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우리는 ‘여전사의 섬’에 갈 수 있을까요?; 연극 <여전사의 섬>

연극 <여전사의 섬> 리뷰
글 입력 2019.03.26 2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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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성거리는 소음과 수많은 사람들의 목소리가 겹쳐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의 향연으로 극이 시작된다. 조명이 켜지기 전 어둠 속에서 정체 모를 소리가 들려올 때 겁 많은 친구는 내 팔을 잡기도 했다. 머지않아 관객석에서 배우들이 등장하고, 그들은 무대 위 단상에 놓인 자신들의 자리로 돌아간다. 그리고 조명은 무대 가운데 서 있는 한 여자를 비춘다. 만년 취업준비생, 오늘도 어김없이 면접 준비에 청춘을 불태우는 스물아홉 여자 ‘지니’다.

 

지니는 수많은 회사의 면접을 위해 자기소개서를 달달 외우고, 그 회사에 자신을 끼워 맞추기 위해 노력한다. 출판사 면접을 볼 때는 다른 회사의 면접에서 사용할 소개멘트를 잘못 말하는 어처구니없는 실수도 저지르지만, 그래도 자신은 ‘카멜레온’이라며 적극 어필한다. 상황에 따라 자신의 색을 바꾸며 적응하는 카멜레온처럼 사회에 맞춰가기 위해 부단히 애쓰지만, 현실은 막막하기만 하다.

 

반면 쌍둥이 동생 ‘하나’는 지니보다는 상황이 나아 보인다. 승무원이라는 번듯한 직업이 있고, 자신의 직업을 사랑하고 자부심도 느끼며, 변호사 남자친구와 오랜 연애를 거쳐 곧 결혼까지 앞두고 있다. 시부모님은 때때로 싸한 농담을 던지지만 ‘딸 같아서 그렇다’는 한 마디에 웃어넘기면 될 뿐이다.


 

[세종] 서울시극단_여전사의섬_지니(허진) 하나(김유민).jpg
 


그러다 자매는 29년 만에 아빠로부터 엄마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여전사 집단 ‘아마조네스’ 출신의 여전사였다는 엄마. 그녀는 ‘여전사의 섬’에 가기 위해 노력했지만 왜 본인은 그곳에 가지 못하는지 궁금해 했다. 씨를 받아 아이를 낳으면 될 거라는 생각에 남편을 만나 한국으로 와 자매를 낳았지만, 현실은 그대로였다. 여전히 이방인이었고, 여전사의 섬으로 가지 못했다.

 

솔직히 무책임하다고 느꼈다. 떠나버린 엄마의 행방은 이후로 자세히 나오지 않았지만 아마 그녀는 자신만의 정답을 찾았을 거다. 모성이라는 단어 아래 그녀의 발목을 묶어놓을 수는 없지만, 자신의 깨달음이 헌신적인 남편과 어린 두 딸을 두고 가버린 데 대한 면죄부가 될 수 있을까.


함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은 없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자매는 다 커버린 이제야 엄마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있을 뿐이다. 엄마의 이야기가 자매에게 힘과 의지가 되고, 힘겨운 앞날의 등불이 되어 주기에 다행이지만 말이다.


 

[세종] 서울시극단_여전사의섬_엄마(김원정)2.jpg
 


다시 본론으로 돌아오면, 지니는 취업준비 중 용돈벌이를 위한 알바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고, 하나는 한 사건의 억울한 희생자가 되어 퇴사는 물론 파혼까지 당한다. 지니의 사장은 사회생활이라는 명분 아래 희생을 강요하고, 하나의 남자친구는 폭력성을 드러낸다. 그럴수록 점점 더 엄마의 존재가 간절해진다. 여전사의 섬이 그리워지는 것이다.

 

그래도 좌절하지 않는다.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았으니, 변화할 의지를 얻을 수 있었다. 엄마에 대한 자매의 심경이 직접적으로 나오지는 않았지만, 아마 자매는 엄마를 이해하기 시작했을 거라 추측한다. 늘 ‘나는 강인해’라고 외치던 엄마는 겉모습뿐만 아닌 내면까지 ‘강인한 나’, 진정한 ‘여전사’가 되기 위한 여정을 떠났을 것이라고.

 

즉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건 진짜 총칼을 들고 싸우는 그런 전사가 아니다. 갑옷을 입고 전장을 누비는 겉모습이 용감무쌍한 사람도 아니다. 진짜 전사는, 바로 ‘내면의 강함’이었다. 수없이 많은 부당대우와 갑질, 막막한 현실에 꿈을 짓밟히는 이 시대의 모든 청춘들이 올곧게 일어설 수 있는, 그런 마음의 중심을 세우는 행위를 실천하는 사람이 진정한 전사이다.

 


“나는 이미 여전사의 섬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어.”


 

영화 <아일랜드>의 ‘아일랜드’처럼 ‘여전사의 섬’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어디에나 있지만 어디에도 없는 유토피아 같은 환상의 공간일 수도 있다. 다만 불의에 맞서고 나를 나답게 살아갈 수 있게 하는 힘을 지닌, 즉 ‘여전사’로서 나아가게 하는 그 과정 자체가 ‘여전사의 섬’이라는 단어 아래 숨겨진 진짜 의미일 것이다.

 

부단히 노를 저으면 언젠가는 목적지에 도착하듯이 여전사의 섬을 잊지 않고 나아간다면, 어느 날 문득 나를 돌아보았을 때 진짜 ‘여전사’가 되어 있는 나를 발견할지도 모른다. 먹고살기 바빠 죽겠는데 요즘 누가 그런 생각을 하냐고 반문하지는 말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바로 내가 요즘 그 주제로 매일을 고민하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여전사의 섬’은 존재한다. 그리고 우린 모두 그곳에 갈 자격이 있다. ‘나’를 놓지 않을 의지만 있다면.



포스터(여전사의 섬).jpg

 


 

아트인사이트 문화예술알리미 태그.jpg
 



[주혜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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