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SS] 새로운 용서의 언어, 자크데리다의 용서하다

글 입력 2019.04.30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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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ESS]

새로운 용서의 언어,

자크데리다의 용서하다


우리는 수많은 용서의 상황을 마주하며 살아간다. 지금 여기에 앉아 타자를 치고 있는 나의 의자에도 방석처럼 수많은 용서의 상황이 겹겹히 쌓여있다. 그리고 그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직접 겪지 않은 사건들도 포함하고 있다. 이 땅에서 벌어진 참극, 한 어린 소녀를 향해 휘둘러지는 끔찍한 폭력, 개인사에 중요시 여겨지는 사건들이 나와 얼마나 연관되어 있는지를 떠나서 어떤 완결을 바란다는 듯이 그림자의 한 부분에서 반짝이고 있다. 그런 맥락에서 든 책이 자크 데리다의 <용서하다>였다.

자크 데리다 라는 이름은 가끔 언급된 것을 들은 것이 전부였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이 나에게는 '첫 데리다'다. 책을 덮은 내가 처음 든 생각은, 일단 너무 어렵다 책이라는 사실이다. 어렵다는 의미는 세 가지를 내포한다. 첫째로는 말그대로 책 자체가 철학 입문자에게는 너무 어렵다는 의미다. 책에는 옮긴이의 섬세한 설명과 후일담이 적혀있고 그것이 이해의 이정표처럼 나를 이끈 것은 사실이지만, 개인적으로는 너무 모호했다. 수치로 계산할 수 없는 철학적 개념과 단어와 수많은 철학자의 이름이 나오면 정신이 멍해지기 마련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결코 친절한 책이 아니다. 개념에 대해서 하나하나 정확히 설명하지 않는다. 겨우 100쪽 남짓한 이 책을 읽기 위해 나는 꽤 많은 고비를 넘겨야 했다. 자크데리다가 강연한 것을 받아적었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라는 생각이 든다. 두 번째는 책에서 내린 결론을 받아들이기가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단순히 나와같이 '용서'에 대한 답을 구하기 위해 이 책을 들었다면 답답한 철학의 벽을 마주할 수 있다. 고백하자면, 책에서 내린 결론이 마음을 속시원하게 한 것도 아니었다. 책의 말을 빌리자면, 이미 '용서는 죽음의 수용소에서 죽었'기 때문이다.


여러 아포리아 중 하나만 예를 들어봅시다. 충분히 줄 수 없게, 충분히 환대할 수 없게, 제가 주는 현재와 제가 베푸는 이 대접에 제가 충분히 현존할 수 없게 하는 아포리아 때문에, 저는 주지 않아서, 결코 충분히 주지 않아서, 충분히 베풀거나 대접하지 않아서 항상 용서받을 일이 있을 것 같습니다. 아니, 저는 이것을 확신합니다. 기증에 관한 한 우리는 무언가 늘 잘못했고, 늘 용서받을 일이 있습니다. 주지 않아서, 충분히 주지 않아서 용서받을 일이 있다면, 우리는 또한 이 일로 자신이 유죄라고 느낄 수 있고 그래서 오히려 우리는 뭔가를 줘서 용서를 구해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겁니다. 우리가 준 것 때문에 구하는 용서, 그리고 이것은 어쩌면 내가 준 것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라고 상대에게 호소하는 일, 다시 말해 일종의 독, 무기, 주권의 확인, 더 나아가 강력한 힘의 실력 행사 같은 일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순간, 아포리아는 더 심각해집니다.


-13쪽



마지막 세 번째로는 데리다의 방식이 더 어렵게 만든다는 점이다. 단어를 해체하고 용서의 속성과 다른 단어의 속성을 비교하는 데리다의 방식이 모호한 것이 아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해체했기 때문에 더 모호하게 만들었다. '낯설게'한다는 것은 친숙하게 느껴졌던 단어를 모호함 속으로 밀어넣는 것을 의미한다. 데리다의 그런 모호한 특성을 잘 보여주는 부분은 책의 첫 장부터 드러난다. 책은 시작과 동시에 불어의 용서 'pardon(파르동)'을 해체한다. '용서'는 지금까지 '용서'였지만 해체한 순간부터 낯설어지기 시작한다.


데리다는 용서라는 단어를 'par-don'으로 나눠 par의 ~로-심지어 책의 후반에 fable을 분석하기도 한다-, don의 기증(드림,줌)으로 나눠 해석한다. 요약하자면, 용서는 '기증으로'의 의미를 담고 있는 셈이다. 데리다는 용서와 기증을 서로 비슷한 만큼 다르다고 주장하고,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두 개념을 비교한다. 이 사유는 용서를 해체하는 논리적 근거를 평가하는데 사용하는데 사용된다.

하지만 데리다가 제시한 기증과 용서의 공유하는 특성은 모호하기도 하지만 흥미롭기도 하다. 데리다는 기증과 용서, 기증에 의한 기증에는 원칙적인 무조건성 외에도 최소한의 시간, 시간화의 움직임과 본질적인 관련이 있다는 상관성 혹은 연관성이 있다고 했다. 기증은 주고받는 교환 경제에 속하지만, 이런 경제체제와 단절하고 이 체제에 혼란을 일으킨다는 조건에서만 의미가 있다. 나는 내가 주는 상황, 내가 베푸는 바로 그 시간에 온전히 있을 수도 있고 있지 않을 수도 있다.


