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내 머릿속의 계산기 [기타]

계산기는 해가 갈수록 더욱 정확하고 치밀해졌다.
글 입력 2019.05.07 2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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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계산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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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부터 내 머릿속에 계산기 하나가 콕 박혀 있는 느낌이 들었다. 이는 한 달간의 생활비가 모자라지 않게, 어느 날 카드를 긁었을 때 돈이 없어서 당황하지 않게 만들었다. 나의 계산기는 해가 갈수록 더욱 정확하고 치밀해졌다. 스무 살, 세상 물정 모르고 매일 배달음식 값을 냈던 것에 비하면 현재는 ‘쓸데없는 지출은 삼가자’라는 철학으로 매일 알뜰살뜰하게 살고 있다.

알뜰살뜰한 삶은 굉장한 보람을 안겨 준다. 배고픈 나머지 주문해버린 떡볶이를 보고 후회의 한숨을 쉬지 않게 해주며, 옷장 안에 더 옷을 넣을 공간이 없다는 걱정을 하지 않게 해준다. 더불어 집에서 재료비 0원의 요리 비법도 얻을 수 있었다. 결국 이러한 삶은 전부 다 계산기 덕분이었다.

그런데, 문득 궁금했다. 내 머릿속의 계산기는 언제부터 생긴 것이며, 언제부터 내 전부를 점령해버렸을까. 그리고 분명 보람 있는 삶을 안겨준 계산기인데, 왜 계산기가 무서워졌을까. 그렇다. 나는 계산기가 무서웠다. 계산기는 알게 모르게, 나를 작고 소심한 사람으로 만들었다. 또한 계산기가 정확하고 치밀해질수록 계산기는 더욱 작은 단위의 입력을 요구했다. 그래서 겨우 5,000원짜리 감기약을 사는 것도, 퇴근하고 사 먹는 커피 한 잔의 여유도 움츠리게 했다.

사실 계산기와 나의 인연이 언제부터인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어릴 적 우리 집이 남들보다 작다는 것을 눈치챈 후 내가 돈을 함부로 쓰면 안 되는 사람이었음을, 나는 앞으로 악착같이 돈을 벌어야 하는 사람임을 깨달은 것은 기억난다. 그 이후부터였을까. 매달 지불되는 급식비가, 어느 해 봄날 공지된 수학여행비가 부담스러워진 것이.

다행히도 우리 집의 사정은 나날이 좋아졌으며, 이제는 남들이 사는 집과 비교해 부끄럽지 않을 만큼 넓은 집으로 이사를 했다. 하지만 그런데도 내 머릿속의 계산기는 떠나지 않았다. 이제 더 이상 어리광 피우면 안 되는 나이인 만큼, 스스로 돈을 벌어서 먹고살아야 한다는 압박감이 심해졌다. 이에 빨리 돈을 벌고 싶다는 생각에, 정말 빨리 돈을 벌 수 있는 직업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덧 계산기는, 나의 꿈마저 점령했다.



누구나 각자의 산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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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이었다. 핸드폰으로 남아 있는 통장 잔액을 보니 19,447원이었다. 분명 무언가를 많이 사 먹지도, 옷을 사 입지도 않았는데 왜 19,447원만 남았을까.

속상한 마음에도 불구하고 철없이 날라 오는 가스비와 전기세, 핸드폰 요금 고지서와 방세 입금 날짜 등이 야속할 뿐이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렇게 하루하루 빠듯하게 이어가는 삶을, 나는 언제쯤 끝낼 수 있을까? 이에 대한 해답은 ‘글쎄, 잘 모르겠다’였다. 원하는 회사에 취직하더라도, 그때 나는 더욱 엄격하고 정밀한 계산기를 두드릴 터였다. 그렇게 생각하니 내가 사는 목적이 쉽사리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그동안 악착같이, 열심히 계산기를 두드려 모은 돈으로 삶의 목적을 사기로 했다. 삶의 목적은 때마다 값이 달랐다. 어느 달엔 여행이, 또 어떤 달엔 옷이 됐기 때문이다. 이때 계산기는 나를 더 옥죄이지 않았다. 그저 돈 앞에서 초라할 수밖에 없었던 내게 주는 선물이라고 말했다.


"미안하구나. 아버지는 그렇게 얘기했지만, 아버지, 이건 나의 산수예요 라고 나는 생각했다. 정기적금 정기적금, 또 한 통의 자유적금, 시급 천오백 원과 천원이 따로따로 쌓여가는 통장들을 생각하면, 세상에 힘든 일은 없었다"

"그래, 누구나 자신의 산수를 가지고 살아가는 거겠지. 그러니까 나의, 산수."

카스테라,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 中


박민규 작가의 단편 소설인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의 한 구절은, 나의 계산기에 대해 한동안 생각하게 만든다. 여태껏 비싼 옷, 비싼 음식, 그리고 여행들이 사치일 뿐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에 돈을 쓰는 사람들은, 내가 사는 세계보다 비싼 물가의 세계에 사는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물론 이러한 결론이 사실일지도 모른다. 어찌 됐든, 최저임금에 맞춘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살아가는 대학생인 나보다 더 여유 있는 삶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이라고 해서, 계산기가 없을까? 나와 같은 삶을 지나쳐 왔기에, 더 빡빡하게 산수 하는 삶인지도 모른다. 즉, 누구나 저마다의 산수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누구나 산수가 있는 만큼, 누구나 삶의 목적이 있다. 그리고 그 삶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돈을 번다.

어쩌면 나는, 계산기 자체가 아니라 삶의 목적 없이 계산기만 두드려 온 삶을 후회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황채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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