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그럼에도 변화는 계속될 것이다 - 환희, 물집, 화상

글 입력 2019.05.13 0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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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본 글은 연극을 관람한 관객들을 대상으로 함을 미리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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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담


*사담이 부담스럽다면 건너뛰어도 무방합니다.

소수자의 의견을 지지한다는 것은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분위기 일 때 더욱 특정 의견을 지지하는 ‘나’를 전면에 드러내는 것은 쉽지 않다. 그렇기에 많은 경우 소극적인 태도로 임하기를 선택한다.

‘하지만 그 문제의 당사자가 자신이라면?’

이제껏 거리를 두어 온 사회적 문제의 중심에 내가 있다. 그것을 직시하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다. 가볍게 무시하는 선택을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만 선택을 유예한다면 나의 일상에 문제가 될 것은 없다. 권위적인 선례를 가져올 수 없는 문제에 오로지 개인적인 옳음의 감각을 통해 의견을 표명한다. 그로 인해 모든 것의 방향이 바뀔 수 있다. 두려움은 모든 신경을 곤두세운다.

어떤 사회적 권위도 없는 내가 감히 의견을 표현해도 되는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생긴다. 나에게 논리적 근거와 자격을 물을 사회적 시선이 두렵다. 페미니스트라는 선언은 보류한다. 페미니즘에 대해 알아보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나의 의견이 선입견에 가려져 이해 이전에 단순히 배척당하지 않길 바란다.

페미니즘은 그 자체로 부담스러운 단어이다. 마치 색깔이 칠해진 듯 온갖 프레임들이 뒤덮여 말을 꺼내는 순간 주변 시선의 변화를 느낄 수 있다. 자연스럽고 동등한 의견 교환 주체로서의 대화는 가능한 것 인가. 상대가 먼저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 이상 언급하기 쉽지 않은 주제이다. 그만큼 나는 겁쟁이이기도 하다.

페미니즘 연극을 보러 간다는 것 자체가 내게 큰 도전이었다. 이에 대해 실명을 걸고 글을 쓴다는 것 또한 큰 용기를 필요로 했다. 불특정 다수에게 나는 모르는 사람이지만, 글을 쓰는 것을 아는 지인들에겐 페미니즘에 대한 공개적인 의견 표명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글을 잘 써야 한다는 부담감도 못지않게 컸다. 나 하나로 인해 페미니즘의 시각 전체가 왜곡되는 불상사는 피하고 싶었다. 안타깝게도 ‘참 소질 없는 페미니스트들이야’라는 대사 한 소절이 일상적 삶을 사는 나에겐 실제적인 위안이 되긴 어려웠다.

그럼에도 연극 '환희, 물집, 화상’은 완벽하지 않아도 변화해나가는 행동 자체를 긍정해도 된다는 용기를 주었다. 또한 페미니즘이 큰 부담을 갖고 접근할 일이 아니라는 것과 일상적이고 가까운 고민들에 대한 것임을 상기시켜 주었다.



개괄

 
연극의 모든 부분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연극의 서사와 더불어 페미니즘이라는 주제에 대해 진지하게 접근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강의도 쉽고 재미있었으며, 캐릭터들 간의 대화도 의미를 담은 부분이 많기에 두 장 정도로 예상했던 필기 노트는 어느새 노트의 절반을 채워갔다. 노트가 얇고 내 글씨가 큰 탓도 있다. 아쉽지만 이 글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한 모든 것을 다룰 수 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몇 가지 주요 포인트를 기준으로 리뷰를 진행할 예정이다. 따라서 자세한 인물 관계와 줄거리 설명은 없다. 리뷰의 목적은 개인적인 감상 정리와 더불어 연극을 관람한 청중들과의 의견 소통의 장을 열어놓는 것에 있다.

