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나는 그 질문에 대답할 자격이 없었다 - 연극 "단편소설집"

부정할 수 없는 예술가의 욕망
글 입력 2019.05.15 1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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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단편소설집>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스승의 삶을 소설 소재로 쓴 제자와 그런 제자에게 분노한 스승의 이야기. 내가 이해한 수준도 딱 그만큼 간단했다. 리사의 행위도, 루스의 분노도 한 줄의 줄거리만큼 간단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극장에 도착하자마자 본 매표소에 붙은 종이로 알게 된 150분이라는 러닝타임은 전혀 간단하지 않았다.


오래 집중하는 것에 젬병인 내가 끝까지 잘 볼 수 있을까? 끝나는 순간만을 기다리게 되면 어쩌지? 2시간도 넘기지 않는 영화도 많은 이 시대에 이 연극은 무슨 할 말이 이렇게 많았던 걸까? 예상치 못한 러닝 타임과 마주한 나는 불안한 질문들을 가득 품은 채 연극을 보기 시작했다. 그러다 인터미션을 알리는 화면이 떠오른 순간, 내가 처음에 가졌던 질문에 대해 대답할 수 있었다. 나는 그들의 대화에 계속 집중할 수 있었고 연극의 시간은 예상보다 훨씬 빨리 지나갔으며 연극이 다루는 165분은 예술과 윤리의 딜레마를 다루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어쩌면 부족할 수도 있는 시간이었다.




스승과 제자, 루스와 리사



연극은 리사가 스승 루스의 집에 들어가는 것으로 시작해 그곳을 나오는 것으로 끝난다. 둘이 처음 만난 순간, 루스는 자신의 집에서 창밖을 향해 리사를 내려다보며 외치고 리사는 땅 위에서 아득히 루스를 올려다보며 소리친다. 너무 멀어서 크게 소리쳐야 겨우 소통할 수 있는 거리, 문학계의 거장과 평범한 대학원생인 루스와 리사의 관계는 딱 그만큼의 거리를 갖고 있었다.

 

리사는 가까스로 루스의 방에 발을 들여놓는다. 여유로운 루스와 달리 리사는 긴장 가득한 상태로 계속해서 실수만 저지르고 있다. 초반 어리바리한 리사의 모습은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과장되어 나타난다. 그래서 스승과 제자,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라는 처음부터 동등할 수 없는 관계가 더욱 더 동등하지 못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 사람은 변하고 관계도 변하게 마련이다. <단편소설집>은 연극이 태생적으로 가질 수밖에 없는 시공간의 제약이라는 한계를 영리하게 이용하여 시간과 관계의 변화를 효과적으로 나타낸다. 바로 인물의 차림새와 말투를 통해서 말이다. 초반, 앳돼 보이는 차림새를 하고서 스스로 멍청하다고 자책할 정도로 어리숙한 모습을 보였던 리사는 후반부에 다다를 때는 화려한 정장을 입고 차분하게 자신의 생각을 그대로 말한다. 루스 역시 마찬가지다. 초반부, 날카로운 말투로 리사에게 문학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거침없이 쏟아내던 사람은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흰 머리에 야윈 몸 상태로 절규하는 노인만이 남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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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은 모든 것을 최소화했다. 인물은 처음부터 끝까지 루스와 리사 두 명만 나오며 공간도 모두 루스의 집만 등장한다. 연극은 처음부터 끝까지 두 사람의 대화만으로 진행된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이 연극을 이끄는 동력은 두 인물의 대화, 그들의 관계가 된다. 그리고 연극은 그 동력을 한 번에 소진하지 않고 서서히 폭발시킴으로써 관객이 끝까지 집중하게 만든다.

