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내 인생을 훔치러 온 나의 친구, 그리고 작가, 연극 "단편소설집"

글 입력 2019.05.17 2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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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가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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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단편소설집>. 극 중 문제는 세 줄 요약이 가능하다. 스승인 루스 스타이너와 제자인 리사 모리슨. 둘은 소설 작가이고, 루스의 비밀스러운 청춘과 사랑이야기를 리사가 우연찮게 들었다. 그녀는 허락도 구하지 않고 자신의 첫 장편소설로 출간하겠다 한다.

이야기가 해결될 수 있을까. 싸우는 모습보다는 싸우고 나서를 많이 기대했다. 이전 둘 사이에 쌓인 시간, 싸우는 모습으로 1막과 2막이 진행되어서 예상했던 것보다는 예측 가능한 방향으로 극이 전개되었다. 막상 2막에서 싸우기만 하고 극이 끝났다. 이렇게 끝인가 싶어 아쉬웠다.

어리숙함을 표현하기 위해서인지 1막에서 등단 전의 리사는 평서문 같은 말투에 이상한 지점에서 버럭버럭 소리를 지른다. 그 상황이나, 그 말투가 적응되면 자주 웃음이 배어 나오기도 한다. 그러나 어리숙한 게 아니라 자기만의 세계에 갇힌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유투브에서 같은 극본으로 진행된 다른 버전을 보니 그냥 보통 대화체로 했던데 연극에서 독특한 평서문 톤을 유지하는 게 큰 장점으로 보이진 않았다.

2막에서 이 둘의 대화가 갈등의 구조가 성립하기는 할까? 아무리 봐도 한쪽이 말도 안 되게 설득력이 없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고 생각했다. 루스에게 동의했고 리사의 타협하지 않는 모습에 탄식이 나왔다. 물론 실제 입장이 되어보면 리사의 고민이 이해는 가지만  해결방법이 이해가 가진 않았다. 여러모로 한쪽에 기우는 싸움처럼 느껴졌다. 리사에게 조금 유리한 설정이 있었으면 말싸움이 피장파장이었을 것이다. 말꼬리를 물고 늘어지는 느낌상 싸움이 다소 필요 이상으로 길었다고도 볼 수 있겠다.

나를 피곤하게도, 그리고 생각할수록 속상하고 화나게 했던 2막의 대표적인 포인트들을 정리해 보았다. 대사 그대로를 옮긴 것은 아니고 비슷한 뉘앙스로 대화를 구성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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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스: 나에게 미리 말했다면 좋았을 거야. 미리 말했다면!

리사: 두려웠어요. 선생님이 쓰지 말라고 하면 정말 못쓸 것 같아서 말하지 못했어요.(그리고 써서 출판했어요(?))


루스가 리사에게 '나에게 말이라도 해주었다면!'이라는 말에 감정이입이 특기인 나는 무척이나 공감했다. 나 역시 적어도 미리 말해주었더라면 이렇게 처참한 기분은 아니었을 일을 겪어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 미리 말해만 주었더라도 무방비하게 상처 받지 않았을 것이다.

리사도 자신의 입장을 정리해서 말했다. 설득력이 별로 느껴지지 않았다.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고? 싶은 부분도 있었다. 특히 루스에게 그 이야기를 쓰겠다고 말을 했다가 그녀가 정말 쓰지 말라고 하면 정말 못쓸 것 같아서, 두려워서 말하지 않았다고 한 부분. 그게 그럴듯한 변명이나 된단 말인가. 상처 줄까 두렵다는 사람이 불특정 다수에게 책을 내고 루스가 혹시나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것쯤은 두렵지 않았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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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스: 넌 내 이야기를, 내 인생을 훔쳤어!(파르르)

리사: 이야기에 니 꺼 내꺼가 어딨어요? 애초에 그랬음 말을 해주지 말든지, 먼저 출간하시든지! 그 이야기를 들은 후 전 달라졌어요. 돌이킬 수 없는 변화가 일어났다구요. 그 이야기는 이젠 제 이야기이기도 해요((?))

루스: 그렇다고 이렇게 그대로 쓰다니! 유태인 이야기는 왜 써? 네가 뭘 잘 안다고? 내 영역을 침범해? 이 책은 쓰레기야!