리뷰에서 다룰 포인트는 일단 연극의 큰 축을 담당했던 '남편 양도'라는 주제이다. 이어서 인상 깊게 본 캐서린, 던의 캐릭터에서 파생되는 주제를 다룰 것이다. 강연에서 등장한 슬래셔 무비에 대한 흥미로운 시각과 연극을 함께 관람한 친구의 시선도 살짝 공유할 예정이다. 연극의 의미를 되새기며 글을 마무리할 계획이다.



양도, 사실 그다지 파격적이지 않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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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서린과 그웬 사이의 남편 양도는 생각보다 손쉽게 이루어졌다. 가장 기대했던 ‘남편 양도’라는 해결책에 대한 충격이 깨진 것은 캐서린이 사실 그웬의 남편인 던의 전 애인이었던 것을 알게 되었을 때이다. 연극은 그웬과 던의 정원에서 시작된다. 그웬이 자신의 집에 캐서린을 초청한다. 캐서린과 던의 미묘한 감정이 느껴지던 대화는 사실 그 둘이 연인이었다는 것을 암시했고, 이별은 외부적 상황에 의한 것이었다. 그렇기에 서로에 대한 아쉬움이 설득력 있게 느껴졌다. 둘은 잦은 만남을 갖다가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그웬 몰래 잠자리까지 갖는다.

한국적 정서에 익숙한 나는 그웬이 어떻게 남편의 전 애인인 캐서린을 초청하고 둘의 연애 사실을 공개적으로 대화 주제로 삼을 수 있는지 의문이었다. 양도보다 충격적이었던 건 캐서린과 던이 외도에 대한 큰 죄의식 없이 서로를 원한다는 것이었다. 그웬이 던의 외도를 알게 된 이후의 대처도 낯설다. 오히려 던은 당당하며, 캐서린은 양도에 대한 사안을 언급하며 적극적으로 그웬을 설득하는 태도를 보인다. 세상에 다양한 관계의 형태가 있듯 어디선가는 남편 양도가 실제로 벌어지고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양도의 계기는 대척점의 삶을 사는 두 여성의 서로에 대한 동경이다. 캐서린은 가정을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한 외로움과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으며, 그웬은 반복하여 자신의 못다 이룬 학업에 대한 미련을 표현한다. 그들은 양도를 통해 동경하던 삶에 대한 미련을 해소하길 기대한다.

예상과는 다르게 양도에서 만족을 얻을 수 있는 이는 캐서린뿐이었다. 그웬은 얼마 가지 않아 중단했던 학업을 이어가는 것이 쉽지 않음을 깨닫고 가정 주부의 역할로 되돌아오고자 한다. 양도를 통해 캐서린은 가치관의 변화를 겪으며 쉽게 적응하지만, 그웬은 그렇지 못했다.

남편 양도는 결국 캐서린과 그웬의 미련을 해소시켜주는 역할에 그친다. 양도의 과정에서 캐서린은 사랑의 실패에서 쉽게 빠져나오지 못하며 극 초반에 보여줬던 독립적이고 성공한 사회인으로서의 모습들을 상실한다. 그웬은 결혼 이후의 주부가 학업을 이어나가기란 쉽지 않음을 보여준다. 어째서 둘 다 만족할 수 없었을 지에 대한 나의 의문에 대해 함께 극을 관람한 친구가 신선한 의견을 냈다. 관객에게 정체성 규명을 요구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이 연극에 분명한 방향성은 존재했다는 점이다. 커리어를 쌓은 후에 가정을 이루는 것은 가능할 수도 있지만, 커리어를 포기하고 가정을 이룬 후에 다시 커리어를 쌓아나가기란 쉽지 않다는 것이 요지다.



캐서린, 결국 성공한 여성의 모습이란 남성성의 재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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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서린은 이른바 커리어 우먼으로 성공적인 성과를 낸 유명 학자이다. 가정을 이루는 것보다 자기실현을 큰 목표로 갖는 나에게 가장 동일시하고 싶은 캐릭터이기도 했다. 기대가 컸지만 그만큼 실망도 컸다. 캐서린이 대변하는 상황은 대부분의 20~30대가 지향하는 삶이기도 할 것이다.

