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무언가로 명명되는 사람들에 대하여 - 소년 7의 고백 [도서]

안보윤 - 소년 7의 고백 中 '불행한 사람들'을 읽고
글 입력 2019.04.09 2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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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은은 복도이다.

 

무슨 말이냐 하면, 주은은 특별한 아이들을 관리하는 학원에서 복도관리를 맡고 있다. 복도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그저 지켜보기만 하면 되는 일이다. 하지만 그 누구도 주은을 이름으로 부르지 않는다. ‘복도’, 혹은 ‘복도쌤’, 그리고 그 학원의 가장 특별한 클래스인 SA반 선생님인 ‘마른 장작’만이 주은을 ‘주은씨’라고 부른다. 그러나 그 이름에는 어떠한 존엄도 없다.



‘복도쌤. 나는 보통 그렇게 불렸다. 원감이자 이사장 조카이자 SA반 선생인 마른 장작은 주은씨, 불렀고 원장은 오주은씨, 불렀다. 이사장은 만나본 적이 없었다. 다른 선생들은 나를 부를 일이 거의 없었는데, 휴게실에서 복도가 어쩌고 하는 소리를 들은 적은 있었다. 커피잔 거기 둬, 이따 복도가 치우겠지. 그런 식의 대화에서였다.’



아이들은 음식을 먹다가 흘리면 ‘복도가 치울 거야.’라며 교실로 들어가고, 아이들이 쉬는 시간에 화장실에 간다면 화장실까지 따라 가서 볼일을 볼 때까지 기다렸다가 아이를 데리고 교실로 돌아와야 한다. 한 날은 SA반 아이들이 싸웠는데 그들을 말렸다는 이유로 마른장작에게 갖은 수모를 당한다. 그저 지켜보기만 하는 일, 그것이 주은이 하는 일이다. 주은은 CCTV같은 존재이며, 본 것을 그대로 말해야 한다고 지시받는다.


그러나 이 일은 많은 돈을 준다. 대학생이 방학 중 등록금을 벌기 위해 하는 아르바이트라고 하기에 한 눈에 봐도 높은 급여를 준다. 그래서 주은은 참고 견딘다. 누가 자신을 어떻게 부르든, 그저 본 것을 본대로 말하는 게 아니라 아이들 부모의 지위에 따라 다르게 말할 줄 알아야 한다는 세계의 질서에 대해 깨달으면서. 주은은 참고 견딘다. 그녀는 서서히 존엄을 잃어간다. 자신이 무엇을 위해 참고 견디는지 모르는 사람이기 때문에 존엄을 잃는 것이 아닐 것이다. 그걸 잊을 만큼 세상은 그녀를 아무런 이름으로도 불러주지 않는다.


*


화진은 쉽게 잊는 사람이다. 말하자면 그녀에게는 이름이 없다.


화진은 손목이 매끈하게 부러지기 전까지, 마트에서 시식대 관리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런데, 400그람짜리 돈까시 60개가 들어 있는 박스에 손목을 맞고 만다. 아무런 증상 없이 매끈하기만 한 손목을 두고 화진은 아무 것도 하지 않지만, 주은에 손에 이끌려 간 정형외과에서 손목 뼈가 부러진 것을 발견한다. 이를 아르바이트 업장에 고하자마자 화진은 일자리를 잃는다. 그녀는 주은을 원망한다.

 

한동안 연락을 하지 않다가 그녀가 다시 주은을 찾은 것은 ‘꼬마 원장’이 운영하는 화랑에 비서로 취직한 후였다. 취직이라는 명목 하에 비서라는 그럴듯한 직책을 달고 있지만, 실상은 어린 원장이 비서를 데리고 일을 하는 것을 꿈꾸기 때문에 우는 애를 달래듯 직원들이 아르바이트 공고를 냈고, 운 좋게 화진이 합격을 한 것이다. 화진은 꼬마 원장과 함께 하는 일을 불평하듯 주은에게 늘어놓는다. 그러나 그 일은 어떻게 보면 너무나도 쉽고, 인간적인 대우와 높은 급여를 받는다. 마치 주은을 놀리기라도 하듯, 화진은 삼개월 전의 자신을 잊은 채로 일자리를 그만둘까 말하는 주은을 질책한다.

 

화진은 소설 속에서 유일하게 호칭이 등장하지 않는 인물이다. 이름이 없는 것은, 그녀는 쉽게 잊는다. 그리고 쉽게 잊힌다. 자신 몫의 불행은 분명 존재하지만 그것의 이름을 희미하게 만들기 위해 다른 이의 불행에게 이름을 붙인다. 자꾸 무언가라고 명명하면서, 그녀의 불행은 희미해지고 타인은 분명한 이름을 갖는다. 그것은 ‘낙오자’이다.



‘아니 너랑 만나면 나는 늘 불행해져. 널 만나서 얘기하는 동안 불행이 내 등이랑 옆구리에 박음질되는 것만 같아. 네가 다리미로 불행을 꾹꾹 눌러 붙여준 것만 같아. 넌 내 친구고, 사회에 잘 적응한 사람이고, 성실한 알바생이고, 현실과 성공적으로 타협한 사람인데, 나는 네가 너무 무거워. 사람이 그럴 수 있다고? 살다 보면 그런 일도 생기지 않느냐고? 남의 돈 버는 게 다 그런 거라고? 그래. 그럴 수 있어. 근데 그러지 않는 게 사람 아니니.’



안보윤이 소설 속에 구축한 불행한 세계는 이름을 가진 자와 그렇지 못한 자, 그 이름이라는 것이 명명되어서 하나의 역할로 작용하는 데에 긍정적인 자와 그렇지 못한 자로 나뉜다. 주은은 이름을 가졌으나 명명되는 것에 부정적인 인물이다. 그녀는 자신이 복도, 혹은 주은씨, 라고 불리는 것에 신물이 나 있다. 그것은 사회에서 부여한 이름에는 모종의 책임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반면 결말부에 가서는 정직원으로 채용될 기회를 얻게 된다. 이제 화진이 있던 비서 아르바이트 자리에는 새로운 사람이 들어올 것이고, 그녀는 그를 새로운 호칭으로 명명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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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인용문에는 소설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가 응축되어 담겨 있다. 개인적으로 이런 식으로 모든 이야기를 한 번에 보여주는 화법은 소설 전체에 담화를 녹여내지 못했다는 점에서 부정적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안보윤의 불행한 사람들에는 이 한 마디를 하기 위해 너무 많은 주은이, 주은씨가 고생을 하며 달려오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양한 이름을 바톤터치하며 이어달리기를 하듯, 그렇게 삶을 살아가는 현대의 사람들을 우리는 ‘불행한 사람들’이라고만 할 수 있을까? 그들의 불행을 불행으로 여기며 자신의 불행이 투명해지는 연습을 하고 있지는 않은가에 대하여.



[이정문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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