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우리는 좀 부정적일 필요가 있다 [문화 전반]

글 입력 2019.04.21 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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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니까 청춘이다》. 아픔을 겪는 청춘을 향한 조언을 담은 김난도 교수의 저서는 세상에 나온 후 몇 년간은 꿈꿔왔던 것과 다르게 녹록지 않은 세상에 내던져진 보편의 청춘들에게 주어지는 위로가 되었다가, 시간이 지나도 아무것도 변하지 않자 그 안에 숨어 있는 어른의 무책임함을 감지한 ‘아픈 청춘들’의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그들은 아무런 잘못이 없는데도 마땅히 아픔을 감내해야 한다는 훈계의 비겁함을 느꼈다. 어느 연예인이 던진 ‘아프면 환자지 무슨 청춘이야’라는 조소 섞인 반문은 청춘의 아픔이 당연한 것이 아니며 고쳐져야 할 대상임을 강조한다.

2010년대 중반에 등장한 ‘헬조선’이나 ‘금수저’, ‘노오오오력’ 등 신조어의 유행 현상은 청춘들이 그들의 아픔이 그들의 잘못에서 비롯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그들은 자신의 어깨가 무거운 이유가 사회가 지운 짐 때문이라는 것을 자각했다. 《아프니까 청춘이다》가 비판받은 다른 이유는 ‘종잣돈보다 연습과 노력이 중요하다’며 노력하지 않은 청춘을 책망했던 저자가 사실 ‘금수저 출신’이라는 설 때문이었다. 재벌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그들에게 소비 트렌드를 강의하는 명문대 교수는 상상할 수도 없는, 따라서 쉽게 조언으로 다룰 수 없는 노력의 한계가 우리에겐 주어져 있음을 청춘들은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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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의로 떨어진 자존감을 회복하는 것은 ‘노력’의 굴레에서 가까스로 벗어난 청춘들의 다음 과제였다. 2016년에 출간된 윤홍균 저의 《자존감 수업》은 80만 부의 판매고를 세우며 지금까지도 베스트셀러로 수많은 독자에게 읽히고 있다. 서로가 서로에 대해 너무 잘 아는 과잉 정보의 시대에서 비교의 늪에 빠진 사람들은 자존감에 큰 타격을 입었고, 이를 회복해야 할 필요를 느꼈다. 《자존감 수업》의 히트는 이러한 사회 배경에서 설명된다.

그러나 서열주의로 점철된 대한민국 사회에서 자존감은 그마저도 우열을 나누는 기준으로 전락했다. 몇 가지 질문에 대한 대답을 입력하면 자존감 지수를 측정해주는 ‘자존감 테스트’를 인터넷에서 목격한 적이 있는데, 사람들은 낮게 나온 자신의 자존감 지수에 비관했고 높은 점수가 측정된 사람들을 부러워했다. 자존감이 낮다는 이유로 또다시 자존감을 낮추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순환 모순이 자존감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한다. 자존감은 기본적으로 무언가의 높고 낮음으로 개인의 가치를 규정하는 습관에서 탈피하고자 하는 삶의 태도이다. 자존감이 설령 낮을지언정 그것은 상태에 불과하고 개인의 가치를 대표하거나 재단할 수 없다.

나는 이러한 오해를 잘못하지 않은 부분에서도 책임을 져야 했던 지난 시대에 대한 반작용적 현상으로 본다. 노력이 부족하다면 자아에 대한 긍정은 사치로 치부되었던 과거 사회에 대한 반동으로, 자신의 부정적인 부분을 모두 묻어두고 한없이 낙관적으로 바라보는 태도가 삶의 지향점으로 제시된 것이다. 얼마나 자신에 대해 객관적인지 따져 물었던 시대를 지나 얼마나 자신에 대해 낙관적일 수 있는지가 ‘자존감’으로 명명되는 현대인의 자질의 척도가 되었고 그것은 결국 수치로 설명되는 또 다른 기준이 되어 우열을 가리는 데에 이르렀다.
 
