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세상의 모든 롤라들이여 - 꼬리박각시 [도서]

그녀들의 결핍을 위로하라.
글 입력 2019.05.08 0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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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 들었어요? 롤라 있잖아요.

파리에 사는 롤라 말이에요.

그 여자가 이웃집 남자를 죽였다지 뭐예요.

실은 둘이 연인관계였다죠?

참 안타깝네요.


누구긴요. 그녀요.






소설의 주인공 롤라는 결핍 덩어리다. 유년 시절 교통사고로 잃은 엄마, 아내를 잃은 아빠의 알코올중독, 스무살 언저리에 떠난 사랑까지. 떠나간 이들의 흔적이 그녀의 삶 깊숙이 들어와 괴롭힌다. 주말마다 찾아오는 밤은 그녀의 결핍을 채우는 시간. 그녀는 파리의 길거리로 나가 결핍을 채울 누군가를 찾는다. 짙은 화장을 한 채 아슬아슬한 짧은 원피스 차림으로 길거리에 나서면 파리의 밤을 즐기는 방랑자들은 은근슬쩍 그녀를 훑어보며 간을 본다.


거리에서 가장 아름답고 섹시한 롤라에게 호감을 느낀 눈들은 금세 들끓는다. 당연히 사랑은 아니다. 모두가 탐내는 색정적인 롤라를 누가 차지하나, 단지 그뿐. 담배를 삐딱하게 문 남자들이 수컷의 냄새를 한껏 풍기며 경쟁하는 일종의 게임이랄까. 그렇게 그녀의 옆구리를 차지한 남자는 이 밤의 승리자라도 된 양 으스댄다. 바로 자신이 그녀를 소유했다고.


그러나 롤라는 누구에게도 소유되지 않았다. 그녀는 단지 하룻밤을 달랠 무언가가 필요했던 것이다. 함께 밤을 보낼 누군가가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잘생기든 배가 나왔든 그딴건 고려하지 않는다. 가끔은 당장 육체를 비빌 온기가 있는 숨 쉬는 남자면 되었다.


(책 속의) 남자들은 위선적이다. 그녀를 가지고 싶어서 안달이 났지만, 그 욕망을 도무지 인정하지 않으니. 그들은 그녀가 누군가에게, 특히 남자들의 성적 대상이 되는 것을 열망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자신이 친히 그녀를 가져주는 것이고 그게 그녀를 위한 일이라고 말한다. 치명적인 외모의 롤라가 유혹해오는 것을 거절하지 못한 남자들은 한두 번씩 그녀와 관계를 가지지만, 곧 그녀를 온전히 소유하지 못하는 것에 불만을 품는다. 그녀는 남자들에게 둘러싸이고 싶어 해. 롤라는 원래 돈을 좋아하고 문란한 여자야. 그녀는 섹스를 사랑해. 그년 섹스에 미쳤어. 그 X는 남자를 좋아해. 의식은 이렇게 흐르다가 마침내 분노로 탈바꿈할 것이다. 마치 롤라가 자신을 배신이라도 한 듯.


격렬한 섹스 후에 이어지는 행위는 남자의 손톱을 자르는 것. 그 후엔 기다렸단 듯이 자리를 떠버리는 롤라는 기약이 없다. 또다시 저를 찾아줄 거란 보장도 없는데 파리의 거리에서 다른 남자와 팔짱을 끼고 걸어가는 롤라의 모습은 이성을 마비시킨다. ‘왜 나는 안되는 걸까’에서 ‘저 나쁜 X’는 영원히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가두어 놓아야 한다고 생각이 변한다. 그들의 욕망은 롤라를 ‘쉬운 여자’로 바라보는 그들의 이성만큼이나 단면적이고 편협하다.


