그것도 아니다. 마틸드는 자신에게 그런 짓을 저질렀음에도 남편이 다시 돌아오기를 기다렸고 그를 상냥하게 대해주었다. 그 행위에 대한 비난은 폭력을 당하지도 않은 랭보의 ‘당신은 쓰레기’라는 딱 한 마디뿐이었다. 나는 그러한 자극적인 장면이 이 영화에 그렇게 필요했는지에 대한 의문을 지울 수 없었다. 베를렌느가 심적으로 방황한다는 것을, 그가 가진 비인간적인 모습을 나타내고자 한다면 다른 방법도 얼마든지 있었을 것이다. 알코올 중독의 남성이 자신의 아내를 구타하는 모습을 나는 그저 영화 속 한 장면이라고 넘길 수 없었다. 그러기엔 이미 현실에서 그러한 모습을 너무 많이 봐왔다.

 

생각해보니 나는 예술작품에서 남성이 여성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것을 한두 번 본 게 아니었다. 내가 그동안 걸작이라고 입에 침이 마르게 칭찬해왔던 수많은 영화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 칭찬 속에서 그 안에 담긴 폭력은 일부러 제외해왔었다. 왜냐하면 그 일부 장면이 영화의 작품성을 결정지을 수 없다고 생각했었기 때문이다. 그때의 나를 떠올리니 당시 내가 지녔던 무책임한 태도에 얼굴을 붉히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칭찬했었던 그 영화들은 그저 ‘꽤 잘 만든 영화’가 아니라 영화사에 길이 남을 걸작 중의 걸작들이었다. 사람들이 입을 모아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놓쳐선 안 되는 작품이라고 말하는, 차마 함부로 비판의 목소리를 낼 수 없었던 작품들이었다. 그래서 난 감상했고 감탄했었다. 하지만 이 글에서는 그 영화들을 일부러 조금 삐딱한 시선에서 바라볼 것이다. 그렇게라도 해서 나의 지난 과오를 바로잡고자 한다.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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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들스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몇십 년에 걸친 사랑과 우정과 배신의 드라마를 담은 이 갱스터 영화는 세르지오 레오네 감독의 걸작이자 대작이다. 나는 이 영화를 2015년 재개봉 당시 극장에서 관람했다. 84년에 상영되었을 때보다 훨씬 늘어난 4시간이 넘는 러닝 타임의 재개봉 버전은 나를 서울의 한 영화관이 아닌 192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의 미국으로 데려가주었다. 영화만이 선사할 수 있는 시간의 마법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그 긴 러닝 타임에도 불구하고 나의 집중력은 흐트러지지 않았고 마지막 끝나는 순간에는 그 긴 여운에 잠시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할 정도였다. 내게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는 같은 갱스터 영화이자 또 다른 영화사의 길이 남을 걸작인 ‘대부’보다 더 감정적 여운이 강했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 누들스가 겪은 장대한 서사가 아니라 누들스가 데보라를 차에서 성폭행하는 장면이다. 데보라는 누들스의 첫사랑이자 그가 폭력으로 얼룩진 삶을 살아가는 동안에도 잃고 싶지 않았던 순수한 사랑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둘의 사랑은 오랜 기간에 걸쳐서 진행된 만큼 절절했고 나이 든 두 사람이 재회하는 장면에선 눈물이 흐르기까지 했다. 그런데 그로부터 4년이 흐른 지금 내게 데보라는 누들스가 평생을 바쳐 사랑한 대상이 아닌 차에서 제발 그만해달라고 울부짖던 피해자의 모습으로 기억된다.

 

영화관에서 그 장면을 보았던 당시 나는 어서 그 장면이 끝나기를 바랐다. 원래부터 성폭행 장면을 보기 힘들어했는데 그것을 큰 스크린으로 보니 더욱더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아무리 자신을 떠나려 했다고 해도 어린 시절부터 그렇게 좋아했던 데보라를 어떻게 저런 식으로 함부로 대할 수 있는지, 사랑의 감정과 성폭행이 공존할 수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게다가 그곳엔 운전기사도 있었다. 그 운전기사 덕분에 그 행위가 중단될 수 있었던 것이지만 애초에 자신이 사랑하는 여성을 타인 앞에서 가장 수치스럽게 만든 것 자체부터 잘못된 것이었다.

 

긴 영화 관람을 마치고 기숙사에 도착하자 룸메이트가 내게 영화는 어땠느냐고 물었다. 나는 영화에 대한 찬양을 늘어놓은 뒤 ‘그런데 성폭행하는 장면이 너무 보기 힘들었어. 그것만 빼고 좋았어.’라고 덧붙였다. 그때의 나는 그것을 빼도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도 감독이 의도적으로 넣은  영화의 한 부분이었다. 한 장면, 한 장면이 그 영화의 정체성이며 작품을 논할 때 문제 되는 장면을 편의에 따라 골라내선 안 된다는 것을 그때의 나는 몰랐었다.

 

다시 생각해보니 누들스를 포함한 어린아이들이 동네에서 매춘하는 여성에게 성을 사는 장면도 있었다. 그리고 그때의 나는 분명 그 장면을 보고 불쾌함을 느꼈지만 그 불쾌함은 잠깐뿐, 위대한 영화를 완성하기 위해서라면 저런 장면도 눈 감을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넘겼었다.