리사: 유태인이 아니면 유태인 얘기도 못 쓰나요? 그리고 그대로 쓴 게 아니라 전 메세지가 달라요. 선생님 이야기는 모티브일 뿐이라고요. 제 책은 선생님 이야기와는 엄연히 다른 이야기라고요((?))


리사에게 실망한 건 그녀가 했던 말의 여러 부분 때문이었다. 먼저 그녀가 주장한 루스 스타이너와 델모어 슈왈츠의 이야기가 자신의 소설 <미리암의 책>의 '모티브'에 불과하며 둘은 엄연히 다른 이야기라는 부분. '엄연히' 다르다고 하기엔 적어도 극에서 드러난 서문은 받아쓰기를 한 것과 같았다. 뒷부분은 아마 달랐을 것이다. 리사는 그런 디테일을 알지 못했고 그래서 결정적으로 루스와 델모어가 플라토닉한 관계였다는 것을 모른 채 육체적인 사랑을 나누는 사이로 그렸다.

이 시점에서 궁금해진다. 그녀가 모든 이야기를 속속들이 알았다면 그때도 지금과 같은 전개로 썼을까? 혹은 받아쓰기처럼 썼을까. 엄연히 다른데 젊고 시에 빠져있는 유태인 여자 주인공 나이 많고, 악명 높지만 대단한 실력을 가진 남자 주인공에 마늘냄새, 미국 세인트 루이스의 모든 정경을 그대로 그렸을까. 그녀가 정말 모티브만 따온 거라면 서문부터 이건 뭔가 다르겠구나 하는 느낌을 전했어야 한다고 본다. 가능하지 않겠나? 그녀는 '관찰력이 뛰어나고 세대의 목소리가 될' 작가인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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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스: 지금이라도 모든 책을 회수하고 이야기를 내지 않는 게 좋겠어.

리사: 그럴 수 없어요. 이건 제가 선생님을 사랑하는 방법이에요. 이렇게 책으로 내면 자랑스러워하실 줄 알았어요.

루스: 아니, 내가 원하는 방법이 아니라는데도?(그래서 하나도 안 미안하다는 거야?)


루스가 지금이라도 모든 책을 다 회수하고 이 이야기는 내지 않으면 좋겠다는 말에 리사는 그럴 수 없다고 했다. 게다가 사실은 그게 루스를 위해서라고 한다. 그 이야기를 책으로 내면 자랑스러워하실 줄 알았다고 한다. 정말?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고? 루스는 헛웃음을 지었을 것이다. 그리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언제부터 잘못되었을까? 이미 예견된 것이었을까? 그녀가 비서로 들어와서 마구잡이로 벌려진 루스의 책상을 치워놓고 뿌듯해하고, 출장 간 그녀를 기다리며 그녀의 책장이며 집에 하염없이 들어와 있었던 것처럼?

의도는 좋다. 의도는 좋다고 결과가 꼭 좋은 것은 아니다. 상대가 원하지 않는 방식으로 그 사람을 아끼고 사랑한다는 건 일정 부분 폭력적으로까지 느껴진다. 내겐 이유 같지 않은 이유로 들렸다. 나를 자랑스럽게 여기라고 기대한 것 그 이상으로, 자랑스럽게 여길 것이다, 여겨야만 한다고 요구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여기서 루스는 이런 변명이 듣고 싶진 않았을 것이다. 그녀가 듣고 싶었을 말은 간단하다. 미안하다는 것.  미안하다고. 그렇게 생각할 줄 몰랐다고. 그러고 보니 그 말을 한 번도 안 했다. 실수로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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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사: 선생님은 잘못된 곳에 분노하고 계세요. 선생님은 죽음이 두려우신 거예요. 그것 때문에 저한테 화를 내시고 있는 거라고요.

루스: 내가 죽음이 무서워서 지금 화를 내고 있다고? (너 때문에 지금 딱 죽고 싶은 심정이다.)


마지막으로 그녀에게 실망한 건 논점을 흐렸다는 점이다. 지금 루스가 분노하는 점은 '동의 없이' 자신의 이야기를 출판하려고 하는 점이다. 물론 세상의 모든 이야기, 나만 혼자 아는 이야기라는 건 사실상 없다. 정말 모티브를 따왔을 수도 있고, 전달하려는 메세지나 관점에는 조금 차이도 있는 것 같다.