그들은 하나같이 단순하고 본능적이며 쉽게 빠지고 더 쉽게 질려 한다. 복잡하고 우울하고 생각이 많아 줄곧 잡다한 기억 속에서 빠져 사는 롤라와 대조된다. 롤라는 강렬하고 즉흥적이지만 동시에 냉소적이고 이성적이다. 몸의 쾌락을 찾아 남자들을 물색하고 다녀도 결코 그들을 사랑하진 않는다. 몸과 마음의 분리가 뚜렷해서다. 그녀에게 섹스는 딱 그 정도 수단이다. 미처 채우지 못하고 빈 애정의 난 자리와 기억들을 잠시나마 잊게 해주는 망각의 놀이. '망각'. 잊고 싶은 기억들은 섹스를 할 땐 생각나지 않는다. 그래서 그녀는 계속 누군가의 몸을 찾는다. 뜨끈한 체온이 몸에 닿으면 자신이 살아있다는 걸 느낀다. 본능에 이성을 내던질 때 그녀는 비로소 잊는다. 그녀의 머릿속을 헤집는 고약한 기억들을 내쫓는 순간이다.


광적일 정도로 집착하는 손톱은 그녀의 결핍을 대신한다. 그 손톱이 차곡차곡 쌓여 서로 부딪히는 소리가 둔탁해지면 질수록 그렇다. 상대방의 잘린 손톱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그녀가 직접 손톱을 자른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다. 비록 손톱 따위지만 그녀에게 상대방의 신체를 좌우할 결정권이 있다는 것이 그것이요, 훼손된 신체의 일부를 가지는 소유권까지 있단 것도 중요하다. 롤라에겐 살아있는 동안 자신의 것이라고 여겨질 무언가가 없었다. 그녀는 너무 일찍 엄마를 잃었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다. 그녀로서는 같이 잔 남자의 손톱들만이 유일한 그녀의 것이었다. 그러나 결국 손톱이 든 유리병까지 잃어버렸다. 그리고 더 이상 방랑자처럼 섹스를 위해 떠도는 일요일을 청산시킨 이웃집 남자의 마음도 떠났다. 그녀의 아비도 죽었다.


그녀는 사랑을 두려워한다. 언제나 떠날 준비를 하는 사람처럼 군다. 결코 떠날 수 없음을 알면서도. 막상 떠나고자 하면 원인 모를 두려움이 닥치면서. 떠나는 순간에도 도망치려고 하면서도 그런다. 연인이 된 이웃집 남자로 인해 그녀의 삶이 조금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는가 했더니 그 마저도 시간의 권태로움을 이기지 못하고 시들어갔다. 또다시 떠날 준비를 하는 롤라의 남자. 그녀는 제가 떠나지 못하는 것처럼 제 사랑도 다신 떠나지 않기를 바란다. 끝내 솔직한 마음을 털어놓지 못하고 여전히 제멋대로 상상한다. 그녀의 상상 속에서 연인은 그녀를 배신했다. 그녀는 더는 등 돌린 뒷모습을 참지 못하겠다. 상상에 분노가 끼어들면 상상으로 끝나지 않는 법. 그녀의 망상은 결국 남자의 심장을 찌르는 것으로 끝난다. 롤라는 마지막까지 상대의 육체에서 답을 얻고자 했다.


나는 롤라가 불쌍하다. 그녀의 상처가 안쓰럽고 그녀의 결핍이 애잔하다. 어딘가 비어버린 존재의 비참한 말로를 엿본 것 같아 연민을 느낀다. 밝은 빛이 있다면 그곳이 불구덩이라도 돌진하는 나방처럼, 그녀는 무엇을 찾아 그리도 뛰어들었나. 망각은 인간에게 주어진 축복이라는데 그녀는 왜 그러지 못했나. 비록 그녀만큼은 아니더라도, 내게도 감정의 난 자리가 있어 더 그렇다. 그러다 결핍과 번민에 고통받는 존재가 비단 롤라뿐일까- 하고 생각해본다.


내 마음의 상태도 들여다보기 힘든 시대를 사는 우리도 사실은 제 2의 롤라인 것 같다. 우리는 결핍을 견디지 못하고 거리를 방황한 롤라처럼 이 땅 어딘가를 방랑하고 있진 않나. 빈 곳을 채워줄 무엇을 찾아, 잊기 위해 발버둥치며. 나는 책의 마지막 장을 넘기며 세상의 모든 롤라들을 위로한다.



[장재이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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