 

시계태엽 오렌지 (1971)



‘스탠리 큐브릭’이라는 이름을 빼놓고 영화사를 논할 수 있을까? 수많은 영화감독에게 영감을 불어넣어준 이 위대한 영화감독이 만든 ‘시계태엽 오렌지’는 ‘인간은 악을 통제할 수 있는가’라는 철학적인 질문을 던지는 걸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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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언급한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는 눈살을 찌푸리게 한 폭력이 몇몇 장면에서 나타나지만 이 영화는 거의 모든 장면에서 나타난다. 왜냐하면 이 영화에서의 폭력은 곧 주제의식과 아주 밀접하게 닿아 있는 중요한 소재이기 때문이다.

 

주인공인 알렉스가 저지르는 폭력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처음부터 알렉스와 그 무리가 한 노숙자를 무자비하게 폭행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이 영화는 집단 싸움, 주택 침입, 절도, 강간 등 숱한 폭력들로 얼룩져있다. 그 여러 폭력 중 나를 가장 괴롭게 한 장면은 한 부부의 집에 침입해 남편은 줄로 묶어 폭행하고 그 남편 앞에서 아내를 강간하는 장면이었다. 이 자극적인 장면은 생략도, 암시도 없이 적나라하게 표현된다.

 

물론 폭력적인 장면이 많이 등장한다고 해서 이 영화가 그것들을 모두 긍정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주인공 알렉스는 순수한 ‘악’ 그 자체이며 금지된 욕망을 마음껏 분출하는 인물이다. (주인공 일당이 범죄를 모의하는 곳의 의자는 여성의 나체를 본뜬 모습을 하고 있다.) 인성 개조 실험인 루드비코 실험을 통해 통제된 그의 여러 욕망 중 성욕도 있는 것을 보면 영화는 분명히 알렉스의 성적 욕망을 그의 악을 이루는 한 요소로 바라보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이 자극적인 폭력의 나열이 주는 영향력은 어마어마하다. 실제로 ‘시계태엽 오렌지’는 상영 후 엄청난 수의 모방범죄를 양산했다. 그로 인해 결국 감독은 직접 해당 영화에 대한 상영 금지를 신청했다. 폭력이 나쁘다는 것을 모르는 이는 아무도 없다. 그럼에도 끊임없이 여러 범죄가 일어나는 이유는 그런 범죄를 저지르는 이에겐 그게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아무리 이 영화가 알렉스가 저지르는 폭력을 ‘악’으로 규정짓는다고 해도 시종일관 이어지는 자극적인 묘사는 그 자체로 엄청난 위험함을 내포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희생되는 것은 결국 약자이며 그중에서도 상당수는 여성이다.

 

지금 다시 돌이켜보니 영화가 알렉스의 폭력을 정말 강력하게 ‘악’으로 규정지었는지에 대해서도 의문이 든다. 영화가 후반부로 갈수록 나는 점점 알렉스의 행동에 무뎌졌고 심지어 그를 매력적으로 바라보기까지 했다. 이게 단순히 나의 문제인 것일까? 영화가 폭력을 묘사하는 방식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일까?

 

역시나 당시의 나는 이 영화를 여러 사람에게 찬양했다. 폭력이 곧 주제였기 때문에 ‘폭력적인 장면이 보기 힘들었어.’라는 덧붙임마저도 없었다.

 

 

 

예술과 현실의 경계



누군가는 ‘예술은 예술일 뿐’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 예술을 만드는 것도, 향유하는 것도 모두 이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뤽 베송 감독의 ‘레옹’은 특유의 독특한 분위기로 많은 사랑을 받았지만 마틸다를 연기했던 어린 나탈리 포트만에겐 상처로 가득한 영화이다. 나탈리 포트만은 시간이 지난 후 인터뷰를 통해 ‘레옹’에 출연한 이후 열세 살의 나이에 자신을 향한 강간 판타지로 가득한 내용의 편지를 받았던 사실과 한 지역 라디오에서 그녀의 18세 생일을 카운트다운하며 그녀와 합법적으로 잠자리할 날을 세기도 했다는 사실을 밝혔다.

 

영화 속 폭력 장면이 실제로 이루어졌던 사례도 있다.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감독의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에서 출연했던 마리아 슈나이더는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뒤 인터뷰에서 말론 브랜도에게 강간을 당하는 장면이 연출이 아닌 실제 강간이었다고 말했다. 해당 장면은 오로지 감독과 말론 브랜도 사이에서만 협의가 이뤄진 것이었고 마리아 슈나이더는 모른 채 진행된 것이다. 강간을 당하는 마리아의 절규를 사실적으로 담아내기 위해서 그랬다는 감독의 말은 그녀의 상처를 더 깊게 만들 뿐이다.

 

정말 심각한 것은 그런 영화들로 인해 폭력의 피해자가 스크린 밖에서도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다. ‘시계태엽 오렌지’의 사례가 그 사실을 증명한다. ‘예술’과 ‘걸작’이라는 이름이 가진 힘은 대단하다. 그 이름으로 폭력은 너무나 손쉽게 미화되고 포장된다. 그 미화가 얼마나 위험한지 깨달았을 땐 이미 많은 피해자가 생겨난 뒤이다.

 

앞에서 열거한 영화들은 모두 아주 오래된 영화이다. 그때의 젠더 의식과 지금을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그런 문제가 있는 장면들이 어떤 맥락에서 나타나고 용인될 수 있었는지도 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시대가 아니라 지금 2019년을 살고 있다. 작품이 오래되었다고 해서 그 작품을 보는 우리의 시각까지도 퇴보해서는 안 된다. ‘고전’, ‘걸작’이라는 이유로 무시되었던 그 작품들이 범한 잘못을 지금이라도 바로 잡아야 앞으로의 예술작품들이 범할 잘못을 줄일 수 있다.



[진금미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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