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멍때리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가치는 부여하기 나름

#오늘의 멍때림 #7호선
글 입력 2019.04.25 2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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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멍때림 #7호선



오늘도 난 7호선을 탄다. 나의 집은 7호선의 숭실대입구역이다. 난 7호선과 꽤 연이 깊다. 아주 어릴 적부터 이 동네에 살았던 덕에 가장 많은 사람들이 몸을 담는 2호선보다 7호선에 더욱 익숙했고. 학교 역시 같은 7호선 라인에 있는 곳으로 간 덕에 無환승의 천운을 누릴 수 있었다. 이제 4학년이니 매일 아침 저녁으로 7호선에 오른 것도 어느덧 4년째이다. 내년 이맘때 쯤이면 7호선이 아닌 2호선에 오르고 있으려나. 괜히 헛헛해지는 걸 보면 7호선과 정이 들었나 보다. 

내가 7호선을 좋아하는 이유는 또 있다. 바로 기장님들 때문이다. 출근시간의 지하철은 열차 간격이 좁고, 때문에 급정거를 하는 일이 종종 발생하기 마련이다. 그 날도 열차는 종종 급정거했고, 열차 안의 사람들은 이리저리 흔들렸다. 그 때마다 기장님은 안내방송을 하셨다.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열차가 멈춘 이유를 조곤조곤 설명해 주셨다. 사실 서울시민이라면 누구나 그 이유가 ‘앞 열차와의 안전 거리 확보’ 때문이라는 것을 알 터이다. 그래도, 그렇게 뻔한 이유라도 계속해서 말씀주시는 기장님의 세심함에 난 아침부터 기분이 좋았다.

7호선에는 멋진 기장님들이 많다. 때는 바야흐로 20살. 저녁에 7호선을 타고 어딘가로 가던 중이었다. ‘오늘 하루도 고생 많으셨고 내일도 힘찬 하루가 되시길 바랍니다.’라는 기장님의 멘트를 그 날 처음 들었고. ‘완전 감동!!’을 외치며 친구와 울부짖었던 기억이 난다. 그 후에도 기장님들의 따듯한 안내 멘트를 여러 번 들었다. 목소리가 다른 걸 보면 아마도 여러 분이신 것 같지만 그 분들은 모두 공통적으로 나를 울리셨다. (!) 상상해봐라. 지친 하루를 보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창 밖으로는 서울의 저물어가는 노을빛이 보인다. 그 때 누군가 이렇게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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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객 여러분, 오늘 하루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지친 마음은 모두 놓고 내리시고, 가방과 소지품은 꼭 챙겨 내리시길 바랍니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따듯한 저녁 보내시고, 가시는 목적지까지, 안녕히 가십시오."



#일



아무래도 콘텐츠 산업으로의 진로를 꿈꾸는 사람이라면 그것을 ‘좋아하기에’ 택한 경우가 많다. 콘텐츠 산업은 대부분 머리 터지는 창의력과 몸 터지는 열정을 요하기에 좋아하지 않는다면 업으로 삼기 힘들다. 그리고 그 머리 터지고 몸 터지려고 하는 애가 바로 나다. 난 어릴 때부터 하고 싶은 것이 꽤 명확했다. 특별한 계기가 있었다기보다는, 그저 인생에 자연스럽게 스며 있었다. 콘텐츠 산업이라는 커다란 궤도 안에서 이리 저리 바뀐 적은 있어도, 그 궤도 자체를 벗어난 적은 없다. 해서 인생을 살아가며 자연스럽게 겪게 되는 선택의 기로에서 큰 고민을 하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예를 들면, 내 친구들이 ‘문과 갈까 이과 갈까, 이과가 취업이 잘 된데.’ 할 때 난 1초만에 문과를 선택했고, 내 친구들이 전공을 고민할 때 난 한치의 망설임 없이 미디어 관련 학과를 지원했다. 친구들이 좋아하는 것을 찾기 위해 휴학을 할 때 난 관련 경험을 쌓기 위해 휴학을 했다. 말하고 보니 약간 재수없다. 맞다. 나도 나 재수없다. 그저 정말 복 받았다고 생각할 뿐이다.

