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굽은 등을 보고야 말았다. [기타]

글 입력 2019.03.22 1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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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우리 집 서재에 놓여있던 책 한 권을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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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력이 좋지 않아 책 읽기를 일찍 그만두셨던 아빠. 그런 아빠가 고르신 몇 안 되는 책 중 하나였다. '아버지 마음'. 내가 꽤 어릴 때부터 책장에 꽂혀 은은하게 그 존재감을 뿜어내던 책. 잠자리에 들기 전, 종종 이 책을 들고 방으로 향하시던 아빠의 모습이 떠오른다.


*


바쁘지도, 바쁘지 않지도 않은 무채색의 나날들을 보내고 있다. 개강의 '설렘'은 세 번째 개강 이후 그 모습을 감췄고, 머지않아 1년 뒤면 이 정든 학교를 떠나야 한다는 '아쉬움'만이 가슴 한편에 자리 잡고 있을 뿐이다. 4년 동안 누렸던 '대학생'이라는 수식어에 마침표를 찍을 순간이 코앞으로 다가왔지만, 장장 2시간이 넘게 걸리는 통학 길을 나서기 위해 새벽마다 눈 비비고 일어날 때면, '학교 가기 싫다'라고 투덜대는 마음을 막을 수가 없다.


내년이면 지하철에서 그간 무수히 들었던 학교 앞 역의 이름을 듣을 일이 없고, 내 이름을 불러 줄 교수님도 없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서운하지만, 새벽마다 '왕복 5시간'이라는 현실에 좌절하고야 만다. 아이러니하게도, 벌써부터 그리운 학교의 거리를 오롯이 느끼며 예쁜 마음으로 걸어도, 다음 날 눈을 뜨면 어느새 '가기 싫은' 학교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아빠 출근한다



그날은 무슨 영문인지 눈이 평소보다 일찍 떠졌다. 완연한 봄이 오기 전이 어서였는지, 창밖은 아직 암흑처럼 깜깜했다. 해가 떠오르기 전 거리의 풍경에 보이는 거라곤 가로등뿐이었다. 그런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밖으로 나가며 아빠는 말씀하셨다.


"일어났어? 아빠 출근한다."


아빠가 떠난 자리에 굽은 등의 형상만이 내 눈에 오롯이 담겼다. 근 30년간 매일 이렇게 말씀하셨을 아빠. 4년이라는 시간도 견디지 못해 투덜대던 사람은 감히 가늠도 할 수 없을 만큼, 치열하고 악착같이 살아오셨을 분이었다.


싸이의 '아버지'라는 노래의 한 구절이다.



위에서 짓눌러도 티 낼 수도 없고

아래에서 치고 올라와도 피할 수 없네

무섭네 세상 도망가고 싶네

젠장 그래도 참고 있네 맨날

.

.

.

여보 어느새 세월이 많이 흘렀소

첫째는 사회로 둘째 놈은 대학으로

이젠 온 가족이 함께 하고 싶지만

아버지기 때문에 얘기하기 어렵구먼

세월의 무상함에 눈물이 고이고

아이들은 바빠 보이고 아이고

산책이나 가야겠소 여보

함께 가주시오


- 「아버지」, PSY



"아버지이기 때문에, '이젠 온 가족이 함께 하고 싶다'라고 얘기하기 어렵다."


여태껏 함께 하고픈 마음을 얼마나 꾹꾹 눌러 담으셨으면 저 말 한마디 하기가 그렇게 어색하고 힘이 드셨을까. 지난 세월 우리가 아버지께 지어드렸던 삶의 무게가 아버지로 하여금 저 말을 할 수 없게 만든 건 아니었나, 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친다.




아버지 마음



한때, 아니 지금까지도 유효하게 여겨지는 '인생은 육십부터'라는 새로운 트렌드는 우리 삶의 많은 것을 바꿨다. 육십 이후의 삶이 이제는 '노후생활'이 아닌 '새로운 시작'으로 여겨지게 되었고, 이러한 분위기에 맞춰 출판된 책(예를 들면, '나는 120살까지 살기로 했다')과 방영 중인 tv 프로그램(예를 들면, '불타는 청춘')은 큰 인기를 누렸다.


나 역시 다양한 매체에서 쏟아져 나오는 말만을 믿고 반백살이 청춘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은 아빠에게도 예외가 아닐 것이라고 믿었다, 적어도 그의 굽은 등을 보기 전까지는.


*


평소 하지 않았던 일들을 처음으로 하려고 할 때, 사람들은 엄청나게 떨거나 혹은 엄청나게 어색해한다. 실패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으로 인한 떨림이거나 혹은 몸에 익지 않아서 생기는 어색함이다.


세상은 많이 변했고, 생각보다 많은 분들이 은퇴 후의 새로운 삶에 대해 고뇌하고, 실제로 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인생을 살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세상에는 새로운 삶에 대해 주저하는 수많은 아빠가 있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과 스스로에 대한 어색함으로 자신의 삶을 망설이는 수많은 아빠가 있다.


아버지께 지탱해 온 우리의 지난 세월 동안, 아버지는 내내 망설이기만 하셨나 보다. 새로운 인생을 살기를 망설이는 것을 보면. 또 우리에게 '이젠 온 가족이 함께 하자'라고 이야기하는 것을 망설이는 것을 보면.


아빠의 손을 잡고 올랐던 인생이라는 산을 이제는 내 힘으로 오를 차례이다. 아빠의 손을 잡고 산을 오르는 동안 어느새 커져버린 우리의 손으로 이제는 아빠의 손을 잡아주는 것은 어떨까. 망설이는 아빠의 손을 잡고 '함께 가자'라고 이야기하는 우리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



[김민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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