캐서린은 극 초반에는 마치 보통의 성공한 여성들의 모습에서 볼 수 있는 강하고, 단단한 모습을 보여준다. 차분한 정장을 입고 감정을 절제하는 듯한 말투와 사소한 몸짓들은 기존의 여성적 모델보다 남성적 모델을 떠올리게 했다. 그러나 이러한 모습에도 유명 티비 프로와 절친했던 던으로부터의 성적 대상화는 피할 수 없다. 캐서린은 이런저런 차별적 발언들로부터 거리를 두고 중심을 잘 지키는 모습을 보인다.

캐서린의 강의는 학생들의 발표와 토론을 통해 이루어지는데 실상 이론으로 시작한 논의는 각 개인의 삶으로 뻗어나간다. 캐서린의 삶에 가까운 주제는 희생의 문제였다. 슐래플리에 따르면 남성은 리드하고 여성은 따른다. 캐서린은 이에 대해 비슷한 커리어를 가진 두 남녀에게 있어 가정을 이룰 때 누가 희생을 하게 되는가의 문제에 집중한다. 구체적으로 이 문제는 희생이 누구의 몫으로 당연하게 설정되어 있는가의 논의이다. 캐서린과 던의 이별도 서로의 일에 대한 희생이 없었기에 발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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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서린과 던이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후에는 캐서린이 본격적으로 사랑에 빠진다. 가장 먼저 표정과 말투가 변하고, 몸짓이 변한다. 사고방식조차도 단번에 변해버린다. 이 모습에 대해 친구와 나는 캐서린의 극 초반의 모습은 사회적 산물인지에 대해 의문이 들었다. 만약 캐서린의 모습이 남성 중심 사회의 권력 구조에 편입하기 위해 지어낸 모습이었다면, 사랑에 빠진 이후의 모습은 캐서린의 진정한 여성성을 남성을 통해 실현하게 된 결과라는 서사적 한계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

만약 극 초반의 모습과 변한 모습 모두가 캐서린의 것이라면 캐서린의 방식은 너무 큰 도약이 있어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생각이 들었다. 초반의 모습을 사랑에 빠진 이후에도 유지했다면 캐서린의 초반 모습이 남성성을 재현한 것이 아닌 캐서린만의 방식이었다고 느꼈을 것이다. 새로운 유형의 여성을 제시하기보다 남성성을 재현하는 것에 머무르는 듯한 캐릭터라는 것이 참 아쉬웠다.

던의 다소 식은 애정에 캐서린은 방법을 찾기 위해 노력한다. 에이버리는 캐서린에게 루소의 이론을 활용하여 남자 친구의 관심을 되찾았다는 경험담을 공유한다. '남성은 여성의 연약한 모습을 보고 돌봐주는 데서 허영심을 충족하고, 여성은 나약한 모습을 보임으로써 남성의 관심과 도움을 얻는다'는 것이다. 캐서린은 던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고 던의 자신감을 심어주기 위해 노력한다. 그로써 던의 관심을 얻어내려 한다.
  
캐서린의 눈물겨운 사랑에 대한 사투엔 외로움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다.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았지만 가정을 이루지 못했기에 혼자가 되는 것에 대한 불안이다. 어머니가 아니면 누가 자신의 걱정을 해줄까 하는 사소하고 일상적인 감정이다. 이는 가정 대신 커리어를 생각하는 여성들에게도 머지않은 두려움이라 생각한다. 캐서린은 결국 던의 사랑을 유지시키지는 못하지만 에이버리와 동거하는 대안 가족의 형태로 외로움을 극복하려 한다.

