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덕후's Checklist공개 음악방송 일주일에 2번 이상 참여
스트리밍은 숨 쉬듯
팬싸인회 당첨을 위한 앨범 대량 구매
굿즈 모으기 - 공식 굿즈는 두 개씩 (관상용, 소장용)
공개 팬싸인회면 당첨되지 않아도 얼굴보러 가기
온라인 덕질메이트와 오프라인에서 친목하기
평소에 사지 않는 비싼 물품 조공
최애가 간 곳을 다니는 더쿠투어
최애 욕하는 팬들과 Fight
피의 쉴드 또는 묵인
아이돌을 덕질하는 방법은 크게 3가지로 나뉜다. 최애(가장 사랑하는 멤버)만 사랑하는 개인팬, 모든 멤버를 골고루 사랑하는 올팬. 최애와 차애 순서로 애정도가 나뉘는 피라미드형 팬.
개인팬은 여기에서 또 덕질 스타일이 나뉜다. 최애를 이성으로 좋아하는 '유사연애'형, 최애의 실력이 성장하는 것으로 재미를 찾는 '성장'형, 혹은 '커리어'형. 최애의 흠을 비롯한 행동을 까면서 덕질하는 일명 '까빠'. 최애를 제외한 나머지 멤버를 배척하는 악성 개인팬, 줄여서 '악개'. 최애를 신격화하여 '최애 말이 모두 정답이다.' 종교처럼 여기는 '교주'형. 최애를 자식처럼 키운다고 생각하는 '맘'형.
덕질의 형태는 각양각색이라 어떤 것이 정답이고 어떻게 해야만 한다는 공식은 없다. 개인마다 추구하는 덕질이 다르기도 하고. 나는 이 중에서 개인팬이자 성장형, 맘형이었는데 신인인 최애의 파릇파릇한 신선함과 열정을 보는 재미로 덕질했다.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는 모습이 마치 내가 키운 것처럼 뿌듯하고 좋았다. 말하자면 '지갑으로 키운 내 새끼'였다.
아무리 덕질 스타일이 다양해도 이를 총망라한 공통점이 존재한다. 바로 위에 작성한 체크리스트. 자신을 빠순이라고 자조할 정도로 열성팬이라면 해당하는 항목이 많을 것이다. (여기서 잠깐, 빠순이는 절대 남을 지칭하지 않는다. 빠순이란 단어는 내 새끼에게 한없이 헌신하는 자신을 자조할 때 쓰는 단어이다. 아니면 덕질메이트끼리 처지를 한탄할 때 감히 빠순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릴 수 있다. 내가 아닌 남이 나를 빠순이라고 부르는 건 아니 될 말씀.)

내가 속해있던 팬덤의 세계엔 지켜야 할 불문율이 있다. 첫째, 최애에게 부정적인 언급 금지. 그가 뭘 잘못했든 실망을 줬든 쓴소리를 하지 않는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쓴소리를 하되 공개적인 곳에선 하지 않는 게 낫다. 팬들 말고도 눈이 많은 트위터에선 더욱 그렇다. 특히 최애의 사진을 단 프로필로 할 수 있는 부정적인 언급은 없다. 그랬다간 자신도 모르게 뒤에서 조리 돌려지며 조롱당하고 있을 확률 95%. 비판하려거든 속으로 하거나 조용히 삭여야 한다.
둘째, 잘잘못이 애매한 일은 무조건 회사 탓. 일이 공론화되기 전에 어떻게든 내 새끼가 빠져나갈 구멍을 만든다. 쉬쉬하면서 입막음하다가 자칫 일이 커지면 그때야 "내 새끼는 잘못 없어! 회사에서 시키는 대로 했단 말이야".