그런데 루스가 분노하는 이유가 늙어서, 죽음이 두려워서라는 말은 꽤나 모욕적이었다. 그러니까 루스는 리사가 아니라 죽음에게 화를 내야 한다는 논리는 이상하다. '동의 없이' 자신의 이야기를 출판한 것은 죽음이 아니라 리사다. 반대로 그럼 지금 리사가 기어코 책을 내는 건 그녀가 너무 죽음과 멀어서, 살 날이 많아서, 루스에 비해 젊고 어려서인가?

루스가 분노하는 이유가 죽음이 두려워서였다면 나 같으면 책으로 죽기 전에 N번째 전성기를 맞은 것처럼 오히려 좋았을 것 같다. 죽음이 두려운 건 결국 사람들이 나를 잊기 때문이 아닌가. 이렇게 잊혀 가는 게 싫어서. 그래서 흥미로웠을 것 같다. 갑자기 나의 젊은 날을 꺼내서 이야기해주고, 사람들은 이게 누굴지 또 궁금해할 테고, 가십을 좋아하니까 '마미손'과 매드클라운 같은 사이처럼 인정하진 않지만 같은 사람은 아닐까 이야기도 할 것이고.

이 소설로 그녀는 죽음이 두렵지 않을 정도의 유명세나 관심을 얻었을 것이다. 노년에도 이렇게 조명을 받는다니 신기한 일이지 않나. 리사의 말은 그냥 당신은 늙었고, 그래서 판단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는 비꼬는 표현으로도 들린다. 더불어 그렇게 죽음이 다가오는 당신의 시대는 갔다는 의미로도. 그러나 적어도 내가 느끼기에 루스는 젊음을 부러워했지만 죽음은 두려워하진 않았다. 아마 분노가 조금 과중했다면 그녀가 두려워한 건 외로움 때문이었을 것이다. 리사가 2년 반 동안 피해 다니는 동안 더 깊었던 그 외로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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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루스와 리사, 당신 둘 사이를 표현할 때 스승과 제자. 친구, 작가 중 중요한 것 순서대로 골라주세요. (작품과는 무관하게 제가 만들어낸 질문과 답변입니다)

루스: 우리는 친구, 스승과 제자, 그리고 동료 작가야!

리사: (어리둥절) 우리는 작가이고, 스승과 제자이고, 그리고 친구입니다.


루스와 리사가 스승과 제자를 넘어 친구 사이라고 하지만 사실상 루스만 그렇게 생각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두 인물은 우선순위가 분명해 보인다. 작가와 친구로 따졌을 때, 루스는 리사를 작가보다는 친구로, 리사는 루스를 친구보다는 작가로 생각했다. 스스로에게도 같은 기준을 적용했고 말이다.

그래서 루스는 리사에게 서운했다. 서운함이란 어찌할 수 없는 감정이다. 내가 상대방을 생각하는 마음보다 상대방이 나를 소홀히, 가볍게 여긴다고 생각하면서 마음을 재기 시작한다. 혹은 이 참에 알게 되는 것이다.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상대방은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차이를 확연하게.

리사는 루스와 다른 지점에서 집요했고, 다른 지점에서 무심했다. 등단은 자신과는 넣지 않기로 한 곳에 말없이 넣었다. 신기하게도 그곳에서 등단을 하게 됐다. 이유야 어찌 됐든 이건 등단이다. 등단! 작가들이 너무나 바라는 일이다. 그런데 그렇게 신나고 엄청나고 중요한 소식을  혼자 결정하고 되어서, 혹은 따로 말하고 싶었다는 이유로 이렇게나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들려준다고 한다. 그래, 그럴 수 있지. 그럴 수 있는데, 근데 그렇다고 그랬어야만 하나?

그녀가 루스의 이야기에서 '모티브'를 땄다고 주장하는 <미리암의 책> 또한 늙고 외로운 루소는 2년 반 동안 이유 없이 자신과 눈을 맞추지 못하고 피해 다니는 와중에 책을 통해서 접했다. 매번 중요한 소식을 그녀는 한 발 늦게, 혹은 다른 이를 통해 들어야만 했다. 같은 소식이라도 그러면 철렁한다. 다른 사람들은 아는데 나만 모르고 있을 때는 더더욱 정말 바보가 된 느낌이었을 것이다. 그 와중에도 그녀는 '무슨 이유가 있었겠지'하는 생각과 '어떻게 그럴 수 있지'하는 생각 사이에서 괴로워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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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리사는 빠르게 정리하고 세상에 둘도 없는 못된 사람이라고 생각해야만 하는가? 꼭 그렇지는 않다. 사실 리사도 리사대로 이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루스, 사랑하는 작가, 선생님, 친구가 왜 이렇게 화를 내는 걸까? 그녀가 어리숙한 작가 지망생일 때, 루스는 있던 일을 과장하고, 맥락을 비틀어서 상황에 유리하게 쓰지 않았던가. 그건 거짓말이 아니라고 하지 않았던가?