그리고 이런 사람은 마찬가지로 ‘좋아서’ 이 일을 택한 사람들 무리에 자연스럽게 속하게 된다. 그래서일까. 나는 조직 내부에서 흘러나오는 좋아하는 일을 향한 찬사를 심심찮게 듣는다. 대충 이런 식이다. 좋아하지 않는 일을 하는 사람이 일이 힘들다고 하면 ‘그러니까 좋아하는 일을 하라’며 충고를 건넨다거나, ‘좋아하는 일을 해서 행복하다’며 미소짓는다거나, 뭐 이런 식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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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내가 여러 사람들을 만나며 알게 된 사실은, 본인이 좋아하는 일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라는 거다. 생각해보면 한국의 교육 시스템은 학생 개개인에게 자아발견의 시간을 거의 주지 않기 때문에 본인의 흥미가 어디에 가 있는지 모르는 것이 당연하다. 좋아하는 일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오히려 별종이랄까. 헌데 좋아하는 일을 하면 더 즐겁다는 이유로, 열심히 하는 사람은 좋아하는 사람을 이길 수 없다는 이유로 ‘좋아하는 일’은 우리 사회에서 자주 대단한 것인 양 찬양된다.

그리고 이런 찬양은 본인이 무슨 일을 좋아하는지 결국 알지 못한 채 현실적인 대안을 선택한 이들에게 우울감을 선사한다. 내 친구들과 미래 이야기를 할 때 가장 많이 듣는 말은 이것이다. ‘넌 좋아하는 일 해서 좋겠다.’ 난 이 말을 하면서 왜 친구들이 그렇게 자포자기의 표정을 지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의문을 품어본다. 정말 좋아하는 일을 한다는 건 그렇게 부러움을 살 일일까. 우선 좋아하는 일을 한다는 것은 분명 멋진 일이다. 좋아하는 만큼 욕심도 커져 스트레스 역시 많이 받지만, 그 고통을 무마할 재미와 설렘의 순간이 있음이 사실이다. 하지만 좋아하는 일’만이’ 멋진 일은 분명 아니다.



#가치있는 일



얼마 전 멋진 말을 들었다. 그 사람은 유아교육과였다. 말투도, 행동도 너무 사근사근해서 뼛속부터 유아교육과 같은 사람이었다. 누군가 물었다. ‘언니는 (유아교육과) 가고 싶어서 간 거죠?’ 그 사람은 이렇게 대답했다. ‘아니, 근데 가서 좋아하게 됐어.’

좋아하는 일을 하는 사람은 멋있는 사람이라고 여겨진다. 주체적이고 도전적이며 열정적이라는 이미지 때문일테다. 하지만 내가 생각했을 때 진짜 멋있는 사람은 좋아하지 않음에도 그 일을 묵묵해 해내는 사람, 그러다 그 일에 본인만의 가치를 부여하는 사람, 해서 다른 이들로 하여금 세상에 그러한 가치 역시 존재했음을 알게 해주는, 그런 사람이다.

유아교육과 언니가 어떻게 그 일을 좋아하게 된 건지, 계기는 정확히 모르겠다. 하지만 확실한 건 언니의 개인적인 가치부여로 인해 그 일은 세상의 흐름에 유의미한 일이 되었다. 인터뷰에서 미루어 짐작해보건데 7호선 기관사님들 역시 그 직업을 선망해서, 혹은 지하철을 좋아해서 기관사가 되신 건 아닐 것 같다. 아마도 당장의 현실적인 여건 때문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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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시작하는 순간에서의 열정은 없었을지라도 함께 지지고 볶으며 피어나는 연정도 있다. 7호선 기관사님들은 기관사라는 일이 단순히 사람을 실어 나르는 일이 아닌, 수많은 사람들의 하루를 잠시 담아내는 일이라고 생각하신 것 같다. 그 덕에 따듯한 멘트가 탄생했고, 그 덕에 많은 이들은 감동을 받았으며, 그 수는 하나의 음악으로 인해 위로 받은 사람의 수와 비견할 수 있을 것이다. 헌데 우리는 어찌 감히 ‘그러니까 좋아하는 일을 하라’고 말할 수 있는 걸까. 어쩌면 우리 사회는, 꽤 오랫동안 ‘좋아하는 일’이라는 환상 속에서 살고 있었던 건 아닐까.

세상의 모든 일은 가치 있다. 그것이 본인의 흥미를 쫓은 결과물이건, 현실을 쫓은 결과물이건 간에. 어떤 일이 어떤 일보다 열등하다는 개념은 세상에 존재할 수 없다. 일단 그 일이 세상에 탄생했다는 건, 그러한 일을 필요로 하는 누군가가 있었다는 뜻이다. 재밌으면 재밌는대로 가치 있는 거고, 재미없으면 가치를 부여하면 될 일이다. 결국 중요한 건 본인의 일에 스스로가 어떤 가치를 부여하느냐이다.

가치가 부여된 세상의 모든 일은 가치 있다. 이 글을 빌어, 일을 하고 있는 모든 이들이 본인의 일이 지닌 가치를 되짚어 보는 시간을 가지면 좋겠다. 따듯한 (더운) 봄이다. 모두 모두, 가치 있는 노동의 시간 보내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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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민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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