그 밖에도 여러 가지 암묵적인 규칙이 있다. 다른 팬덤도 그런지는 잘 모르겠다만 당시 우리 팬덤은 저 사항을 지키지 않으면 신나게 조리돌림 당했다. 나 또한 그게 무서워서 묵인한 적이 있다. 최애의 그룹이 후속곡을 내고 컴백 신호탄을 쏘아 올렸을 때다. 신곡 뮤직비디오가 나오기 1분 전, 트위터 타임라인은 흥분의 도가니였다. 그러나 막상 뚜껑을 연 뮤비는 김이 팍 샐 만큼 별로였다. 곡이 구린 것과 상관없이 뮤비 내용에 문제가 많았기 때문이다. 여성을 성적 대상화, 도구화한 것은 물론 감독의 이상한 여성관을 그룹 멤버들이 연기하고 있어서 무척 자극적이고 불쾌했다. 단지 나만 느낀 문제는 아니었다. 팬덤의 9할을 차지한 여성들은 뮤비가 지극히 여성 혐오적이란 것을 빠르게 캐치했다. 그러나 우리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제 막 시작한 그룹에게 응원의 메시지를 주진 못할망정 비판을 한단 것은 팬덤 내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나를 비롯한 팬들이 눈가리고 아웅하는 사이 문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져 대형 커뮤니티 곳곳에서 공론화되었다. 그때마다 팬덤의 항변은 똑같았다. "우리 애는 잘못 없어". 혹시라도 내 새끼에게 불똥이 튈까 다급히 변명부터 꺼내고 마는 꼴이 추했다. 하지만 내 마음 한켠에는 최애를 감싸고 싶은 마음이 드글거렸다. 그래서 나는 최애를 감싸는 방패부터 들었고 이런 내 모습에 스스로도 혼란했다. 자칭 페미니스트란 사람이 남자아이돌 때문에 여성 혐오를 방관하고 졸지에 동참하고 있는 꼴이라니. 자신이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 새우젓도 감정은 있다
팬사인회를 다녀와서 탈덕하는 덕후들이 많다고 한다. 일명 '팬싸 탈덕증후군'. 이 가상의 증후군은 덕후들 사이에선 유명한 불치병이다. 좋아하는 연예인의 팬사인회를 다녀와서 모종의 우울감과 허탈함, 실망감을 느끼고 탈덕까지 하게 되는 무시무시한 증상이다. 문제는 딱히 어떤 원인이 있는 것도 아니란 것이다. 연예인의 태도나 팬서비스가 나쁘지 않아도 이 증상을 느끼는 팬들이 많다.
원인은 수많은 팬 사이에서 스타를 바라볼 땐 느끼지 못한 스타와 팬의 관계를 일대일 대면을 통해 실감하기 때문이다. 팬에게 주어진 시간은 한 멤버당 대략 30초. 그 짧은 시간 안에 자신의 사랑과 덕력을 뽐내야 한다. 그러나 수십만원을 써서 팬사인회를 온 팬의 입장과 생판 남인 수백명을 상대해야 하는 스타의 입장은 차이 날 수밖에 없다. 그런 입장 차이와 더불어 스타도 사람인지라 모든 순간에 적극적이고 진실할 순 없다. 365일 제 연예인을 관찰하는 팬이 그걸 놓칠 리도 없고 말이다. 그 잠깐의 감정이 얼굴에, 태도에 드러나는 순간 팬은 서운함과 허탈함, 거리감을 느낀다. 그리고 이 감정을 현실 자각타임, '현타'라고 부른다.
사실 모든 덕후는 안다. 자신은 한낱 새우젓 속 새우보다 못한 존재감이란 것을. 나도 그랬다. 잘 알고 있었다. 공연장을 채우는 수많은 검은 머리 중 나라는 일개 팬을 알아봐 줄 거란 생각은 꿈에서조차 하지 않았다. 항상 인지하고 있었는데, 하루에도 수백번 마주하는 내 아이돌에게 나는 언제나 초면이란 것을.
그러나 어떤 일이든 간에 생각만 하는 것과 실제로 맞닥뜨리는 것은 차원이 다른 얘기다. 아무리 마음을 굳게 먹는데도 현실의 최애에게 확인사살 당하는 것은 덕후에게 치명적으로 잔인하다.
좀 더 솔직해져 볼까. 단순히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에 낯섦만이 있어 충격받은 건 아니다. 그 눈에서는 초면인 나를 어색해하는 감정과 너무 긴장해서 빠르게 말을 내뱉는 제 앞의 여자가 빨리 지나줬으면 하는 귀찮음, 어쩌면 영혼이 나가버린 공허함까지 엿보았다. 눈빛뿐이었나? 성의 없이 내뱉는 "아 정말요?". 그 말만 세 번은 들은 것 같다. 진심을 내뱉는 내가 얼마나 초라한지.
말로는 내가 키운 내 새끼 어쩌고 하며 바랄 게 없다고 했지, 알고 보면 '내가 해준 게 얼만데. 너를 위해 얼마나 희생했는데.' 하며 엉뚱한 책임을 그에게 미뤘던 것일 수도 있다. 그래서 더 그의 텅 빈 눈이 따가웠고 성의 없는 대답이 아니꼬웠을지도.
# 탈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