극 중에 잘 드러나진 않았지만 약하게나마 맥락 상 루스도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꽤 많이 가져다 쓴 듯하고 논란도 되었던 모양이다. 그때마다 루스가 이렇게 말했을지도 모른다. 이야기가 붙잡는데 안 쓰고 어떻게 배기겠어? 감정 같은 건 뒤로 생각하고 일단 쓰고 봐야지. 잘 봐, 이건 너의 이야기가 아니라 너의 이야기를 '모티브'로 쓴 이야기라고. 당신은 작가가 아니고, 글을 내지도 않을 것이니, 목소리가 있는 내가 쓰는 거라고. 그래서 같은 논리도 루스가 쓰지 못하는 단 한 가지 이야기를 쓰는 건 아닌가.

젊은 여성과 나이 많은 남성(일명 우디 앨런 케이스)이 만난 뉴스를 보고 분노하는 젊은 날의 리사에게 루스는 그런 가십에 뭘 그리 신경을 쓰냐고 했다. 에이, 둘 다 성인이고 여자가 진짜 사랑에 빠졌을 수도 있는데 남자에게만 뭐라 하지 말라고 말이다. 예술가면 작품으로 말하면 되지 사생활이 뭔 상관이야. 리사가 나이 많은 남성에게 농락당한 거라고, 근데 그게 우리 시대의 예술가이 우디 앨런이라니! 그러면서 씩씩거리는 동안에 말이다. 그랬던 루스는 자신이 일이 되니까 사람들이 다 자기를 수군거릴 거라며 가십을 걱정한다. 가십이야 끝도 없이 상상하고 뻗어갈 수도 있다. 루스는 그런 일에 분명 쿨하지 않았던가?

그러니 리사는 이번 사건을 포함해 이렇게 서운하고 속상해하고, 분노하는 루스가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다. 왜? 리사는 루소가 하던 대로, 그녀가 하라는 방식을 본받고 따르고 있기 때문에 전혀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녀에게 루스는 이상이었고, 스펀지처럼 흡수할 물방울이었고, 롤모델의 작가였다고도 생각한다.

그녀가 작가의 마인드로 결정을 내린 것이라면 모든 것이 이해가 간다. 루스와 틀어질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고도 그녀는 '루스의 그 이야기'를 갖고 싶었던 것이다. 이야기가 그녀를 잡았는지, 그녀가 이야기를 잡은 건지는 모르지만 그 이야기는 선생님과 딱 그녀만 아는 이야기니까. 당신과 나만 아는 이야기로 자신이 진짜 작가임을 보여주는 관문인 첫 장편소설에 쓰는 건 리사에게도 큰 결정이었을 것이다. 루스는 평생 단편소설을 쓰고도 장편을 쓸 생각은 없었지만 리사에게 장편이란 제대로 된, 완성된 등단이었다. 그만큼 루스를 소중히 여겼으니까 첫 장편소설로 썼을 수도 있다.