4인 가족 형태의 신화가 무너지면서 사람들은 다양한 대안 가족 형태를 모색하기 시작했다. 기존의 남성의 관심을 얻어야만 여성으로서 사회적 자격을 얻는다는 문화를 극복해낸 것은 훌륭한 일이지만, 한계는 있다. 친구는 이에 대해 어떤 식으로라도 가족의 형태를 찾으려 하는 방식은 캐서린의 불안감과 외로움을 온전히 극복하지 못했다는 점을 지적한다.



던, 자기 변화의 계기는 여성이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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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은 포스트 모더니즘에 대한 학문적 열망은 뒤로 한 채 돈을 더 벌 수 있는 의미 없는 일을 하며 살아간다. 던의 특징은 대마초, 자위, 포르노이다. 극에서 던의 행동은 다음과 같이 표현된다. '던이 대마초를 한다’, ‘던이 자위를 한다’, ‘던이 포르노를 한다’. 여기서 위화감이 느껴지는 부분이 등장한다. 포르노를 한다라는 표현은 당시 포르노가 흔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포르노를 모든 남성이 본다는 것이 기정사실화 된 현대와 반대되는 문화가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이는 사실 포르노라는 것이 본능이 아닌 문화적 현상일 수 있음을 암시한다.

포르노를 자주 접하는 이들이 쉽게 빠질 수 있는 위험한 착각은 여성이 강간을 좋아할 것이란 생각이다. 캐서린은 이에 대해 여성들에게 있어 강간 판타지란 섹스에 있어 책임감을 덜고 즐기고 싶다는 의미이지 강간을 당하고 싶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것을 관객에게 분명하게 전달한다.

극 중에서 타인을 변화의 계기로 표현하고 요구하는 것은 던뿐이다. 캐서린의 변화 계기가 던일 수 있지만 캐서린은 이를 인과관계적으로 표현하지 않는다. 단지 사랑에 빠졌다고 말한다. 그웬은 던을 통해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지 않는다. 독립적으로 양도를 받아들이며 자신의 학업을 이루기 위한 선택을 한다. 그것에 문제를 느끼고 돌아오는 것 또한 그웬의 선택이다.

그러나 던은 문화적 믿음과 더불어 스스로도 변화의 계기를 여성에 두고 있다. 캐서린을 만났을 때는 학문에 대한 열정이 있었지만, 헤어지고 나니 사그라들었다고 말한다. 그웬과 함께 했기에 반복적인 일상을 살 수 있었지만 답답하다고 하며, 캐서린과 함께 하며 열정을 다시금 되살리고 싶다고 한다. 또 얼마 가지 않아 캐서린의 열정은 과하며 다시 안정된 삶을 살고 싶기 때문에 그웬에게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한다.

문화적 믿음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앨리스이다. 앨리스는 던이 캐서린을 만났다면 지금과 같은 모습이 아닐 것이라고 말한다. 앨리스의 대사를 통해 부인에 따라 남편의 행실과 성패가 달라진다는 믿음이 팽배한 시대를 지나왔음을 다시금 되새긴다.

던의 태도는 변화의 계기를 외부에 두고 있다는 점에서 수동성을 띠지만, 변화의 도구로서 여성을 이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문화적 우위성을 내포하기도 한다. 성공한 사회인으로서 캐서린의 주체성과 능력은 여성이라는 이유로 던의 자신감과 열정을 되살려줄 도구로 전락한다.



슬래셔 무비, 마지막 여성의 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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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러 영화는 그 세대의 불안감을 반영한다. 강의에서는 ‘집단적 악몽’이라는 표현을 쓴다. 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SF영화가 쏟아져 나왔고, 이는 과학 발전에 대한 공포에 의한 것이었다. 베트남 전쟁 이후에는 재난 영화가 주를 이뤘다. 징병을 통해 가게 된 베트남 전을 겪으며 사람들은 평범한 사람도 얼마든지 재난에 해당하는 일을 겪을 수 있다는 정서를 공유한다.