 

루스는 일반적인 스승의 모습을 취하고 있다. 적당히 친절하고 적당히 권위적이다. 하지만 리사는 좀 다르다. 초반부의 그녀는 이해가 안 갈 정도로 과도하게 루스를 치켜세우고 자신을 깎아내린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이런 태도는 사라지고 리사는 점점 스승에게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우디 앨런과 순이 프레빈의 관계에 대해 벌이는 갑론을박은 리사의 변화를 가장 확실하게 보여주는 부분이다. 리사의 변화에 따라 그런 리사를 대하는 루스의 태도가 변하는 것도 흥미로운 지점이다. 점점 작가로서 성장하는 리사에게 루스는 이제 우린 동료작가 사이라고 말한다. 일방적으로 가르침을 전달하던 루스는 리사에게 자신의 신작을 보여주며 평가를 바라게 된다.

 

제자가 성장함에 따라 사제 관계가 동등해지는 모습, 언뜻 보면 굉장히 이상적이다. 하지만 둘의 대화는 매끄러운 것 같으면서도 계속 미끄러진다. 리사와 루스의 대화는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진심은 빼고 드러낼 수 있는 부분만 드러내는 느낌을 준다. 리사는 스승의 그림자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소설을 완성하고자 하는 욕망을, 루스는 제자에서 젊은 동료 작가로 변한 리사에 대한 경계심을 철저히 숨긴 채 서로를 대한다. 그리고 그들이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숨겨왔던 그 진심은 마지막 부분에서 폭발하고 만다.

 

그 폭발은 수직적이었던 사제관계의 붕괴를 나타내고 그 붕괴는 곧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의 충돌을 나타낸다. 리사는 루스의 말에 반박할 때 자신은 가르침 받은 대로 했을 뿐이라고 한다. 리사에게 스승의 존재란 필요한 것을 가르쳐주는 것일 뿐, 자신의 선택에 영향을 미치는 존재는 아니었던 것이다. 리사의 그러한 태도는 가르침이라는 이름으로 권위를 행사하던 기성세대의 모습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이다.




예술과 도덕의 딜레마



이 연극의 가장 큰 사건이자 둘의 관계가 파국을 맞이하는 계기는 바로 리사가 루스의 사생활을 소설 소재로 활용한 일이다. 처음 줄거리를 들을 땐 당연히 리사가 잘못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허락도 한 적 없는 사생활이 만천하에 알려지는데 어느 누가 분노하지 않겠는가. 자신에게 의논이라도 했더라면 관계가 이렇게 되진 않았을 것이라고 말하는 루스의 분노는 모두가 납득할 수 있을 만큼 상식적이다. 그런데 대체 왜 나는 연극이 끝을 향해 달려가면 달려갈수록 그렇게 루스를 절규하게 만든 리사가 공감되는 것일까?

 

사람은 저마다의 이야기를 갖고 있다. 그리고 작가는 그 개개인이 가진 이야기를 재료 삼아 자신의 작품을 창작한다. 가장 편한 방법은 자신의 이야기를 활용하는 것이다. 이야기의 소유자가 곧 자기 자신이기 때문에 허락을 구할 필요도 없고 직접 경험했기 때문에 따로 취재가 필요하지도 않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한 사람이 가질 수 있는 이야기의 수가 제한적이라는 것이다. 예술가에게 가장 큰 고통은 소재의 고갈이다. 그 상황에서 바로 흥미로운 소재의 이야기가 있다면 어떤 마음이 들까? 윤리적으로 옳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쓰고 싶다는 욕망을 멈출 수 없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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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럽게 고백하지만 사실 나도 작가가 되고 싶다는 꿈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몇 편의 단편소설을 써본 적이 있다. 그 몇 번의 경험을 통해 이야기를 창작한다는 건 역시 쉽지 않은 일이라는 걸 뼈저리게 실감했었다. 그래서 자신의 밑바닥까지 다 긁어모아서 소설을 완성했다는, 이제 자기의 이야기는 다 썼는데 앞으로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하는 리사에게서 나의 모습이 보였다.

