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싸우고 있나요? - 연극 '여전사의 섬' [공연]

네, 당신은 싸우고 있습니다.
글 입력 2019.03.24 1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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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니와 하나는 아버지 밑에서 자란 평범한 쌍둥이다. 결혼을 앞둔 승무원 하나, 그리고 번번이 면접에서 탈락의 고배를 마시는 지니는 어느 날 아버지에게 어머니의 존재에 관해 묻는다. 아버지는 선뜻 두 딸들에게 아내와의 첫 만남부터 헤어짐까지 털어놓고, 지니와 하나는 자신들의 어머니가 바로 여전사 아마조네스였음을 알게 된다. 현 시대 청년으로서 느끼는 압박과 여성으로서 가해지는 폭력에, 쌍둥이들은 여전사 아마조네스를 떠올리며 용감히 맞선다.

연극 ‘여전사의 섬’은 서울시극단의 ‘플래시 온 창작플랫폼’ 선정작으로, 임주현 작가와 송정안 연출의 창작극이다. 2015년부터 2018년까지 4년간 진행된 ‘창작플랫폼 – 희곡작가’는 신진 극작가 양성을 위한 프로그램으로, ‘여전사의 섬’은 약 2년간의 준비 과정을 거쳐 무대에 오르게 되었다. 3월 22일에는 관객과의 대화가 준비되어 있었는데, 운이 좋게도 그날 관람을 하게 되어 작품의 의미를 더욱 깊게 이해할 수 있었다.


[세종] 서울시극단_여전사의섬_단체.jpg
 



내가 바로 여자 취준생이다



지니는 취준(취업준비)생이다. 면접과 자기소개서를 준비하는 동안 꽉 채웠던 두꺼운 공책이 열심히 살았다는 방증이 아니라 많이 탈락했다는 증거로 쓰이는 현실 앞에 한숨을 내쉰다. 자기소개서를 수만 번 뜯어 고치고, 면접 답변을 수없이 많이 수정해도 면접관 앞에서는 한없이 초라해진다. 공감하고 싶지 않아도 공감하게 되는 캐릭터가 바로 지니다.

20대의 취업난이 화두로 떠오른 게 몇 년 전부터였는지 가늠도 제대로 되지 않는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해서 취업이 안 되는 건지 모르겠다던 지인의 말이 떠오른다. 아직 취업 전선에 뛰어들지 않아 그 경쟁과 압박을 감히 예상치도 못하겠으나, 스펙을 위한 스펙, 그리고 그 스펙을 위한 스펙과 자격증을 위한 자격증의 굴레에서 허우적대다보니 ‘내가 과연 취업을 할 수나 있을까?’하는 막연한 두려움 정도는 갖추게 되었다.


[세종] 서울시극단_여전사의섬_시어머니(김시영) 시아버지(한윤춘).jpg
 

사실 소재의 보편성은 참 매력적이기도, 진부하기도 한 동전의 양면이다. 누구나 겪는 취업난이기에 드라마나 영화, 소설, 연극에서 수없이 많이 쓰이는 소재고, 현 시대 20대를 단적으로 드러내는 비유로 자리 잡기도 했다. 페미니즘도 마찬가지다. ‘82년생 김지영’과 미투 운동이 불러 온 페미니즘 물결은 정말 거셌다. 아직 페미니즘이 진부해질 만큼 많은 창작물이 생긴 것은 아니지만, 더 이상 여성의 이야기가 낯설지는 않을 정도의 보편성은 생긴 듯하다.

이 극은 하마터면 진부해질 수 있을 소재를 ‘아마조네스 신화’라는 특수한 소재와 더불어 섬세하고 독특하게 그려 냈다. 철저한 모계 사회이자 여전사의 사회였던 그들과 현대 사회의 여성들은 꽤 괴리가 크지만, 그 싸움의 규모는 엇비슷해 보인다. 나의 가치와 잠재력을 서류 몇 장과 면접 몇 마디로 증명해보여야 하는 20대들의 싸움부터, 취업난에 시달리다 카페 아르바이트에 정착하려 시도하지만 사장의 횡포와 갑질에 또 다시 맞서야 하는 여성들의 싸움까지, 이 극이 그리고 있는 여전사의 싸움은 철저히 시대적이다.


[세종] 서울시극단_여전사의섬_지니(허진) 하나(김유민).jpg
 


지긋지긋한 모성에서 탈피하다



[세종] 서울시극단_여전사의섬_엄마(김원정).jpg
 

페미니즘과 ‘여전사의 섬’ 사이의 연결 고리를 묻는 관객의 질문에 임주현 작가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


“페미니즘을 (소재로) 쓰고자 할 때 가장 먼저 생각난 것이 여전사였습니다. 지금 현실 세계에서는 여전사가 없잖아요. 그런데 과연 여전사가 정말 사라졌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겼습니다. 시대가 변하면서 여전사성(性)도 변화했을 수 있겠다고 접근했어요.”