주인공들이 작가이고 2인극이여서인지 대화가 많았고, 관계가 어긋나는 미묘한 부분도 잘 드러났다. 김수현 드라마 작가처럼 대사가 많은 게 특징이지만 메세지는 한 발짝 생각을 거쳐야 다가왔고, 김은숙 드라마 작가처럼 핑퐁이 엄청난 느낌은 아니었다. 말을 잘 받아친다기보다는 자신의 입장을 펼치기 바빴고, 싸움으로 치면 크리티컬한 공격이 없었다. 감성은 충만하지만 설득적인 논리가 빠진 느낌이었다. 루스가 유리할 것이라 예상했지만 생각보다 분위기에 눌리는 느낌이라 놀랐고, 리사는 뚝심 있게 자신의 주장을 펼쳤지만 그 주장이 별로 와 닿지 않아서 루스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이 모든 건 균형 잡히게 루스와 리사 두 주인공에게 작가이자 친구(사람과 관계) 두 가지 면이 고르게 표현되지 못한 것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리사는 어리숙하다는 컨셉 치고는 그 시절 리사는 그때도 은근슬쩍 할 말 다하고 신념이 뚜렷한 캐릭터였다. 루스를 인간적으로 서운하게 했고 작가로서의 욕심이나 강단이 강조되었다.  루스는 카리스마 있고 날카로운 모습보다는 츤데레처럼 까칠하지만 알고 보면 착한 캐릭터였다. 리사와의 관계에선 그렇게 느껴지지만 막상 작가로서의 모습은 덜 드러났다.

만약 사람들이 나처럼 리사에게 잘 공감하지 못한다면 사람들이 작가로서의 고민보다 인간관계에 더 익숙하고 경험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리사가 이야기가 놓아주지 않는다고 이야기한다고 우리가 작가의 고뇌를 단숨에 이해할 수는 없다. 물론 루스가 이야기 뺏긴 걸로 인생을 훔쳤다며 화를 내는 것도 작가의 감성, 직업상 이야기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도 이해는 가지만 과하다 생각할 수도 있다.

그래도 루스에게는 안됐다고 상상할 여지가 많지만 리사의 2년 반의 인간적인 고뇌 같은 건 잘 드러나지 않았다. 그녀가 얼마나 루스를 아끼고 사랑하는지, 루스를 이해하지만 너무나 이 작품을 포기할 수 없어 쓸지 말지 얼마나 고민했는지, 하다 못해 말하려고 찾아왔다가 문 앞에서 매번 도망쳤다든지, 이런 모습이 드러났다면 리사의 입장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이 이야기를 단순화시켜서 사람과의 관계 vs. 커리어(작가)의 성공의 구도로 본다면 이 경우에는 그렇게 소중한 사람 사이의 관계를 버리고 커리어를 선택하는 건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둘 다 능력 있는 작가기 때문에 굳이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리사가 사람을 얻으면서도 성공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굳이 루스와 델모어의 이야기였어야만 했나, 첫 장편소설을, 그녀의 도움 없이 오히려 홀로 서는 게 더 멋지지 않았을까.

물론 뜨끔 하긴 했다. 내가 쓰는 글에 나만 있을 순 없다. 나는 이미 수많은 사람과 얽혀 있고, 내  글에도 다른 사람이 등장하기 마련이다. 갑자기 나는 리사의 입장이 된 듯 난처해졌다. 나도 저렇게까진 아니지만 내 글에 상대방 이야기를 쓴 게 있다. 글을 보고 그 사람이 루스처럼 화를 내면 어쩌지?

그래도 적어도 동의 없이 내진 않을 것이다. 상대방이 마음에 들어하지 않으면 아무리 아까워도 그 글은 뺄 테니 리사처럼 될 거란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리라 생각한다. 쓸 이야기가 없다고? 내가 살아온 모든 날, 그리고 앞으로의 모든 날이 이야깃거리일 텐데 그중 하나가 나를 붙잡아주겠지. 이 이야기를 쓰면 안 되는데 그래도 너무 쓰고 싶을 정도로 절박하다면 동의를 구할 때까지 설득하는 걸 멈추지 않겠다. 얼마가 걸리든. 작가가 누군가의 인생을 훔치는 도둑이라면, 그 정도 예의는 갖춰야 괜찮은 도둑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야기를 훔쳐서 쓰지 않고는 못 배기는 도둑이라니 참 신기하지 않나. 그게 누군가의, 혹은 당신의 친구라는 것도.





* 원제는 <Collected Stories>이다. 이야기를 모아서 자신의 것으로 발표하는 작가, 그 이야기의 원래 주인공이 자신의 이야기를 빼앗겼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단편소설집"보다 표현하고자 하는 바는 잘 드러나는데 번역하려니 좀 애매하다.

* 개인적으로 가장 소름 돋는 건 아무렇지 않게 넘어갔지만 리사가 어떻게 델모어와 루스 사이에 뭔가가 있었는지 알고 있었냐는 것이다.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게, 아무에게도 하지 않은 이야기를 그녀가 얻어냈냐는 것이다.




[장지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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