 

훌륭한 작품을 완성하고 싶다는 욕망과 그것을 실현할 영감의 부재에서 오는 괴리감은 많은 예술가를 괴롭게 만든다. 나 역시 떠오르지 않는 소재와 부족한 재능을 탓하며 괴로운 시간을 보냈었다. 그럴 때 내 지인으로부터 흥미로운 소재거리를 들으면 마치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 사람이 물을 마시는 것처럼 신나게 이야기를 상상했었다. 그렇게 상상하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 사람의 일을 이렇게 허락 없이 함부로 이용해도 되나? 허락을 구해야 하나? 그러나 그런 생각은 창작에 대한 나의 욕망을 멈추기엔 역부족이었다. 나의 알량한 양심은 ‘어차피 사람들은 이 이야기를 모두 허구라고 생각할 테니까 괜찮겠지‘라는 마음 속 속삭임에 손쉽게 무너졌다.

 

그렇기 때문에 난 리사를 비난할 수 없었다. 소설을 쓰는 2년 반 동안 눈도 마주치지 못할 만큼 리사는 자신이 저지르는 짓이 잘못된 것을 알고 그것을 부끄러워했다. 루스의 말대로 미리 의논이라도 했으면 리사의 마음은 편해졌을 것이다. 하지만 쓰지 말라고 한다면? 그렇게 되면 시도조차 할 수 없게 될 텐데. 루스가 계속해서 쏟아내는 분노의 말들은 모두 맞는 말이었다. 그럼에도 그 말에 자꾸 반발심이 들었고 마음속으로 리사를 옹호했다.

 

리사에겐 두 가지 정체성이 있다. 제자 리사와 작가 리사. 제자의 정체성은 현실이며 작가의 정체성은 이상이다. 물론 제자로서의 윤리를 지키면서도 작가의 길을 걸을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걷게 되는 작가의 길은 리사의 예술적 욕망을 완벽하게 충족시킬 수 없었다.

 

예술과 윤리의 딜레마에서 우리는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가? 루스의 말이 맞는가, 리사의 말이 맞는가? 연극은 관객들에게 끊임없이 그러한 질문을 던졌지만 나는 그 질문에 대답할 자격이 없었다.




여성 2인극이 갖는 의미


 

문화예술계에서 ‘여성 서사’의 중요성이 날로 커져가는 요즘, 오로지 여성 두 명만으로 극이 진행되는 <단편소설집>은 큰 의미를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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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에서 소비되는 여성의 모습에 대한 담론이 활발하게 진행되면서 기존 예술작품들이 범한 여성혐오적인 잘못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여성의 존재를 지우거나, 수동적인 인물로 전락시키거나, 성적으로 대상화하거나. 이 연극은 그 잘못들에서 모두 완벽하게 빗겨나간다. 연극 속 두 여성, 루스와 리사는 남성에 의해 좌지우지 되지도 않고, 성적으로 소비되지도 않으며 자신만의 확고한 욕망도 지니고 있다.


우리는 모두 사람이 얼마나 복잡한 동물인지, 그 사람들끼리 맺는 관계 역시 얼마나 복잡한지 알고 있다. 그럼에도 기존 여러 작품들이 다뤄왔던 여성의 모습은 전형적인 틀을 갖고 있었다. 전형적인 여성의 모습은 곧 전형적인 여성간의 관계로 이어졌다. 친구 관계이거나 모녀 관계이거나 앙숙 관계이거나. 이 세 가지에서 벗어난 작품은 거의 없었다. 그런 작품들 사이에서 이 연극은 오로지 두 명의 여성만으로 그 복잡한 인간성과 관계를 탁월하게 나타내고 있다.

 

여성이 주인공인 작품은 인기가 없다는 잘못된 생각으로 투자도 제대로 받지 못해 빛을 제대로 발하지 못한 작품들이 많다. 그 잘못된 생각에 대해 연극 <단편소설집>은 여성 두 명만으로 이렇게 뛰어난 작품을 만들 수 있다고 당당하게 대답하고 있다.

 

이 연극을 보기 전, 나는 모녀관계가 아닌 두 명의 여성이 예술과 도덕의 딜레마를 다루는 것만으로도 볼 가치가 충분하다고 생각했었다. 연극을 보고난 후 이 글을 쓰면서 나의 그런 생각이 틀리지 않았음을 기분 좋게 확인했다.



[진금미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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