내가 준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한 나는 충분히 기증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아이러니하게도 기증은 '불가능한 것'인 동시에 '절대적으로 잊음'이다. 마찬가지로 용서를 구한다면, 나는 나 자신의 주체성이나 어떤 특성, 유일성, 내가 주고 있는 이 순간에 행위의 유일성, 내가 주고 있는 이 순간과 행위의 유일성, 즉 나의 절대적 주권을 주장하는 것과 같다. 용서가 일대일의 대응관계라 했을 때 용서는 모순에 빠진다. 하여튼 데리다는 언어가 이런 식으로 기증되고 교환되는 구조가 반복된다고 이야기했다.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를 책에서는 '아포리아'라고 명명했다. 이 책은 계속해서 이 아포리아를 푸는데 전념한다.



사법 개념인 ‘시효 없음’이 용서의 영역에 속하지도 않고 용서할 수 없음을 의미하지도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저는 회복 불가능이 용서 불가능을 의미한다고 믿지 않습니다. ‘용서할 수 없음’과 ‘시효 없음’을 구분하기 위해, 그리고 비슷하면서도 다른 개념 ‘회복 불가능, 소멸 불가능, 만회 불가능, 역전 불가능, 망각 불가능, 변경 불가능, 속죄 불가능’을 구별하기 위해 되도록 세밀하고 엄격하게 주의를 기울여 접근해야 합니다. 이 개념들을 서로 분리하는 결정적인 차이들에도 이 개념들은 어떤 부정성, ‘~아니다’와 어떤 때는 ‘할 수 없음’이나 ‘해서는 안 됨’을 뜻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두 가지를 모두 의미하는 불가능, 즉 ‘할 수 없으므로 불가능하다’와 ‘해서는 안 되기에 불가능하다’를 의미하는 불가능의 ‘아니다’를 공유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경우에 어떤 과거를 변경해도 안 되거나 그럴 수도 없습니다. 되돌려도 안 되고 되돌릴 수도 없습니다. 과거는 과거고, 사건은 일어났으며, 잘못은 저질러졌고, 이 과거의 기억은 환원 불가능한 것, 어떻게 해볼 수 없는 것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것이 원칙적으로 과거와 관련 없는 기증과 다른 점 중 하나입니다.


-39쪽



이렇듯 데리다는 ‘용서(pardon)'라는 단어의 음절(par-don)에 포함된 의미를 성찰하면서 용서 행위에 포함된 논리적 난점들에 주목한다. 예를 들어 ’용서를 빌지 않는 자를 용서해야 하느냐‘는 가장 근본적인 문제에서부터 ’피해자 각자가 아니라 집단을 상대로 용서를 구할 수 있느냐, 그럴 권리가 있느냐, 그것이 과연 용서의 의미에 부합하느냐‘는 문제, 피해 당사자가 아니라 피해자를 대신해서 제삼자나 국가가 가해자를 용서할 권리가 있느냐’는 문제, 유대인 학살처럼 ‘저지른 죄가 너무 커서 ‘인간의 한계’를 넘었을 때에도 용서가 가능하냐‘는 문제에 이르기까지 철학적·윤리적으로 대답하기 까다로운 주제를 두고 심각한 성찰을 전개한다. 종군 위안부에 국가의 이름으로 용서를 받아낸 사건들은 이 맥락에서 다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데리다는 되돌릴 수 없고 회복할 수 없는 악행을 저지른 자와 그 악행의 피해자의 일대일 대면 조건에서만 용서를 질거나 용서할 수 있고, 피해 당사자만이 용서의 요청을 듣거나 거절할 수 있다.

책에서는 홀로코스트에 관한 장켈레비치의 주장을 가져와, '인간의 처벌 범위'를 넘어선 ‘용서할 수 없는 일을 용서해야 용서’라는 난제로부터 내용을 풀어나간다. “누구나 쉽게 용서할 수 있는 것을 용서하는 것은 용서가 아니”기에, “용서-불가능한 일을 용서하라는 요구를 받았을 때”에야 용서의 ‘가능성’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피해의 ‘회복 불가능성’은, ‘이미 벌어진 일’에 대한 용서의 시간성을 환기한다고 본다. 그렇기 때문에 죽음의 수용소에서 용서가 죽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 몫은 아이러니하게도 용서할 수 없는-쉽게 생각해보자면, 일제때 죄를 저지른 자들의 후손- 사람들에게 돌아간 셈이다.


이렇듯 데리다는 홀로코스트 생존자인 파울 첼란이 나치에 참여한 마르틴 하이데거를 만나고 쓴 시 ‘토트나우베르크’ 속에서 “맞이해야 할 것”으로서의 용서와 희망을 읽는다. 데리다가 생각하기에 장켈레비치도 1980~81년 용서를 비는 한 독일 청년과 주고받은 편지를 통해 용서의 실현가능성을 암시했다. 용서는 단번에 이뤄지지 않으며, 다만 화해를 목적으로 꾸준히 시도되어 역사를 지속시킬 수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복잡한 전개 속에서 생존한 우리가 할 수 있고, 나아갈 수 있는 것은 이 길 뿐이다. 나는 이 점에서는 데리다와 의견을 같이 한다. 어려운 책이지만, 생각하지 못한 연결을 발견할 수 있는 책이었다. 첫 데리다는 흥미로웠지만 정말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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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진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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