자존감이란 도대체 뭘까? 자존감과 비슷하지만 구체적인 의미는 대치되는 부정적 단어로 자주 언급되는 ‘자존심’과 사전적 의미를 대조해보자. 자존감은 말 그대로 ‘자신을 존중하는 감정’을 이른다. 자존심은 ‘제 몸을 굽히지 않고 스스로 높이는 마음’을 뜻한다. 자신을 높이는 마음이라는 점에서는 공통적이지만 자존심에 대한 설명에는 자존감에 대한 그것에는 없는 ‘굽히지 않음’이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자존심과 구별되는 자존감의 가치는 바로 ‘굽힐 수 있음’에 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낙관할 수 있는 완벽한 사람은 없다. 대신 누구에게나 있는 부정적인 점이 나에게도 있음을 인정하고 그것을 자신을 구성하는 요소로 존중할 수 있어야 한다. 기꺼이 그럴 수 있는 안전한 사회가 조성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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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도 괜찮아’라는 문장으로 대표되는 최근의 ‘힐링 도서’ 유행은 자존감에 대한 오해와 함께 무조건적 낙관을 종용하는 사회의 실태를 보여준다. 예쁜 표지와 더불어 일러스트와 여백이 내용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괜찮아 도서’는 간편한 독서를 통한 ‘힐링’의 이점을 표방하며 인기를 끌고 있다.

몇 안 되는 문장으로 구성된 책의 내용은 제목에서 짐작되다시피 무엇을 해도 괜찮다는 위안의 메시지로 점철되어있다. 앞에서 밝혔다시피 지난한 사회적 압박을 지나온 청춘들에게 무조건 괜찮다는 말은 무의미한 위로가 아니다. 그러나 여기서 더 나아가지 못한다면 괜찮다는 주문은 단순한 최면으로 머물고 만다. 아프니까 청춘이라는 시대를 지난 최면과 다르지 않다. 괜찮아, 청춘이니까. 괜찮아, 너는 소중하니까. 이유만 달라졌지 결국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아프니까 청춘이다》와 ‘괜찮아 도서’의 차이는 누구에게 직접적인 잘못을 부과하느냐에 있다. 전자는 노력을 안 한 청춘을 탓하고 후자는 누구도 탓하지 않는다. 발전이라면 발전이지만, 청춘들은 이미 무엇을 탓해야 하는지 알고 있다. 탓해도 바뀌지 않는다는 것이 그들이 진짜 대면한 문제다. ‘괜찮아 도서’는 거기까지 나아가지 못한다. 탓해야 할 자를 탓하지 않고 심각한 문제를 그럭저럭 괜찮은 성장통으로 일축시킨다는 점에서 결국 《아프니까 청춘이다》와 같은 맥락을 취한다. 그사이 썩은 곳은 곪아가기만 하고 있으며, 이것은 유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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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NS에서 유행한 ‘괜찮아 도서’의 패러디.
나는 여기서 ‘아프리카 청춘이다’의 기시감을 느꼈다.
공허한 위로에 싫증 난 사람들은
말장난에 가까운 패러디를 통해
씁쓸한 현실을 해학으로 웃어넘겼다.


그렇다면 우리 시대에 필요한 위로는 무엇일까. 삶의 전환점이 되었던 대학교 교수님의 조언이 생각난다. 좋아하는 것을 하되 그것으로 깎일 인생의 부분을 항상 생각하라는 조언이었다. 파도와 같은 시간 속에서 우리의 인생은 침식을 반복한다. 나를 깎는 주체는 사회가 될 수도, 타인이 될 수도, 내가 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그래도 괜찮아 하는 것이 아닌, 극복하든 감내하든 작아지는 삶의 불편함을 인식하는 데에 있다. 작은 나를 있는 그대로 작게 보는 것이 어쩌면 자기존중의 출발점이 아닐까 생각된다.

불편한 세상에서는 불편함을 느껴야 한다. 우리 사회가 권장해야 할 것은 불편함을 느끼며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는 개인을 ‘프로불편러’로 몰아가는 선택적 낙관주의가 아니다. 불편해도 괜찮다고 하는 것은 긍정적인 게 아니고 어리석고 둔한 것이다. 우리는 좀 안 괜찮을 필요가 있다. 부정적일 필요가 있다. 아파도, 자존감이 낮아도, 괜찮지 않아도 잘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꿈꾼다. 그렇지 않은 이 세상에서 나는 괜찮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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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현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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