과거의 여전사성, 즉 있는 그대로의 여전사를 내보이는 캐릭터가 엄마라면 현실의 변화된 여전사성을 대변하는 캐릭터가 지니와 하나다. 엄마는 여전사의 섬에 가기 위해 지니와 하나를 낳지만, 아이를 낳아도 여전사의 섬에는 가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고민에 빠진다.

대체 여전사의 섬은 어디에 있는 것인지 스스로에게 묻다가 점차 변화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자신을 위해서만 싸우지 않고 자신이 사랑하는 아이들과 가족들을 위해서 싸우고 있는 자신을. 그리고 엄마는 깨닫는다. 어쩌면 나는 여전사의 섬에 이미 당도한 것인지도 모른다고.


“페미니즘이라는 게 머물러있는 것이라기보다 우리의 원형을 찾아가는 길이라고 생각해요. 여전사를 현실로 끌어오면서 현실의 여전사를 만나게 해 보자, 모녀의 관계로서 만나게 해 보자고 생각했고, 이 시대의 딸과 연결되는 지점도 있습니다.”



[세종] 서울시극단_여전사의섬_엄마(김원정)2.jpg
 

인생이 흘러가고 인류의 역사가 뒤바뀌는 것과 마찬가지로, 페미니즘도 페미니즘만의 흐름 안에서 수많은 변화를 겪는다. 인간 존재의 의미와 삶의 본질에 대해 한 줄로 정의내릴 수 없는 것처럼 페미니즘의 의미와 정체성도 무어라 정확히 요약할 수 없는 게 당연하다. 하지만 한 가지, 페미니즘이 여성을 위한 학문이자 운동이라는 것만큼은 단언할 수 있다. 작가의 답변처럼 페미니즘은 어느 한 곳에 박제되어 있는 개념이 아니라 시대에 따라 가변적인 하나의 큰 물결이고, 그 물결을 이루는 주체는 바로 여성들이다.

인류의 시작과 함께 늘 인류를, 특히 여성을 괴롭혔던 가부장제 틀 안에서 모성은 여성성 중 가장 중요한 성질로 꼽혀왔다. 처녀와 비(非)처녀의 이분법 안에서 여성들이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은 모성의 획득이었고, 결국 모성은 여성을 어머니의 개념 속에 가두는 한계로 작용하기도 했다. 희생하는 어머니, 남몰래 눈물 흘리며 자식의 뒷바라지를 위해 인생을 바치는 어머니, 이러한 모성 프레임은 여전히 많은 창작물에서 찾아볼 수 있다.


"희곡상에서도 모녀가 직접 만나는 장면은 없어요. 여전사의 서사는 독립적이고, 모녀 관계는 시각적으로만(연출로) 드러냈습니다. 직접적으로 만나면 작가님의 의도와 멀어질 것 같아서 제외했어요." - 연출

"페미니즘에서 가장 중요한 건 선택권이라고 생각해요. 많은 여성들이 희생을 강요받지만 선택을 할 권리는 없죠. 선택을 했을 때 오히려 반박을 받기도 하고요. 그런데 희생은 강요할 수 없고, 그런 맥락에서 하나가 “희생은 내가 선택하는 거”라는 말을 하는 거예요." - 작가


그래서 이 극이 특별하다. 극 속 엄마는 가부장제의 여성성과 완전히 대비되는 ‘여전사’다. 남성성으로 똘똘 뭉친 아마조네스의 모성은 그 존재만으로도 충분히 문제적이고 페미니즘적이라 할 수 있다. 아마조네스의 희생과 싸움은 외부의 강요에 의한 행동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서 비롯된 주체적 행동이다. 아마조네스의 모성이 가부장제 하의 성녀와 창녀 이분법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이유다.

그리고 두 딸들의 싸움 또한 어머니의 영향만으로 시작된 게 아니라는 점도 흥미롭다. 이 극에서 말하는 싸움은 곧 생존이기에, 아마조네스를 모르던 과거에도 끊임없이 무언가와 싸우고 있었다. 단지 아마조네스를 알게 된 후 자신들의 싸움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을 뿐이다. 하나와 지니는 언제나 여전사였고, 앞으로도 여전사일 터다.

*

‘지니와 하나(1)다.’

이름에 담긴 뜻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작가는 이렇게 답했다. 지니와 하나. 세상의 모든 지니들이 당당히 맞서 싸우는 그날까지 이 연극이 계속 되길 바란다.


포스터(여전사의 섬).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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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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