베트남 전이 끝나고 군인들이 복귀할 때 낙태죄가 폐지되었다. 그즈음 1977년도에는 특별히 'Slasher Movie'라는 장르가 흥행했는데, 이 장르의 특징은 닥치는 대로 죽인다는 것이다. 또 다른 특징은 살해되는 대상은 주로 여성들이라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일하는 여성, 원나잇 하는 여성 등 그동안 불문율처럼 이어진 문화를 깨버리는 행태의 여성들이 그 대상이 된다. 극에서는 이에 대해 변하는 여성상에 대한 문화적 불안감의 표출이라고 해석한다.

여성이 살해되는 대상이자 소비되는 자로써 등장하는 슬래셔 무비에 대한 비판은 계속되어 왔다. 하지만 극 후반에 가서 등장인물들은 다른 해석을 내놓는다. 사실 슬래셔 무비는 페미니즘적인 영화라는 것이다. 여성이 처음으로 영화의 마지막까지 등장하게 되었으며, 남성의 구원 서사 또한 없다. 이는 결국 새로운 여성을 발명해낸 것이며 남성 중심적인 문화의 장막을 한 층 벗겨낸 것에 해당한다.

또한 이들은 몸을 헤프게 쓰는 여성의 대가는 남성에게 선택받지 않게 되는 것이라는 슐래플리의 말을 또 한 번 뒤집는다. 남성의 부재는 결국 여성의 자유를 뜻한다는 것이다. 더 이상 남성에게 선택당하기를 고대하기보다 자신이 주체로서 영화를 마지막까지 이끌어 갈 것임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변화는 계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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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서사를 통해 다양한 여성의 삶의 모습을 볼 수 있다는 점, 여성으로서 주변 사람들과 공유했던 정서를 연극을 통해 객관화하여 볼 수 있다는 것은 큰 선물이었다.

샴페인을 부딪히고 밝은 미래를 그리며 마무리하는 결말은 아쉬웠다. 다짐만으로는 해결되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우리의 결말은 위 장면처럼 캐서린의 강의를 찾아오는 여성들 간의 연대에 있지 않을까 싶다. 갖가지 충돌에도 포기하지 않고 시도하는 변화의 모습 말이다.

연극을 통해 엿볼 수 있는 시도는 다음과 같다; 서로 다른 세대와 다른 삶의 사람들이 편견을 내려놓고 열린 마음으로 이야기를 공유하는 것, 더 나은 삶의 방식에 대해 토론해나가는 것, 기존의 남성적, 가부장적 문화에서 벗어나 여성들이 하나의 주체로서 사회의 기준을 새로 정의해 나가는 것, 현재의 모습을 냉철하게 인식하고, 불편함을 받아들여 일상의 사소한 행동들부터 변화시켜 나가는 것.

한계가 있기 때문에 논의를 중단할 필요는 없다. 한계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시도를 했기 때문이고, 그렇기에 우리에겐 발전의 여지가 있다. 즉, 페미니즘은 완벽한 해답을 내놓는 것이 아닌 그동안 인식의 대상이 되지 못했던 것들이 발언권을 확보할 수 있도록 하는 움직임이다. 발언권의 장 안에서 변화는 새로 시작될 동력을 갖는다. 우리는 이론과 현실의 간극에서 방황하지만 그것이 이상한 것이 아님을 밝힌다. 방황할 수 있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주어지지 않는 특권이다. 행동의 자유를 허용한다는 것이며, 그 책임의 주체는 자기 자신이라는 뜻이 내포된다. 우리는 방황을 통해 기꺼이 새로운 삶의 방식을 그려나갈 수 있다.

이 길고 긴 글의 출발점은 바로 이 연극이었다. 아무리 결말이 아쉽다고 해도, 시도는 시도 자체로서 의미가 있다. 이를 통해 새로운 성찰과 사유의 계기를 가질 수 있었다. 변화를 위한 과정에서 수많은 충돌과 좌절이 있을 수 있지만, 변화의 핵심은 방황이기에 우리들의 여정을 마음 깊이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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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혜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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