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아주 사소하고 황당한 이야기 [기타]

글 입력 2019.04.01 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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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고양이를 무서워한다. 그것도 아주 많이. 누군가에게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란 걸 안다. 실제로 많은 사람이 내 두려움을 대수롭지 않아 한다. 이것이 문제 되는 때는 고양이 집사(고양이 키우는 사람)에게 초대받는 순간이다. 게다가 그 사람과 내가 친밀하지 않거나 동등한 관계가 아닐 시 곤란해진다.

'고양이가 무서워서 못 가요'라는 이유로 초대를 거절해야 하는데, 이 말은 생각보다 설득력이 강하지 않다. 정말 고양이가 무서워서인데, 가기 싫어서 핑계 대는 것으로 생각한다. 혹은 괜히 유난 떤다고 생각하거나. 어쩔 수 없이 내가 집에 가서 고양이를 마주한 후, 정말 추한 꼴을 보이면 그제야 믿는다. 아니, 고양이를 왜 이렇게 무서워해? 라고 말하면서. 나도 모른다. 어릴 때 고양이한테 물린 적도 없고 나쁜 추억도 없다. 전생에 고양이와 관련된 악연이 있는 것이 분명하다고 나름 합리적인(?) 의심을 하는 중이다.

고양이를 무서워하다 보니 고양이에 관한 에피소드가 안 생길 수가 없다. 대학 시절에도 잊지 못할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때는 대학교 2학년(아마도). 우리 학교에는 길고양이 두세 마리가 있었다. 이 친구들과 가끔 길에서 어색한 만남을 가졌지만 큰 문제가 되진 않았다. 고양이와 좁은 공간에 있는 것이 아니면, 나도 내 두려움을 다스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무섭지 않은 척 연기하고 그러면 고양이는 나에게 일말의 관심도 주지 않는, 평화로운 나날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건물 안에서 고양이를 만나고 말았다.

그날 나는 혼자 학생관 1층에서 컴퓨터로 과제를 하고 있었다. 그러다 출출해져서 바로 옆에 있는 편의점에 갔는데, 그것이 화근이었다. 즐겁게 군것질거리를 사고 나왔더니, 맙소사. 고양이가 내 자리에 떡하니 앉아있는 것이었다. 그것도 모자라 다른 한 마리는 의자 주변을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말도 안 돼. 몸이 딱 굳어서 움직이지 않았다. 짧은 순간 여러 생각이 들었다. 그때 떠오른 해결책은 이것이었다.


1. 편의점 아주머니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2. 주변 학생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3. 고양이가 가길 기다린다.



1, 2번은 빠른 문제 해결이 가능했지만 아무래도 좀 멍청해 보였다. 그래서 3번을 선택하고 고양이와 거리가 있는 곳에 자리 잡고 기다렸다. 잠시 후 의자 주위를 어슬렁거리던 고양이가 떠나갔다. 그런데 의자에 앉은 고양이는 시간이 지나도 일어날 기미를 안 보였다. 20분 정도가 지난 것 같은데도! 의자가 푹신해서 잠든 것 같다는 절망적인 생각이 들었다. 주위에 도움을 요청해야 하나 고민하던 차에 이런 생각이 스쳤다. 길고양이가 하필 저기서 잔다고? 주위에 사람도 있는데? 고양이 친구도 갔는데? 의심이 눈앞의 공포를 걷어내자 보이지 않던 것이 보였다. 잠깐, 저거 고양이 아니잖아.

맞다. 그건 내 하얀색 목도리였다. 편의점 가기 전, 의자에 대충 던져놓은 두꺼운 목도리. 목도리가 그럴듯하게 뭉쳐져 있던 데다가 때마침 의자 옆에 고양이가 어슬렁거려서 난 그것도 고양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이다. 몸에 힘이 쭉 풀림과 동시에 어이가 없었다. 또한, 주변에 도움을 구하지 않은 것에 아주 아주 감사했다. 만약 도움을 요청했다면, 지금 그 일을 쓸 수 없을 정도로 부끄러운 기억이 되지 않았을까. 집에 가서 부모님께 이 사건을 털어놓자 부모님이 한참을 웃으셨다. 이걸(나) 어디에 쓰냐면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즐겁게 했으니 완전히 쓸모없는 일은 아니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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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생각해도 황당하고 바보 같은 이야기이다. 목도리가 무서워서 안절부절못했다니 우습지 않은가. 그럼에도 나름대로 이 일에서 얻은 교훈은 있었다. 그것은 지레 겁먹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인생을 살다 보면 신이 나를 시험하는 것 같은 순간이 찾아온다. 그것은 사소한 것일 수도, 인생의 중대한 사안일 수도 있다. 무엇이든 간에 두렵고 막막하긴 마찬가지이다. 넘을 수 없는 거대한 산이 앞을 가로막은 느낌. 도망가고 싶다.
 
그러나 막상 겪어보면, 그것은 사실 별거 아닐 수도 있다. 고양이인 줄 알았는데 목도리였던 것처럼 말이다. 돌이켜보면, 실제로 이런 경우가 꽤 있다. 그러니까 미리 겁먹고 도망칠 준비부터 해서는 안 된다. 우선, 그게 고양이인지 목도리인지 뚜껑을 열어보는 것이 현명하다. 열었더니 그것이 고양이라면? 글쎄, 그럼 그때 도망치면 되지 않을까. 후회가 남지 않는 아주 가벼운 발걸음이 될 것이다.
 

[정지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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